2014년 1월 16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2014. 1. 16. 오후 9: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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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6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시자

그는 곳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마르1,40-45)

 

 A leper came to him

and kneeling down begged him and said,
“If you wish, you can make me clean.”
Moved with pity, he stretched out his hand,
touched the leper, and said to him,
“I do will it. Be made clean.”

The leprosy left him immediately,

and he was made clean.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인들은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계약 궤를 진영으로 모셔서 승전을 꾀하지만, 오히려 사력을 다한 적들에게 섬멸되고 계약 궤마저 빼앗긴다. 이때 합당하지 않은 모습으로 사제직을 수행한 엘리의 두 아들도 죽임을 당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간절히 청하는 나병 환자를 낫게 하신다. 그는 예수님의 분부를 어긴 가운데 자신의 치유 이야기를 널리 퍼뜨린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엘리의 아들들과 이스라엘군은 계약 궤의 힘으로 적에게 승리할 수 있다고 믿고 그 궤를 진영으로 옮겨 옵니다. 언뜻 보기에 이는 주님에 대한 신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정은 기대와 달리 파국으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군은 섬멸당하고 계약 궤는 적들에게 빼앗깁니다. 또한 엘리의 두 아들도 죽고 그 집안은 몰락합니다.
우리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이보다 앞서 서술되는 ‘엘리의 집안은 망한다.’는 내용의 주님의 말씀(2,27-36)과 엘리의 아들들의 악행(2,22-26)에 관한 내용과 연관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엘리의 아들들과 이스라엘인들이 계약 궤에 대해 보인 태도는 참된 신앙이 아니라 가장 거룩한 것을 ‘수단’으로 여긴 사실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그들 삶의 방식을 주님의 말씀과 계명에 따라 변화시키려는 노력 없이, 그리고 하느님의 현존을 그 자체로 경외하는 가운데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참된 경건함도 없이, 주님께서 함께해 주신다는 사실을 자신들의 목적과 계획을 성취하는 영험한 도구로 여기는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어쩌면 주님을 모르고 있는 ‘이방인’보다도 신앙의 참모습과 더욱 동떨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많은 경우에 이러한 교묘한 불신앙의 유혹과 직면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전체의 삶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절반의 삶만을 내어놓으며 그것을 믿음이라고 자족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진짜 관심이 머무는 나머지 절반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격하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절반의 인생이 아니라 온전한 삶을 바란다면, 삶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던지는 신앙생활의 용기와 진실함이 필요할 것입니다.

  

 

회는 싱싱한 무채와 함께

-전삼용신부-

 

오늘 성당 한 봉사자 단체와 옻 오리 요리를 먹으러 갔었습니다. 벽에는 옻 오리의 효능에 대한 설명이 커다랗게 붙어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대충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끝까지 다 안 읽으셔도 될 듯합니다.

[여성들의 생리불순 및 생리통에 탁월한 효과, 허리 통증, 근육통, 어깨 결림, 멍들었을 때 어혈(나쁜 피)제거, 항암 효과에 뛰어난 우루시올 50% 함유, 숙취해소, 위장보호 효과, 원기 회복과 정력 증진의 효과, 속이 냉하거나 손발이 찬데 효과, 장이 부실하여 설사가 잦은데 효과, 위장에는 소화제가 되고, 간에서는 어혈약이 되어 염증을 다스림, 어혈과 적취를 풀고 혈액과 체액의 순환을 돕는 효과, 만성질환의 치료와 기력을 활성화하는 효과, 폐암, 위암세포, 생장억제기능 항암제보다 더 뛰어나 면역력이 강해져 탈모, 구토 같은 부작용을 적게 하는 효과, 뼈의 부러짐, 소화기관과 만성위장병(위염, 위궤양, 위무력증, 위하수증), 골수염 및 골수암 오장의 안정, 가래 및 기침 , 월경불순과 여성 냉대하, 묵은 응혈과 적체의 해소, 자궁암 및 부인병, 만성류마치스, 중풍 , 구충제 , 당뇨병 , 신장병 , 발기부전, 피로회복 주독(술독) 관절염, 신경통 피부병, 암의 예방 및 수술 후 전이방지, 당뇨병 지방간에 효과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만병통치약입니다. 그런데 옻에는 독성이 있어 체질에 따라 많은 차이로 반응을 하는데 심장이 약하면 그 발열 때문에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선 겁을 집어먹고 식당에서 주는 약을 미리 받아먹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옻나무에 스치기만 해도 반응을 하시는데, 저도 그 피부를 물려받았기에 살짝 겁이 났던 것입니다. 물론 그리고는 옻 오리요리를 맛나게 먹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하느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도 이와 같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사제에게만 보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이후로 드러내놓고 다니실 수가 없으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 문제라기보다는, 당신의 적들이고 방해꾼들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까지도 불러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방해하던 사람들입니다.

나병까지도 치유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지녔었지만, 그 치유의 은혜와 함께 교만까지 들어왔던 것입니다. 사람이 칭찬을 받거나, 높아지거나, 성공하거나, 은혜를 입으면 그것과 함께 들어오는 것이 ‘교만’입니다.

치유된 나병환자는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를 퍼뜨리지 말라고 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의 생각으로는 많은 사람에게 퍼뜨리는 것이 예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이 더 커져서 불순종하게 만드는 것이 교만입니다. 
 

어떤 대령으로 진급한 사람이 새로운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와 거울에 계급장을 비춰보다가, 한 사병이 들어오자 잘난 척 하느라고 장성들과 전화 통화를 하는 흉내를 냈습니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잘난 체하는 표정으로 사병에게 근엄하게 말했습니다.

“무슨 일로 왔는가?”

“대령님 사무실에 전화선을 연결해드리라고 해서 왔습니다!” 
 

계급장을 달았으면 그것과 함께 들어오는 교만을 해결해야 이런 창피를 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치유하거나 기적을 일으키던 사람이 나중에는 사탄에게까지 그 신비한 힘을 청한다고 하는데,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그 교만 때문에 하느님께서 더 이상 도움을 주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그 교만의 독을 그때그때 없애지 않으면 쌓이고 쌓여서 자신을 죽이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생선회는 성인병을 예방하는 불포화지방산인 EPA와 뇌세포를 활성화시키는 DHA 등이 함유돼 있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산소와 궁합이 잘 맞아 육류지방에 비해 산화가 무척 빠르고, 일단 산화하면 불포화지방산인 EPA와 DHA의 기능이 상실되면서 오히려 몸에 해로울 수 있고 합니다. 사람이 산화된 음식을 섭취하면 몸도 역시 산화가 됩니다. 산화는 곧 노화로 연결되기 때문에 우리 몸에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를 쓸어 ‘싱싱한 무채’ 위에 놓고 또 무채와 함께 먹으면 그 무채에 듬뿍 함유된 비타민 C가 이들의 영양소의 산화를 막는 항산화제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경우 약을 복용할 때 식후에 소화제와 함께 먹는 것처럼, 그 뒤처리도 확실히 해 주어야 위를 보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모든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새로 배우던, 기도한 것이 이루어졌던, 무엇에 성공을 했던, 오로지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고 더 겸손해지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어떤 은혜건 오히려 독이 되는 것입니다.

 

치유받기 위한 용기

-김수환 신부-

 

어느 숲에 어미 곰이 겨우내 새끼를 한 마리 낳아 봄이 되어 굴에서 새끼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새로 만나는 동물들과 꽃, 나무들과 하루 종일 놀다 보면
아기 곰의 얼굴은 흙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미 곰은 아기 곰에게
숲 가운데 맑은 물이 흘러드는 연못을 알려주며 가서 씻고 오라고 말했습니다.
얼굴을 씻으려고 연못을 들여다본 아기 곰은 놀라 도망쳤습니다. 맑은 연못에
비친 얼굴이 너무나 더러워 다른 무언가를 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연못에
갈 때마다 아기 곰은 또 놀라 달아났습니다. 이러기를 며칠, 엄마 곰은 직접
아기 곰을 데리고 연못에 갔습니다. 엄마는 아기 곰을 연못에 밀어넣었습니다.
아기 곰의 얼굴과 몸에 묻었던 오래된 때가 씻겨 내려갔습니다. 아기 곰은
연못가에서 자기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 거기엔 뽀얀 아기 곰 얼굴이
있었습니다. 엄마 곰이 일러 주었습니다. “더러워진 얼굴에 무서워 말고 물에
풍덩 뛰어드는 거야, 알았지?” 예수님 시대 당시, 나병 환자가 길에 나와 보통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그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나올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나병 환자는
대담하게 예수님께 다가섭니다. 용기를 내었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 죄의
추악함 때문에 우리는 용서를 청하기보다는 숨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죄를
숨김없이 예수님께 드러내 보일 때 그분의 치유와 용서를 만나게 됩니다.

나한테 무슨 냄새가 날까?

-한상갑-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본 한 나병 환자는 ‘스승님께서는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라며 무릎을 꿇습니다. 이를 본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라는 한 말씀으로 그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이 함구령을 내리셨음에도 이 행적은 널리 알려지고 퍼져서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분께 모여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매달리는 이 나병 환자한테서 신앙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예수님한테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됩니다.
제 작은아버지께 신앙을 갖도록 말씀드릴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무개가 네가 다니는 성당 회장이라며? 그런 사람이 회장이라면, 나는 신자 안 되어도 천당에 갈 수 있으니 걱정 말거라.” 아마 그 아무개 회장한테서는 예수님 냄새가 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첫 신자 공동체’는 날마다 함께 지내고 가진 것을 나누며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게 하여,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생명의 향내’를 피우라고 이르십니다.
그래서 문득 저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나한테서는 무슨 냄새가 날까?’

 

 

주님의 따스함으로

- 황지원 신부-

 

떼제 기도 모임에 참석하면 참으로 단순한 기도와 선율이 주는 편안함과 진솔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하며 그 안에서 예수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게 되는데, 그 가운데서도 커다란 십자가에 손과 머리를 대고 그분을 만나는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행위에 자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십자가를 만지고 거기에 자신을 의지할 때, 단순한 나무가 아닌 그분의 체온을 느끼고 그분의 손길을 체험하게 해주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것에만 머물렀던 저에게 그분을 만지고 함께하는 체험은 그분께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나병 환자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으로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환자이면서 또한 부정한 죄인이었습니다. 그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가서 병을 고쳐주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부정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 다가가서 깨끗하게 해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얹어주십니다. 누구도 가까이 하길 원치 않던 그에게 다가가시며, 그에게 손을 얹어주신 것입니다. 그의 병은 깨끗해지고, 그의 마음 또한 예수님의 손길에 의해 따스해짐을 느낍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 누구도 위로해 주지 못할 때, 누군가를 용서하기 힘들어 마음이 어두워질 때, 그 순간 우리도 그분께 다가가 깨끗하게 되기를 간절히 청해 봅시다. 나병 환자처럼 우리의 상처가 다른 사람들과 멀어지게 하는 순간 그분께 다가가 간절히 청하고 그분의 십자가에 우리의 머리를 조아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따스함을 만나봅시다. 분명 그분께서 손을 얹어주시고 우리의 아픔과 어둠을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김광태-

 

수십 년 동안 죽음의 질곡에 묶어 두었던 나병에서 치유되었는데, 어찌
침묵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지킬 수 없는 너무 무리한 요구였습니다.
어차피 말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모르겠습니까? 깨끗해진 몸 자체가
이미 외치고 있는 걸요. 우리가 왜 신앙을 전하는 일에 소극적일까요?
자신감도 부족하고 부끄러움을 타는 것도 문제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오늘 복음의 나환자처럼 죽었다 살아난 것 같은 강한 치유의 체험이 없다는 것 아닐까요?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신경쓰며 살다 보니, 자기 영혼이 나병에
걸린 것처럼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도 문제고,
그것을 치유해주실 예수님께 간절하게 매달리지 않는 것도 문제고, 예수님께
다가가긴 해도 그분이 하시는 신기한 일과 말씀에 놀라워하면서도 여전히
구경꾼으로만 머물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오직
나 하나만을 찾아오신 분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구원을 받고,
그 소식을 전하면서 다른 사람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그대에게...

-상지종신부-

 

선생님께

 

선생님을 귀찮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온통 당신에 대한 것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제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에 저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말상대가 되기는커녕 시선조차 주는 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결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제 팔자려니 생각했을 따름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저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다가 그날 당신을 만났습니다.

낫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기특한 청원이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를 낫게 해주십시오’라고 떼를 쓰고 싶었을텐데.

 

어쩌면 그것이 당신을 향한 소박한 믿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항상 외톨이로 당하면서 살아온 제가,

당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제가,

낯선 당신을 만나 드릴 수 있었던 말씀의 전부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은 달랐습니다.

썪어 문드러진 제 몸을 만져주셨지요.

저는 이미 그것으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굳이 제 몸이 다시 깨끗해지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제가 분명 살아있는 한 사람이라는 잊혀졌던 사실을 일깨워주셨기에

저는 새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학대하며 살아온 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저를 향한 쌀쌀맞은 시선과 공동체의 냉대가 얼마나 정의롭지 못한 것이었는지,

당신은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당신을 만난 이후,

제가 새롭게 태어난 이후,

저는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저의 깨끗해진 몸을 보아야 할 제관이 아니라,

저처럼 자신을 학대하며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벗들이,

공동체의 이름으로, 보잘것없는 이를 철저히 소외시키는 이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던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 이야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더욱 힘들어지셨다면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제가 원했던 것 단 하나는 제가 받은 새 삶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는 것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은 믿어주십시오.

 

어쩌면 제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선생님 이야기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도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이름없이 죽어가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참된 삶인지,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인지 모르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 못난 이들, 부족한 이들을 철저히 내리누르는 현실이

버젓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당신을 귀찮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당신의 엄하신 말씀을 어기려는 생각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구요.

더이상 무슨 말씀을 필요 하겠습니까.

 

언제 다시 선생님을 뵈올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심을 믿기에,

오늘도 당신께서 주신 새 생명으로 기쁘게 나아갈 것입니다.

그럼 다시 뵈올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사랑하는 그대에게

 

그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대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용히 외딴 곳에 머물면서 이제까지 만난 이들을 떠올립니다.

물론 당신도 그 중에 하나이구요.

 

나는 그대들에게서 아름다운 생명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곱게 곱게 넣어주신 그 생명을 말이지요.

그러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 생명을 철저히 찢겨져 있었답니다.

 

찢는 이들, 찢기는 이들 모두가 고통스러운 현실이지요.

찢는 이들은 고통을 못 느끼고,

찢기는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기에

나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대가 자신의 고귀함을 되찾기를 바랬습니다.

그대는 나에게 너무나도 절절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선생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대는 어느 누구보다도 내 뜻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말을 들으면서 세상 어느 무엇도 갈라놓을 수 없는 완전한 일치를 느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는지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시오."

 

나와 그대는 분명 그 순간 하나였습니다.

그대는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온 세상이 새롭게 태어날 그 날을 향한 소중한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그대는 기쁨은 곧 나의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날의 기쁨이 퍼지고 퍼져 온 세상을 가득 메울 날을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내가 그대에게

왜 그날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는지 알겠습니까.

행여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그날 그대와 내가 함께 나누었던 기쁨의 의미를

잘못 받아들이는 이들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거듭남이 지닌 깊은 뜻을 모르는 이들이

단지 겉으로만 변하려 할 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행여 나에 대한 그릇된 선입관이 생겨 나를 마치 현실적인 이익을 챙겨주는 이 정도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지금 이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다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 조금은 아쉽습니다.

나는 삶을 통해 내 자신을 서서히 드러낼 것이고,

시간이 흐른 후에 나에 대한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나의 편안함을 때문에 나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피하기 위해서,

그날 일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언제 어디서나 그대가 함께 해주기를 바라는 그들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대를 떠올릴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대가 지닌 그 아름다운 믿음과 희망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서로를 가슴에 품고

- 조정희 수녀-

 

부산에서 만난 백 루미네 수녀님이 생각난다. 6·25전쟁 후 우리나라에 와서 농사도 짓고 땀 흘려 일하시느라 거칠어진 손이 말씀보다 더 많은 말을 했던 수녀님, 가난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살며 엄마 노릇을 하던 푸른 눈의 수녀님을 만날 때면 ‘무엇이 이분으로 하여금 익숙한 땅을 떠나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이며 가난한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게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가슴으로 느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올해 네 분의 수녀님이 에콰도르로 파견받아 떠났다. 적도의 나라, 우리나라의 중복과 비슷한 날씨에 먹는 물, 씻는 물 한 방울이 귀하고 수술 중에도 정전이 되는 나라, 미사 시간에 성당 중앙에 개가 돌아다니고 새들이 유유히 날아다니는 가운데 신자들이 뜨겁게 박수치며 축제처럼 즐기는 나라. 가난하지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며 에콰도르 사람으로 강생하길 바라는 수녀님들이 스페인어 단어 하나하나를 배우며 어린 아기가 된 느낌이라는 소식을 전해 왔다.
수녀님들이 파견될 때 어떤 수녀님이 “우리 모두 함께 가는 것”이라고 했다. 수녀님들이 떠나면서 남은 분들이 일을 더 나누어 맡고,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으로 수도회가 다 함께 가는 거라고…. 수녀님들이 우리를 가슴에 품고 에콰도르로 가시듯 우리도 수녀님들을 가슴에 품고 각자의 사도직을 열심히 하는 것이란 마음이 들었다.
주님의 손길이 닿아 구원되고 자유로워지는 기쁨을 누린 나병환자가 공동체에 통합되어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는 님의 마음과, 당신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시는 사랑이 오늘 새롭게 다가온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명 강의로 유명한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이 신부님의 강의가 워낙 훌륭해서 항상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지요. 어느 주일 날, 이 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신부님의 명 강의를 듣기 위해서 성당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강의는 아침부터 시작해서 저녁 늦게야 끝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부님의 강의에 큰 힘을 얻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님께서 강의를 듣고 집에 갔으나, 남편이 화가 나서 문도 열어주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쉬는 날이라 집에 있는데, 하루 종일 어디를 갔다 온 거야?”

“오늘 성당에서 신부님의 강의를 듣고 오느라 늦었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러자 남편은 여전히 문을 꽉 닫아걸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부 얼굴에 침을 뱉고 오기 전까지 이 집에 얼씬도 하지 마!”

결국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이 사실을 강의를 했던 신부님께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미사 때, 신부님께서는 강론 시간에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지금 눈이 몹시 아픕니다. 그런데 이렇게 눈이 아플 때에는 침이 효과가 크다고 하네요. 앞에 계신 자매님, 괜찮으시다면 제 눈에 침을 좀 뱉어주시겠습니까?”

신부님께서 지목하신 자매님은 바로 신부님의 강의로 인해서 집에서 쫓겨난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매님께서는 신부님의 말씀을 따라서 얼굴에 침을 뱉었지요. 그런데 이제 이 자매님은 집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신부님 얼굴에 침을 뱉었으니까요. 신부님의 이런 사랑 깊은 배려를 알게 된 남편도 이제는 성당에 열심히 나가게 되었다고 하네요.

말만 잘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진정한 평화와 사랑을 위한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말만으로 끝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예수님께서도 훌륭한 말씀,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말씀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힘이 있는 이유는 말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실천을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를 위한 말만 하기에 급급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치유된 나병 환자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는 말씀을 들었지요. 하지만 그는 이 이야기를 널리 알라고 퍼뜨리기 시작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이 이제 깨끗하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은 깨끗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결과 예수님을 그 고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서 치유되어야 할 다른 사람들의 혜택을 막고 말지요.

자기를 들어내는 말은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격언이 생각납니다.

“비난 받기를 원하면 스스로 높이고, 존경 받기를 원하면 스스로 낮춰라.”

여러분은 비난 받기를 원하십니까? 존경 받기를 원하십니까?

 

스스로 낮추는 존경받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측은지심(惻隱之心)     

-박기호 신부-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셨습니다. 제아무리 영성의 대가요 말씀의 탈렌트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의 사람됨이 부족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강론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데 그와 함께 생활하거나 일하는 사람들은 고개를 흔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독선적이고 괴팍하고 손님에겐 친절하지만 가족에겐 짜증내고…. 그런 류의 사람은 참 힘듭니다. 인격이 ‘덜된 사람’입니다. 머리가 좋아서 ‘난 사람’은 되었지만 ‘인간됨’은 멀었다는 뜻입니다. 예수살이가 ‘예수의 인간성 닮기’를 수덕생활의 방법론으로 삼는 것은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이 되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됨에 완전한 분이십니다. 더 이상 좋은 품성을 찾을 수 없기에 하느님이 아니고선 그런 인간성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인간이면서 하느님’이십니다. 유학 사상에서는 ‘사람 됨’이 교육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의염치를 아는 인의예지의 인간을 만드는 것이 교육입니다. 인의예지의 품성은 인간의 네 가지 본성, 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에서 나온다고 보았는데 그의 자양을 강조했습니다. 그중 품성론의 으뜸되는 것이 측은지심입니다. 타인의 불행한 처지를 자기 처지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의 힘은 바로 이 측은히 여기며 손을 내미는 데서 온 것입니다. 인간의 좋은 품성은 하늘이 알아주는 덕이고, 긍휼한 마음은 기적을 이끌어내는 힘입니다.

 연민을 느낄 때

-박영대-
 

딸들이 아프면 우리 부부는 딸 걱정도 걱정이지만 어머니 걱정을 더 한다. 손녀들을 안쓰러워하시는 어머니께서 식욕도 잃고 걱정을 태산같이 하시기 때문이다. 또 딸들의 병은 거의 틀림없이 부모님이 다투시는 이유가 된다. 안쓰러워 약을 먹여서라도 빨리 낫게 하려는 어머니, 약은 자연 치유력을 약하게 하니 약 없이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아버지. 그 다툼은 딸들이 나을 때까지 계속된다. 나도 생각이야 아버지와 같지만 결국 딸들에게 약을 먹이는 쪽을 선택한다. 어떻게든 빨리 나아야 어머니 걱정이 끝나고, 약이라도 먹여야 어머니가 마음을 놓기 때문이다.
가끔 막내딸을 데리고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 가곤 한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약을 먹이는 게 안쓰러워 이것저것 의사에게 묻곤 하는데 그 대답은 대부분 퉁명스럽다. 어머니의 연민, 어린 손녀를 가엾이 여기는 그 마음에 의사는 함께해 주지 않는다. 그때마다 속상하고 화도 난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얼마 전 오래 감기로 고생한다는 후배를 다그쳐 아는 한의사 선생님께 갔다. 진료를 마친 후배 말. “처음 만났는데도 나를 정말 걱정해 주셔서 고마웠어요.” 의사는 연민의 사람이어야 한다. 의사의 연민을 느낄 때 이미 환자는 치료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어디 의사뿐인가? 사제도 수도자도 평신도도, 예수님을 따라 살겠다고 작정한 사람은 모두 연민의 사람이어야 한다. 흉하게 짓무르고 고름 흐르는 얼굴이 아니라 나병환자의 고통과 슬픔이 먼저 보여야 한다. 그런데 연민을 가진 의사를 만나기 어려운 것처럼 연민을 가득 품은 신자를 만나는 것도 어렵다. 나부터 그렇다. 난 아무래도 어머니보다 아버지 쪽을 닮은 모양이다. 
  

  

 그래, 그렇게 해 줄께!

-오상선신부-

 

내가 누구에게
무슨 부탁을 했을 때
그가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면서
<그래, 그렇게 해 주마!>해 준다면
얼마나 기쁘고 좋은가?
 
반대로
내가 누구에게
무슨 부탁을 했는데
그가 망설이면서
<글쎄, 한번 생각해 보지>
이렇게 말하면
좀 찜찜하겠지.
 
한걸음 더 나아가
내가 누구에게
무슨 부탁을 했는데
그가 일언지하에
<안돼, 딴 데 가서 알아봐!>
이렇게 말하면
욕나오겠지...
 
반대로 누가 나에게
부탁을 해 올 때
나는 어떻게 하고 있지???
흔쾌히
<그래, 그렇게 해 주마!>라고 하는가? 항상...
 
이렇게 생각하며
돌아보니
이렇게 흔쾌히
<그래, 그렇게 해 주마!> 한 적이 많지 않은 것 같구먼...
 
어떤 사람이,
그것도 인간 취급도 못받던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에게와서
<저를 깨끗하게 좀 만들어 주소> 하고 청한다.
예수께서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그래, 그렇게 해 주마!> 하신다.
 
예수의 이 자세를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든지
다른 이의 부탁,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든 무시하는 사람이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그 어떤 부탁에도
<그래, 그렇게 해 주마!>라고 답하자.
 
오늘
누가 나에게 부탁 좀 안 하나???
흔쾌히
<그래> 한번 해 보게 말이다...
 
사실
보잘것없는 나에게 도움이 되어달라고 부탁받는 자체가
감사할 일이 아닌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나인데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거 하나만으로도
내 인생은 충분히 살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용서와 헌신의 삶
-이기양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 한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1,41)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병 증세가 깨끗이 사라졌지요. 예수님께서는 치유된 나병환자를 보내시며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1,44)

그러나 나병환자는 이 놀라운 치유 기적을 온 동네에게 퍼뜨렸다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오늘 복음을 대하면서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나병환자를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대목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엄하게 이르셨을까요? 우리는 나병환자가 한 것처럼 온 동네에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 오히려 더 예수님을 잘 알리는 일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나 말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장면이 수시로 나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30)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지요. 그 이유를 알면 마르코 복음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천 년 동안 메시아를 고대하였습니다.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켰던 모세처럼 로마의 지배 하에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지요. 로마의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여 부유하고 강한 일등 국가로 만들어줄 메시아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연약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마땅히 거처할 곳도 없이 이 세상의 삶을 마구간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 받은 사람들과 일생을 함께 하셨지요. 싸워서 이기기보다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으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당신의 몸과 피를 아낌없이 내어 주시며 성체성사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낮은 이러한 모습을 당신의 삶으로 직접 보이시면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를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3-45)

예수님께서는 부와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권력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권력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 그리고 아낌없이 주는 삶이 세상을 구원하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가 권력과 부의 메시아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와 아낌없이 내어주는 메시아임을 드러내신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메시아관이 전달되는 것을 막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는 참된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마르코 복음 사가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함구령의 이유이고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메시아관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모시고 따르는 우리는 세상의 논리대로 힘과 권력의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용서와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평화를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마치 우리 몸의 혈액이 하는 역할과도 비슷합니다.

우리 몸의 혈액에는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혈장이라는 성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백혈구는 우리 몸에 어떤 이상한 침입자, 병균이 들어오면 얼른 그 침입자를 처리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백혈구가 어떤 방법으로 침입자를 처치하는지 아십니까? 얼핏 생각하면 아주 강력한 방법을 쓸 것 같지요. 그런데 과학자들에 의하면 백혈구는 침입자를 향해 절대 무리한 힘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백혈구는 그저 그 침입자를 품에 꼭 껴안아 버린다는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백혈구에게 안긴 그 침입자는 그냥 녹아버리고 말지요. 백혈구에는 보기 싫든 지저분하든 가리지 않고 모두 다 껴안아서 친구로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골수에서 태어나 폐에 가서 산소를 받아들여 자기 몸에 지니는 적혈구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산소를 얻어야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우리 몸의 모든 기관에 있어서 산소는 생명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적혈구는 언제나 이런 생명의 산소를 풍성하게 얻어서 가지고 다니다가 혈액 속에서 산소가 필요한 곳이 있으면 아낌없이 다 전해 줍니다. 단 0%도 남기지 않고 100% 다 넘겨주지요. 그리고는 4일쯤 살아 있다가 비장에 가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고 합니다.

우리 몸의 모든 것들은 세포 하나까지도, 자신을 위해 사는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백혈구는 모든 것을 감싸주는 반면, 적혈구는 모든 것을 나누어 줍니다. 그런 혈액이 바로 우리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고 있지요. 내가 남을 위해 100%로 봉사하듯이 남도 나에게 100% 봉사한다는 원리가 우리 몸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은 세상 사람들처럼 힘과 미움과 보복의 논리가 아니라 비록 고통이 따르더라도 그 모든 것을 포용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

예수님의 이 말씀이 바로 부활의 길이요 영생의 길임을 깨닫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노력

--이철구신부- 
 

살아가면서 누구나 맑고 순수한 영혼으로 살아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 누가 악하고 타락한 영혼으로 살아가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가 마음먹은 것처럼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맑고 깨끗한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신다 하더라도
우리의 노력이 없다면, 또 주님을 향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맑고 깨끗한
영혼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을 향한 믿음과 나의 원의는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것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향한 맑고 깨끗한 영혼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하시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으시지만
우리의 노력과 원의를 보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봉헌의 기도를 바치며
맑고 깨끗한 영혼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합시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유 루시아 수녀 -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겪으신 후에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시는 중에 일어난 일을 전해줍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래서 손을 갖다 대셨다고 하십니다. 우리보다 불행한 사람들을 볼 때 우리 마음도 측은해져서 남을 위한 사랑이 우러나옵니다. 그때 사람들은 나병환자를 만지면 감염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만사를 초월하고 이러한 위험을 넘어설 만큼 컸습니다.
우리 모두도 나병환자처럼 남들이 싫어하는 성격의 한 면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치유받아야 하고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더 잘 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있는 나병을 고쳐야겠습니다. 주님, 제 마음의 나병을 고쳐주십시오. 오늘 다시 한번 노숙자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빌며 감사드립니다. 
  

 

    마음이 짠해서...

-이찬홍 신부-
 
예수님께서 지니신 마음 중에 저는 측은한 마음을 좋아합니다.
측은한 마음은 상대방이 느끼는 아픔, 고통을 똑같이 느끼게 하는 자세입니다.
그러한 자세에서 자신의 삶을 한 번 더 되돌아보게 하고, 회개로 이끄는 마음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늘 이런 측은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우리들에게도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변에도 우리에게 측은한 마음.. 짠한 마음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측은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단순히, 지금 나보다 어렵다는 이유로... 고통과 아픔을 당한다는 그 이유만으로는 생기지 않습니다.
힘들고 아프지만.. 희망이 하나도 없어 막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는 자세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이겨내려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측은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측은한 마음은 단순한 동정이 아닙니다.
동정과는 분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동정은 ‘참 안 됐구나. 도와주어야겠다.’는 정도의 생각으로 그치지만, 측은한 마음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상대방은...‘저 사람도 저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데, 나는 무엇인가?’ ‘내 삶이 이래도 되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합니다.
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여, 잃어버린 첫 마음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측은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다짐이 왜 지속되지 못하고 작심삼일 만에 그쳐버리는 것입니까?
왜, 회개가... 회개의 삶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지 못합니까?
바로, 쉽게 주어진 삶에... 환경에 안주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갖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버리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예수님께 받은 측은한 마음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측은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생활하는 것이요, 그 노력은 예수님께 함께 살아가는 노력입니다. 
 
며칠 전에 오랜 만에 어렸을 적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자신이 아는 사람...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듯이, 저 역시 함께 들과 바다에서 뛰놀았던 친구들이 잘되기는 바랍니다.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힘들게, 어렵게 살아가는 것 보다는, 평범하고 소박하게 알콩달콩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친구를 만나 술 한 잔 기울이다보니, 참 많이 답답했고 안쓰러웠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보증을 서준 것이 잘못되면서, 도망치듯이 모슬포를 떠나 제주시에 왔습니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되기에, 이제는 될 대로 대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다. 비록, 아버지 때문에, 집안이 이렇게 됐지만... 그 죄책감으로 술만 마시다가 쓰러져 이제는 교회에서 지내지만... 그 아버지께 따뜻한 아랫목, 밥 한 그릇 드릴 정도로 일어나리라. 부모가 된 지금에라도, 더 이상 천추의 한을 남기지 않으리라.’는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모습이 객기 일수도 있겠지만.. 월급에 50% 가까이가 빚을 갚는데 소요되어 버리지만.. 그런 모습이 참 대견스럽고 기뻤습니다.
‘이 모습이 진정, 그렇게 고삐 풀린 망나니 같던, 내 친구의 모습이란 말인가?’ 라는 생각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 친구는 내가 사제라고... 사제이기 때문에, 오랜 만에 찾아와 자신의 아픔과 허물을 꺼내놓고 있는데... 희망이 하나도 없지만,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하는데... 나는, 나의 삶은 왜 이런가?’ 라는 반성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치열하고, 간절해야 한다고 말을 잘 하면서도.. 실제 내 모습에는 간절함과 애절함이 없었습니다.
진정 주님의 사제로 살아가려는 노력이... 악습과 허물을 이겨내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친구에게 부끄러웠고, 하느님께 죄송스러웠습니다. 
 
복음에 나병환자의 간절함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치유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간절하게 바라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이는 우리의 고백입니다.
저의 안일하고, 나태한 모습을 되돌아보게 해준 친구와 복음에 나병환자에게 감사를 드리며, 저 역시 주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주님께선 하고자만 하시면, 저의 삶에 중심이 되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해 주소서. 그리하면 제가 살 것입니다.” 아멘

 

 

 

  

 惻隱之心

- 강영구 신부-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시자 그는 곳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마르1,40-42)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태22,39)고 가르치신 예수님, 당신은 나병환자의 불쌍하고 아픈 처지를 당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나병으로 몸이 문드러지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자기 탓으로 나병을 앓는 것이 아닌데도 부정한 인간으로 낙인 찍혀 추방당하여 외톨이가 된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입니다. 그는 성전을 출입할 수도, 가족이나 형제들을 만날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그는 하늘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가족과 이웃과 형제들과의 관계도 단절된 체 지옥에 빠져있었습니다.
당신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은 그를 어루만져 병을 낫게 해주었습니다. 당신은 그의 고통을 당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치유 받아서 죽음과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서 새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려는 당신의 惻隱之心이 그의 지옥을 천국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렇게 해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신 것은 “너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삼겠다.”하신 말씀입니다. 그 순간 나병환자는 새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님, 차돌처럼 딱딱하고 얼음처럼 차가워진 저희의 가슴을 당신의 가슴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만들어주십시오. 나와 상관이 없다면, 특별히 나의 이익과 무관하다면 어떤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저희들의 이기적이고 냉혹한 가슴을 惻隱之心으로 바꾸어주십시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보고도 외면하거나 무관심한 저희의 냉혹함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불행은 돈이 없거나 기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이웃의 불행을 외면하는데 불행의 근원이 있습니다.

당신이 허락하신 오늘 하루는 惻隱之心으로 이웃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一明)2004-01-15


 

 부정(不淨)과 부정(不正)

 -박상대신부-
 

  소록도나 산청 성심원이나 삼랑진 루가원 등 한센병 환자들이 고생하며 모여 사는 곳에 한번이라도 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들의 삶이 인간의 눈에 얼마나 저주받은 모습으로 보이는가를 말이다. 이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애원하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치유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한번도 들은 본 적이 없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신의 험악한 처지를 오히려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정말 부정(不淨)한 사람들인가?

 

  "선생님께서 원의(願意)만 있으시면, 저를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 앞에 무릎을 꿇은 나병환자의 애달픈 간청이다. 그러나 간청 속에는 확신에 찬 믿음이 흐르고 있다. 예수께서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원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그는 깨끗하게 되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나병환자의 치유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적은 나병환자의 부정(不淨)함을 정(淨)함으로 바꾸어 놓았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정한대로(레위 14,2-32) 치유 받은 자에게 곧장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공적으로 인정을 받은 후 예물을 드림으로써 ’깨끗하게 되었음’을 증명하라고 하셨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오늘 복음의 기적사화가 일어난 장소는 대략 갈릴래아 지방 가파르나움 근처였을 것이다.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예물을 드리려면 예루살렘까지 가야 한다. 약 100Km 떨어진 먼길이다. 그러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예수님의 엄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치유 받은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자기에게 일어난 기적을 선전하며 갔을 것은 뻔한 일이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어떤 모양으로든 깨끗하지 못함은 공동체나 하느님과 일치 될 수 없는 요소이다. 모든 부정함의 극치는 문둥병이다. 이는 인간적 삶과 종교적 공동체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모세를 비난한 대가로 문둥병을 얻었던 미리암을 보고 아론이 "저렇게 살이 뭉그러진 채 죽어 태어난 아이"(민수 12,12) 라고 했던 말을 기억해 보라. 문둥병에 걸린 자는 살아 있어도 곧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이다. 구약의 사제는 피부에 병이 있는 자를 진단하여 그것이 문둥병(악성 피부병)이면 그를 부정한 자로 선언하고 격리시켰다. 그들을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리우고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쳐야 했다.(레위 13-14장) 누구든 레위기의 이 대목을 읽어보면 머리나 몸의 어딘가가 따갑고 간질거릴 것이다. 혹시 나의 몸에 부정(不淨)함이 있어서 그렇다기보다 나의 마음에 부정(不正)함이 있어 그럴 것이다.

 

  그렇다. 오늘 복음을 몇 번이고 읽어 묵상하면 기적의 핵심이 육체적 악성피부병에 있다기보다는 내적인 ’깨끗하지 못함’과 ’깨끗하게 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적인 부정(不淨)은 곧 부정(不正)이다. 부정(不正)은 정직(正直)하지 못한 것으로서 죄(罪)를 말한다. 우리 중에 죄인이 아닌 자가 있는가? 없다. 따라서 우리 또한 부정(不淨)한 사람들이다.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이 취할 자세는 항상 겸손이다. 그러한 겸손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깨끗함을 간청하여야 할 것이다

 

   나병환자 한 사람이(마르1,40-45)

 -유 광수신부-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 나병환자를 만난다. 우리는 이 나병환자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묵상하자. 나병환자란 어떤 병자인가? 의학이 많이 발전하였지만 나병은 지금도 완전 히 치유되지 않는다. 나병이 더 이상의 진행되지 않도록 하기는 해도 완전치유는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나병에 걸리면 치유 불가능한 병이라는 낙인이 찍혀있다. 따라서 나병에 걸리면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다. 나병이란 우리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는 병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나병 환자임에 틀림없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히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하루 하루 자고 나면 자고 나는 만큼 그만큼 우리는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죽음이라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라는 면에서 볼 때 나병환자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 죽음의 병에서 치유 받을 수 있는가? 죽음이라는 거대한 강에서 구출될 수 있는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죽음의 행렬에서 어떻게 빠져 나올 수 있는가? 그것을 우리는 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인간의 힘으로는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 수 없다. 또한 그 누구도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고 죽음이 좋아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없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어떻게 하면 죽음의 거센 풍랑을 막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죽음의 행진에서 빠져 나와 생명의 대열로 들어설 수 있는가? 이 세상의 것으로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에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예외없이 다 죽음을 향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줄 수 있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해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믿음이어야 한다.

 

나의 믿음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가는 믿음이어야 한다. 그래서 하루 하루 나의 신앙생활은 점점 더 생명이 충만한 삶이어야 한다. 비록 육체는 죽음을 향해가고 있다 하더라도 나의 영혼은 늘 생명력으로 충만해져 있어야 한다. 믿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사람은 비록 나이를 먹어 육신은 늙어가고 힘이 없고 볼품없어도 영혼만은 늘 생기가 넘치고 새롭게 부활하고 생명이 충만해지고 더욱 사려 깊고 평화로운 생활을 할 것이다. 젊은이들보다도 더 진취적인 생각을 하고 늘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미래를 예언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유식하고 똑똑한 사람들보다도 더 지혜롭고 따뜻하며 사랑이 넘치리라. 그것이 믿음이다. 매일 똑같은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죽음의 강물을 거술러 생명의 강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믿음은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함께 죽어 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육체가 늙는다 고해서 덩달아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젊어지고 하느님의 기운이 차고 넘쳐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은 절대로 육신의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무기력해지거나 의욕이 사라지거나 절망과 외로움과 고통 속에 살지 않는다.

 

보라! 마더 데레사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모습에서 죽음의 그늘을 볼 수 있는가? 비록 몸은 병들고 나약해졌지만 그네들의 영혼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온 세상 사람들을 끌어 않고 있으며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모든 이들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오늘도 건재하고 계시며 평화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그것이 믿음이다. 즉 죽음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요 날로 더욱 더 생명력으로 충만하고 지혜로워지며 덕스럽고 개방적인 인간이 되며 언제나 모든 이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발산시키는 사람이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죽음의 병에서 구출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병환자처럼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애원해야 한다. 믿음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요, 상대방에게 목숨을 내맡기겠다는 것이요, 상대방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순명의 자세이다. 나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어본 적이 있는가? 무릎을 꿇고 애원해 본 적이 있는가? 무릎을 꿇은 사람만이 받는 은혜가 있다. 우리가 믿음의 은혜를 충만히 받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만큼 우리의 믿음이 진지하지 못하고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릎을 꿇고 애원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고집하기보다는 오늘 나병환자처럼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이 믿음이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그분께서 하고자 하시는 것을 하시도록 그분께 맡겨드리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강요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것만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고 맡겨드리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스승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맡겨 드릴만큼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님은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신 분이라는 믿음이 있는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는 말씀은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나병환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응답이다. 이 말씀은 나는 너보다 더 내가 너를 깨끗하게 해주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죽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는 분은 나보다 더 예수님이 원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자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말은 말씀의 능력을 말한다. 우리의 나병을 치유시켜 주는 것은 곧 말씀이시다. 우리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것은 곧  말씀이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생명력을 얻고 말씀을 통하여 기쁨을 찾고 말씀을 통하여 총명해지고 지혜로워지며 말씀을 통하여 모든 이에게 전해줄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늘 생기 넘치고 주님을 찬양하는 영혼의 삶을 산다. 그래서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죄이다. 믿음이란 죽음의 원인이 되는 죄를 용서받고 다시 깨끗해지는 것이다.

 

믿음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청하는 것이고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깨끗해져 다시 생명을 얻고 일어서는 것이다. 즉 말씀으로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고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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