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4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1567년 이탈리아의 사부이아에서 귀족 가문의 맏이로 태어났다. 1593년 사제가 되어 선교사로 활동한 그는 특히 칼뱅파의 많은 개신교 신자를 가톨릭으로 회두시켰다. 1599년 제네바의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1602년 교구장이 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기고 1622년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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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사울은 다윗을 죽이고자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하다가 홀로 동굴로 가게 된다. 다윗은 그때 사울을 죽일 기회를 잡았지만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인 사울을 놓아주며 그에게 자신의 진심을 호소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시어 열두 명을 선택하시어 사도로 삼으셨다. 당신께서 그들과 함께 지내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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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로 선택하신 열두 사람의 이름을 전해 줍니다. 유다 이스카리옷 말고는 모두가 훌륭한 사도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택하신 이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참으로 보잘것없고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깊이 사랑하시고 몸소 가르치시어 사도로 파견하신 것을 묵상하면서, 주님께서는 평범함과 부족함이야말로 더없이 비범한 당신의 일을 담을 그릇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언젠가 읽은 네덜란드의 화가 고흐에 관한 평전의 한 대목이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그가 살고 있는 작은 방, 다른 방과 별다른 점도 없는, 작고 단순한 데다 볼품없는 방이 캔버스에 아무렇게나 그려져 있다. 그런데 갑자기 작은 침대는 단순한 침대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고난이 몸을 뉘는 자리가 된다. 신들 또는 거인들이 주사위 놀이를 할 것 같은 탁자는 네 개의 버팀목이 있는 선사 시대의 화판이 된다. 거룩하게 비어 있는 의자는 주 예수님께서 오시어 앉으시기를 기다리는 자리가 된다.”
뛰어난 재능, 화려한 조건, 첫눈에 사로잡히는 매력 등을 사랑하는 이 시대에 살면서 사도를 선택하시는 주님의 그 마음을 닮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소박한 이들의 고난과 일상에서 주님의 자취를 발견하는 화가처럼, 주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눈은 세상의 기준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진정한 제자로서 첫발을 내딛게 될 것입니다.
참된 신심이란?
-양승국신부-
오늘은 교회 역사 안에, 특히 가톨릭교회 영성사 안에 큰 족적을 남기신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의 축일입니다. 그가 우리 신앙의 후예들에게 남긴 선물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며칠을 두고 이야기해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비오 9세 교황님께서는 이 성인에 대해서 집회서의 말씀을 빌려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총명함을 칭찬할 것이며, 그의 이름이 길이 남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그의 이름은 대대로 빛날 것이다. 만백성이 그의 지혜를 찬양할 것이며, 모임에서는 그에 대한 칭송이 자자할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업적 하나를 소개하면 개신교의 득세로 흔들리고 있던 가톨릭교회를 온몸으로 지탱한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강하게 몰아닥친 칼비니즘의 영향으로 온 지방이 개신교도들로 가득 찼던 샤블레 지방에 혈혈단신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생명을 무릅쓰고 가톨릭교회의 진리를 설파했으며 결국 그들 대부분을 다시금 가톨릭교회로 되돌아오게 했습니다.
그가 처음 샤블레 지방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맞이해준 것은 폐허가 된 가톨릭교회와 수도회들이었습니다. 개신교도들은 그를 조롱거리로 삼았으며 모욕을 주고 살해하려고 했지만 묵묵히 기도하면서 그 모든 고통을 참아냈습니다. 거듭되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꿋꿋했습니다. 수많은 저술과 설교로 한 사람 한 사람을 감동시켜 가톨릭교회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마침내 7만 2천명이나 되는 개신교도들을 하느님의 품으로 인도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얼마나 온유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는지는 다음의 일화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들이 제네바의 주교 시절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와 샹딸 수녀를 음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틈만 나면 있지도 않은 추문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퍼트렸습니다. 그러나 주교는 그 어떤 법적 대처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기도만 하셨습니다. 엄청난 모욕 앞에서도 분노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동정심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장본인인 벨레라는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주교는 그에게 다가가서 손을 맞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호사님은 저를 음해해서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신다지요? 제가 그 일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으니 제게 변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변호사님이 제 눈 하나를 멍들게 한다든지 뽑아버린다 할지라도 저는 나머지 한쪽 눈을 가지고 여전히 선생을 기쁘게 바라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우리 교회 영성사 안에 남긴 영향도 정말 대단한데, 그의 노선은 400년도 더 지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로 연결됩니다. 그분의 영성과 삶, 신앙은 참으로 선구자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박사이기도 한 그는 총 27권에 달하는 명저를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책이 ‘신심생활입문’ ‘신애론’입니다.
하느님은 두려운 분이 아니라 인자하신 아버지 같은 분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서 당시 백성들에게 온유하고 겸손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당시만 해도 ‘성덕의 길’은 사제나 수도자들의 전유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덕의 길이 활짝 열려있음을 확인시켜주셨습니다.
군인은 군인의 신분을 다함으로서, 가정주부는 자질구레한 가사 일에 충실함을 통해서, 공장 직공들은 열심히 제품을 생산함을 통해서 누구나 성덕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루하루 감사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곧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아름다운 봉헌이요 기도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하느님의 거처를 마련함으로써 세상 안에 살아가면서도 세상의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으며, 세상일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음을 일깨워주셨습니다.
“필로테아여, 생각해보십시오. 주교가 봉쇄수도원 수도자처럼 혼자 있기를 원해서야 되겠습니까? 결혼한 사람이 카푸친회 수도자처럼 돈을 무시해서야 되겠습니까? 기술자가 하루 종일 성당에 앉아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 신심은 정말 어색하고 우스꽝스런 것입니다. 참된 신심은 각자에게 부여된 신원과 소명에 충실한 것입니다.”
“진주조개는 바다 속에 살면서도 바닷물을 한 방울도 먹지 않습니다. 어떤 섬 근처에는 바다 한 가운데임에도 아주 신선한 맑은 샘이 솟아오릅니다. 피로스토 곤충들은 타는 불속으로 날아들어도 날개가 불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매사에 충실하고 용맹한 사람들은 세상 안에 살아가면서도 조금도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사도를 뽑으심
-전삼용신부-
한 번은 가톨릭 잡지에 글을 기고하였는데 나중에 출판되어 온 제 글을 읽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출판 되어버린 것을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떻게 유다인 한 명도 회개시키지 못하셨겠습니까? 문제는 편집자가 제가 하려는 말의 의도를 잘 모르는 사람이란 것에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유다인 한 명도 회개 못 시키신 분으로 만든 사람이 되었습니다.
원고를 받은 사람은 원고를 보낸 사람을 잘 알고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섞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저를 온전히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를 알았으면 제가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알고 그대로 옮기거나 적어도 - 물론 이 일이 있은 후로는 항상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질문을 했지만 - 출판 전에 물어보기라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열둘을 뽑고 그들을 ‘사도’라 부르셨습니다. 사도란 ‘아포스톨로스’, 즉 ‘파견 받은 자’란 뜻입니다. 천사, 즉 ‘메신저’와 같은 의미로 보아도 됩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한 사람의 말을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도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로부터 파견된 사도임을 먼저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보고 들은 대로만 전할 뿐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참조: 요한 3, 11; 8, 26). 사도는 파견하는 사람이 맡기는 것을 그대로 전해야합니다. 그러나 그 전해 받는 것의 의미를 모르거나 자신의 생각이 가입되어 받은 것과 다르게 전달하게 된다면 파견한 자에게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아드님 외에는 아버지를 온전하게 아는 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드님을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마태 11, 27)
아버지께서 인간에게 전하라고 아드님께 맡기신 ‘모든 것’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파견하실 때 주셨던 ‘성령님’입니다 (참조: 요한 3, 34-36).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받으실 때에야 비로소 아버지께로부터 공식적으로 파견되신 것이고 그 때부터 공식적으로 아버지를 증거하는 삶이 시작됩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밤새 기도하시고 당신의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당신을 파견하신 것처럼 그들을 파견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요한 17, 18)
그런데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파견하시면서 당신의 모든 것인 성령님을 주셨던 것처럼 당신께서도 사도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인 ‘성령’을 부어주시며 ‘하느님나라의 열쇠’인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 23)
그런데 왜 한 명을 뽑지 않고 여러 명을 뽑으셨을까요? 왜냐하면 사람은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 수 있도록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늘나라 열쇠를 주셨지만, 곧 그를 ‘사탄’이라 부르고 이후에도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자살까지 하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에 혼자 그리스도를 온전히 이해하고 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토마 사도 혼자 있을 때는 그리스도를 뵙지 못했지만 사도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리스도를 뵙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사도들이 함께 할 때만이 당신의 온전한 대리자가 될 수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한 명의 사도 위에 교회를 세우셨을까요? 그 이유는 사도들 중에서 그 수장을 뽑아놓지 않으면 서로 자신들이 높다고 주장하다가 교회가 갈라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개신교를 한 번 봅시다. 물론 가톨릭교회가 잘못을 한다고 해서 갈라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하나 된 모습을 보입니까? 아닙니다. 그들도 수백 개의 종파로 나뉘어 서로 다른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리가 똑같으면 종파가 나눠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많은 다른 교리들을 가르치셨을 리가 만무합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2베드로 1, 20)
성경이 임의로 해석되어지면 갈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임의로 해석되어 여러 종파로 갈라진다는 것은 하나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여러 의미로 해석한다는 뜻이고 그 자체로 전해야 하는 그 분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복음만 해도 50개 이상이 떠돌고 있었고, 서간 수는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복음을 4개로만 정한 것도 교회고 서간들과 요한묵시록까지 선별하여 정경을 정한 것도 교회입니다. 즉 교회의 권위로 성경을 정한 것이고, 이것 자체가 교회가 한 목소리로 진정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구별해 낼 수 있는 지식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감도가 교회에 있기 때문에 많은 글들 가운데서 정경을 가려낸 것처럼 교회의 가르침은 오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당신의 모든 것, 즉 성령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많은 사도들이 있지만, 그래서, 베드로와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하나라면 교회도 하나여야 합니다. 교회가 갈라지는 것은 그리스도 가르침의 해석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여럿일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은 여러 사도들 중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움으로써 하나인 교회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불완전한 인간을 당신의 대리자로 파견하시기 위해서 처음부터 완전을 뜻하는 열두 명의 대리자를 뽑으시어 서로 보완하게 하심과 동시에, 한 명의 수장을 둠으로써 그 가르침이 갈라지지 않게 하셨고, 지금까지 한 단일 교회로 이천 년 동안 항상 가장 크게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뽑힌 사도들은 모두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당신 증거자로 파견하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받을 벌보다 소돔과 고모라의 벌이 견디기 더 쉬울 것이라 하십니다.
사도직
- 김수환 신부-
어렸을 적, ‘암행어사 박문수’라는 방송극을 재미있게 보던 기억이 납니다.
암행어사는 왕의 직속으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관리들의 감찰업무를
담당하며 부패한 관리들을 벌하였습니다. 암행어사가 부패한 관리에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때면 꺼내어 보여 주던 물건이 하나 있는데, 바로 마패입니다.
그래서 암행어사의 마패를 본 탐관오리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곤 했습니다.
바로 왕의 권위가 자신들 앞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왕으로부터 파견된
암행어사들은 마패를 지님으로써 왕의 권위와 함께하면서 동시에 그 권위를
행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사도라 명하셨습니다. 복음의 ‘사도’라는 그리스 말은 ‘파견된 사람’
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런데 사도는 단순히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 아닙니다. 마패를 지닌 암행어사들이 왕의 권위를 함께 지니며 각처로 파견되었듯, 사도의
직분을 지닌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위와 함께하며 파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도들은 성자 그리스도 예수의 권위를 지니고 복음을 선포하며
마귀를 쫓아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도 그들과
특별한 방법으로 함께 지내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성직자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평신도들과 함께 지내시며
함께 걷고 계십니다.
와서 보거라
-한상갑-
예수님은 산으로 가시어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시고 날이 새자 열두 사도를 뽑으시어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누구신지 더 잘 알게 한 후에야 세상에 내보내십니다.
요즈음 어머니들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고 마다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들도 먼 거리를 힘들다 하지 않고 새끼들의 먹이를 구해 오는 기러기로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그것만으로는 자식 기르기에 모자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뽑으신 제자들과 ‘함께’ 지내십니다. 요한의 제자한테는 ‘와서 보라.’고 말씀하시며 하룻밤을 ‘함께’ 묵으십니다. 이처럼 당신을 다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자식들과 함께 삽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과는 무언가 크게 다른 게 있는 듯합니다.
아주 오래전 어느 주일 아침이었습니다. 모처럼 쉰다는 기쁨으로 늦잠을 즐기고 있는데 막내가 함께 놀아 달라고 떼를 씁니다. 아빠의 권위(?)로 한마디 했죠. “이부자리 잘 개키고 청소 좀 해라.” 하고. 그러자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막내가 “아빠는?” 하며 곧바로 대꾸합니다. 잠은 달아나고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자식이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35항 참조) 그리고 옆에 사는 이들한테도 뭔가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늘도 숫하게 발생하는 성사
-김찬선신부-
“예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모든 행위의 주어가 다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을 가까이 부르시고,
주님께서 열둘을 사도로 세우시고,
주님께서 그들을 함께 지내고 하시고,
주님께서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케 하십니다.
그저께 저는 몇몇 분들과 나들이를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
저는 운전을 하고 그분들은 심심풀이를 이것저것 하셨는데,
퀴즈 게임도 하였습니다.
그제 서품식 때 주례자가 강론한 것을 재치 있게 활용하여
유언에서 프란치스코가 “주께서 ---하셨다.”는 얘기를
몇 번 했는지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유언은 크게 두 부분, 과거를 회상하는 전반부와
앞으로 이렇게 살라고 당부하는 후반부로 나뉩니다.
그런데 과거를 회상하며 프란치스코는 일곱 번에 걸쳐
주님께서 몸소 자기에게 무엇, 무엇을 해주셨다고 합니다.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은 다 주님께서 해주신 거라는 거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해주신 것이 비단 일곱 가지 뿐이겠습니까?
그의 모든 것, 다 주님께서 해주신 것이지만
아마 우리의 성사가 일곱 가지이듯 일곱 가지를 꼽은 것이겠지요.
그런데 성사가 왜 일곱 가지뿐입니까?
하느님께서 그 일에 함께 계시면 다 성사이고
하느님께서 그 일을 통하여 발생하면 다 성사이지요.
결혼만 하느님께서 축복하시고 다른 것은 축복치 않으시는가요?
성체 성사에만 주님이 계시고 우리의 일상 식사에는 아니 계시나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은 다 하느님께서 해주신 것이고,
그렇게 믿으면 다 성삽니다.
바야흐로 인사이동의 때가 다가오는데
나의 이동이 관구장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때
나는 관구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파견을 받은 것이고
나의 이동은 인사人事가 아니고 성사聖事입니다.
그러므로 성사는 늘 하느님 현존체험인 겁니다.
현존現存이란 현재 존재한다는 말의 준말이지요.
지나고 난 뒤 그것이 하느님의 파견이었음을 깨달으면
파견된 그 순간은 성사가 아니라 인사였을 거고,
나는 그 인사이동에 불만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성인과 보통 사람의 차이는 아마 이것일 겁니다.
보통 사람은 지나고 난 뒤에야 그것이 하느님 뜻이었음을 깨닫는,
즉 회고적 하느님 체험을 한다면
성인은 모든 일이 다 하느님 뜻임을 현재적으로 받아들이는,
즉 현재적 하느님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의 모든 일에 함께 계시며
나의 모든 일을 축복하시고 이끌어주십니다.
믿고 맡기면 숫하게 성사가 발생하는 오늘이 될 겁니다.
주님 뜻에 좀 더 가까이
- 강인봉-
어렸을 때부터 성당이라는 분위기에 익숙해져 왔고 천주교 신자라는 나름대로의 자부심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신앙생활에서 몇 번인가의 위기도 있었고 쉬는 기간도 꽤 있었습니다. "에이, 성당 안 나가."라고 푸념을 하면서도 결국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근본적인 신앙 문제라기보다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 실망하거나 상처 받는 일이 원인이었습니다. 물론 신앙인들이 모인 공동체이긴 하지만 모두 생각이 같을 수 없다 보니 갈등은 늘 존재하기 마련인데 그 핑계를 엉뚱한 곳에서 찾곤 합니다. "저 인간 꼴 보기 싫어서", "신부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수녀님이 너무 답답해서" 주님을 외면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저희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나 학식을 가진 사람이 아닌 너무나 평범하고 오류도 많은, 바로 우리 같은 사람을 제자로 삼으시고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큰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주님께서 가장 가까이하고자 하셨던 '어린양'의 모습이 아닐까요? 나중에 당신을 배반할 제자까지도 받아들이시는 모습에서,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할 제자를 반석으로 삼으시는 모습에서 어떤 마음으로 신앙생활?·?사회생활을 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실수는 합니다. 생각도 다를 수 있고 어떤 일을 함께하는 과정에서 다툼은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서로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다르다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님을 인정한다면 주님 뜻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