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5일 토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2014. 1. 26. 오전 10:4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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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5일 토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바오로 사도는 소아시아 킬리키아 지방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격히 지키도록 교육받은 철저한 유다인으로, 그리스도교를 모질게 박해하였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극적으로 회심한 뒤 그리스도의 바오로 사도로 변신하였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심이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던 것이다. 바오로는 소아시아 킬리키아 지방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교육을 받은 철저한 유다인이었고, 바리사이였다. 처음에는 그리스도교 박해자였으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극적인 회심을 한 뒤 사도가 되었다. 그는 열정적인 신앙으로 이방인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마르코 16,15-18)

 

 

"Go out to the whole world and

 

proclaim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The one who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the one who refuses to believe will be condemned.

Signs like these will accompany

those who have believed: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백성에게 연설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자신의 신원을 밝히며 어떻게 주님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전해 준다. 그는 열성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유다인으로서 한때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다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눈부신 빛을 보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결국 그는 회심하고 주님의 사도로서 파견을 받게 된 것이다(제1독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신다. 그리고 그들을 온 세상에 파견하시며 복음을 선포하고 세례를 주라고 명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의 복음을 들으며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바오로 사도가 체험한 회심의 사건을 머릿속에 그려 봅니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세계사적 사건이었다고 평가하는 바오로 사도의 이 체험은 바오로의 인생을 변화시킨 것만이 아니라 초대 교회 전체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기여한 놀라운 업적을 보면 절로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체험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회심에 영감을 주었는지를 우리는 교회사 안에서 거듭 확인합니다. 유례를 찾기 어려운 근본적인 회심의 체험과 여기에 철저하게 뿌리박은 그의 신학은 놀랍게도 현대의 가장 급진적인 철학자들까지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사적, 교회사적, 사상사적 흐름 속에 높이 서 있는 거대한 인물로서 존경받는 바오로 사도이지만, 사도행전과 그의 서간에서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들 덕분에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의 인생 여정의 동반자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마스쿠스 회심의 사건을 통해 우리 신앙의 여정에 반드시 필요한 회심의 본질이 무엇인지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 자신이 예수님을 박해한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자각하는 동시에 자신의 힘으로는 그 비참함과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력함을 온전히 체험한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 하나니아스의 위로에 온전하게 치유되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22,16) 우리 모두가 자신의 무력함과 부족함을 깊이 느끼는 가운데 주님의 위로에서 진정한 힘을 얻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은총을 오늘 바오로 사도와 함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세례

 

-노희연 수녀-

 

 

산다는 것은 날마다 사랑의 세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말씀으로 오시는 주님 사랑의 물에 잠긴다.
어제 만난 어떤 분이 수녀인 나를 보더니 묻지도 않았는데 이실직고한다. “저, 견진성사까지 받았는데 지금은 냉담하고 있습니다.” 세례성사, 견진성사를 받고 날마다 성체를 모시는 신앙생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날마다 사랑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사랑의 냉담자 아닌가.

오늘은 내 남은 날의 첫날이다.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첫날이다. 내 허물보다 주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다시 일깨워 주는 사랑의 세례로 다시 태어나는 첫날이다. 어제 본 당신이 오늘은 다르게 보이고, 어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던 그 행동을 오늘은 관점 바꿔 생각해 보고, 용서할 수 없었던 나 자신을 용서하는 날. 그래서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격려하고, 더 많이 사랑하는 날이다. 사랑의 세례를 받는, 날마다 새로 시작하는 첫날이다.

헐벗고 굶주리는 형제를 찾아가는 날이 사랑으로 다시 나는 날이다. 우리는 날마다 말씀 안에서 사랑으로 태어나 사랑으로 무장하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다. 오늘 나의 소임지에, 가정에서 폭력 때문에 도망 나와 입고 있던 여름옷만 있고 겨울옷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 황 마리아 자매가 자신이 입던 옷을 가지고 온단다. 나눔을 실천하는 자매님한테서 사랑의 세례를 주시는 예수님을 본다. 감사하다.

 

제가 알고 있는 젊은 연인들 중에서 남자보다 여자가 더 나이가 많은 커플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자가 더 연상인 경우가 많지만, 이 경우는 거꾸로 여자가 연상인 것입니다. 이 둘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도 너무나도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이 둘이 왜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를 어떤 설문조사를 보면서 공감하게 되더군요.

나이 많은 여성을 기피하는 미혼 남성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왜 나이 많은 여성을 기피하느냐는 질문이었지요. 그 결과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연상의 여인들은 대체로 어떤 선물을 해도, 어디를 데려가도, 무슨 음식을 먹어도 별로 놀라워하지도 않고 기뻐하지 않아서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연하의 여성들은 무엇을 해주어도 처음인 듯이 놀라워하고 즐거워하기에 좋다는 것입니다.

물론 편향된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놀라워하고 즐거워하는 등 감동을 받아야 상대방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를 앞서 말했던 그 연인을 통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감동을 받습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도 놀라워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다보니 나이에 상관없이 항상 새로움을 가지고 서로를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감동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다보니 앞서 나이 많은 여성을 기피하는 미혼 남성들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을 기피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주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잘 보면 감동을 받을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내가 살아 숨 쉬는 것부터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잠드는 것까지 그 어떤 것도 감동 받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것들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하기에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한때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바오로.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회심하여, 이제 박해하는 바오로가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도 바오로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가 이렇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 체험에 깊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 체험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병이 생겨서 앞이 보이지 않고, 어떤 환청이 들리는 것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 체험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 말씀을 따랐기 때문에 박해하는 자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거룩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감동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내 주변만 바라봐도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말할 만큼 커다란 감동 투성입니다. 그 감동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동을 주신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그냥 아무 감응 없이 이 세상의 방관자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벗어나, 주님을 증거하는 거룩한 사도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칙칙해지지 말자. 미소를 지어 보라. 크게 소리 내어 웃어라. 이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별 수 있나? 여기,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다(노라 에프론).

 

 

-김찬선신부-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축일, 바오로 사도의 축일에 

바오로 사도에 대해 아무런 칭송을 마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에 바오로 사도가 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무슨 심한 말입니까? 

회심을 한 것은 바오로 사도이지 하느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회심을 한 것 아니고,  

하느님이 회심을 하신 것 더더욱 아닙니다. 

회심을 하였다면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한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자신의 회개에 바오로 자신이 한 것은 없습니다. 

그 뜻은 바오로 사도가 애초에 회개할 마음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는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았고, 

오히려 조상들이 믿어온 하느님을 잘 믿고 있고, 

조상들이 지켜온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셨으면  

바오로 사도도 프란치스코처럼 회심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회심을 하였다고 해서 바오로 사도를 칭송할 필요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칭송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 찬송해야 합니다. 

 

그러면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은 왜 지내는 겁니까? 

이미 하느님을 열심히 믿었는데 무슨 회심을 하였다는 겁니까?

바오로 사도는 땅에서 하늘로 마음이 향하는 회심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회심은 반대로 하늘에서 땅으로 향하는 회심을 한 것입니다. 

그는 하늘의 하느님을 열심히 믿었지만 

그 하늘의 하느님이 이 땅에 오셨음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스테파노가 영의 눈으로 하늘이 열렸음을 보고 

거기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인다고 했을 때 

바오로 사도는 그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였습니다. 

영의 눈이 멀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잘하는 거라고 믿은 겁니다. 

그러다가 이런 그의 눈을 하느님께서 뜨게 하시어  

이제 땅으로 오신 하느님을 보게 되고 믿게 된 것입니다. 

이 회심 축일을 지내며 우리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믿기는 하는데 

그 하느님이 아직도 여전히 하늘에만 계시고 

내 삶 안에 들어와 계심을 못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습니다. 

지금 나의 삶 가운데 하느님께서 계심을 못 보고 

지금 나에게 퍼부으시는 하느님 사랑을 못 느낀다면 

우리는 회심전의 바오로 사도처럼  

하느님의 육화를 믿지 못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와 계신 하느님을 눈으로 보고 

그분의 부드러운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는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양승국신부-

 

<심오한 삶의 이동>

 

오늘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맞아 회심이란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회심이란 움직임, 즉 이동을 수반합니다. 다시 말해서 회심이란 몸과 마음의 총체적인 이동, 결국 심오한 삶의 이동이 아닐까요?

 

미성숙에서 성숙에로의 이동, 미완성에서 완성에로의 이동,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삶에서 기적과도 같은 이타적인 삶에로의 이동, 억압과 죄의 사슬에서 해방에로의 이동,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나라에로의 이동, 분열에서 통합과 일치에로의 이동, 어둠에서 광명에로의 이동, 무지에서 깨달음에로의 이동...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은 아마도 좀 더 크고 진실한 회심에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저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부끄럽게도 깊은 어둠의 그늘 아래 앉아있습니다. 일어설 줄을 모릅니다. 그 어둠을 즐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회심이란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회심이란 어제의 결핍과 부끄러움을 디딤돌 삶아 한 단계 더 도약하고 성장하기 위해 발돋움하는 몸짓입니다. 육에로만 집중된 우리의 시선을 보다 근원적인 것, 보다 영속적인 대상, 더 이상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대상에로 옮겨가려는 시도가 회심입니다. 약점과 상처투성이인 인간세상을 발판 삼아 하느님 나라를 향해 길 떠나는 여행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 역사 안에서 가장 극적인 회심자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 그의 생애를 묵상해보면 정말 흥미진진한 극적인 삶, 드라마틱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오로는 원래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습니다. 직접 예수님을 대면한 적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 섬멸의 선봉장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달려가서 철저하게 색출해내고야 마는 유다인 중의 유다인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으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낙마(落馬)한 바오로를 향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책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이렇게 예수님을 박해하던 그였는데, 그 역시 3일간의 깊은 바닥 체험 끝에 그의 내면에서는 심오한 삶의 이동, 결정적인 회심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박해자에서 바오로 사도로 새로이 태어났습니다.

 

악질 중의 악질 고발자였던 사울이었는데 이제 베드로 사도 못지않은 사도가 되어 우리 교회를 든든히 뒷받침하고 계십니다. 그토록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못살게 굴며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그는 이렇게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이 모든 것들을 다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태생적 한계, 근원적 결핍으로 인해 수시로 죄와 악습, 하느님으로부터의 멀어짐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우리이기에 수시로 되풀이해야 할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준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회심입니다. 한번 두 번, 열 번의 회심이 아니라 천번 만번의 회심, 매일 매순간 우리 삶의 심오한 이동이 필요합니다.

 

 

동이 튼다    

- 이승주 신부-

 

바닥을 친다는 말이 있지요. 하루 중 가장 캄캄한 순간은 해가 뜨기 직전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최악과 최선은 맞닿아 있다는 말이나 극우와 극좌는
일맥상통한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해의 끝은 새로운 한 해의 시작과 연결되고 롤러코스터가 하강하기 직전의
순간은 속도가 가장 느린 순간입니다.
바오로의 회심은 박해의 열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일어납니다. 주변 사람들은 빛은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합니다. 그 열성이 바오로만큼은 되지 못하여
감지는 했으나 그 속내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회심이란 이렇듯 힘은 있으나 방향이 다를 때 하느님께서 방향을 돌려 놓아
주시는 순간입니다. 힘이 클수록 회심의 역동성도 더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열정이 회심의 가장 핵심적인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역설이 바오로 사도로부터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쇄신시키고 성장시켜 온 은총이 된 것입니다.
그 힘은 스스로에 대한 진솔함과 삶에 대한 진중한 태도입니다.
그것만 있다면 방향은 성령께서 잡아 주십니다.
내 안에는 어떤 힘이, 어떤 열정이 있습니까?

 

 

 

류해욱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라고 당부하시는 대목입니다.

장면은 식탁입니다. 열한 제자들이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식탁은 함께 나누는 자리입니다. 그들이 식탁에 있을 때 나타나신 상징적 의미도 헤아리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고, 시골길을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고, 그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지만 제자들이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셨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여러분 마음 안에 어떤 느낌이 드는지 살펴보십시오. 부활은 세상의 모든 상식을 뛰어넘는 완전히 새로운 열림으로 건너감, 바로 파스카입니다. 그분을 직접 만나는 체험 없이 그 건너감, 파스카 신비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제자들의 불신에 대한 예수님의 꾸짖음은 질책이라기보다 부활 신앙에 대한 단호함의 표현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제자로서 사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짖음에 머무르지 않고 이제 그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이 말씀에 오래 머물러 보십시오. 이 말씀은 단순히 열한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들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이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마음에 새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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