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연중 제3주일

2014. 1. 26. 오전 10:46:27

글자

2014년 1월 26일 연중 제3주일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
마태오 4,12-23)


Jesus began to preach and say,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태어날 임금을 예언하며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이 영화로울 것이라고 한다. 이제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이며 암흑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칠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당파로 분열하는 행태를 그만두라고 강하게 권고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명인 복음 선포는 말재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밝힌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대로 갈릴래아로 가시어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의 호숫가 카파르나움에 자리 잡으신다. 그리고 회개를 촉구하시며 하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시어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시는 장면을 전해 줍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알려 줍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그 예언을 들었습니다. 이 차가운 계절에 이사야서의 이 대목을 묵상해 봅니다.
무거운 침묵과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겨울밤입니다. 한 줄 한 줄 눈으로 이 구절들을 따라갑니다. 이윽고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9,1)라는 말씀에 멈추어 섭니다. 왠지 울컥하다 싶더니 조금씩 반향이 울리기 시작합니다. 서서히 마음속 깊이 어디선가 빛이 돋아나는 것 같습니다. 밖은 어둡지만 이미 새벽이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사야서에서 나오는 ‘빛’과 ‘어둠’은 인간 존재를 표현하고 움직이는 근본적인 표상입니다. 이런 근본적인 표상은 단순히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게 하는 도구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체로서 삶의 의미와 방향을 얻고 새롭게 해 주기도 합니다.
한 철학자가 빛과 어둠의 표상에 대해 묵상한 내용이, 이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감동을 이해하는 데 좋을 것 같습니다. “세계 안에서 서로 겨루고 있는 대립적인 것들이 불가항력적으로 자기 자신 너머를 가리킨다. 세계가 가진 색깔과 빛들의 수많은 변화 형태들로부터 우리 안에는 ‘빛’이라는 표상이 생겨난다. 이 표상 안에서 우리는 비춤, 덮임, 밝힘, 타오름 등을 알아차린다. 이 표상 안에서 우리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게 된다. ‘어둠’의 표상에서 우리는 신비가 있고, 방황이 있고,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현존하시는 하느님』에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예언의 성취는 우리가 우리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빛을 간절히 기다릴 때, ‘지금 여기에서’ 구원의 체험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곧바로’

-이수호신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아침에 미사를 마치고, 성당 마당에서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너무 추워 얼른 사제관으로 들어가 따뜻한 차 한잔 마시며, 신문을 볼까 하던 참이었습니다.

수녀님께서 “신부님, 꽤 춥지요? 차 한잔 대접해 드려도 될까요?” 하시며 초대하셨습니다.

 “다음에 시간 내겠습니다.” 제가 곧 뱉은 대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제관에서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릅니다. ‘내일모레가 인사이동인데,
지금이라도 갈까? 한 번도 초대해 주신 적이 없는데, 호의를 너무 쉽게 넘겨버렸나?’ 하며 우물
쭈물하다가, 결국 응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곧바로 거절하니, 다시 돌이키기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한편,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형제는 ‘곧바
로’ 응답합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세를 이야기하기 위해 잇대어 노력하는
느낌입니다.

  
오늘은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는 것은 그리스도인
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세계 인구 100명 중 10명이 과도한 비만으로 힘들어하면서, 13명은 극심
한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는 식량 부족이나 가뭄과 홍수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발
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 식량 위기의 가장원초적인 문제는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식
량을 공정하게 나누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분배의 문제, 곧 정의의 문제인 것입니다. 전쟁 후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 세계 교회는
우리에게 도움을 자청하였습니다. 이제는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된 지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비단 오늘만이 아니겠지만, 특히 오늘은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가진 것을 나
누는 선행으로 의무를 다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좋은 뜻을 가지고도 망설이다가 놓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중에서도 특별히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는 좋은 뜻 말입니다. 도움의 손길을 감사하며 물리치지 않는 것
도, 도움의 손길에 기쁨으로 주저하지 않는 것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지금 여기서 응답하십시오.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네 명의 어부를 제자로 삼으신 이야기였습니다. 마태오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는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 신앙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권위 있게 생각하는 문서는 구약성서입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행하신 중요한 일마다 구약성서를 인용하면서 그것은 하느님이 이미 계획하신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이 가릴래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하느님이 이미 계획하신 일이었다고 말하기 위해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였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예수께서 갈릴래아로 가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1,14)고 간단히 언급하는 일을 마태오복음서는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이사야서(8,23)를 길게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신 것은 이사야 예언서가 이미 예언한 바였다고 설명합니다. ‘즈블론과 납탙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라는 긴 지명(地名)이 그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하신 일도 같은 이사야서(9,1)를 인용하여 설명합니다. ‘어둠 속에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메시아가 장차 올 것을 예언하는 이사야서의 구절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이 하신 일은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에게 빛을 주는 메시아의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어둠 속에 주어진 빛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복음서들에서도 확인됩니다. 요한복음서(1,4)는 그 서론에서 말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초기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은 어둠을 밝히는 빛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이라는 어둠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신 사실을 알리면서 모세가 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그 사실을 의식하고 사는 백성에게 필요한 그 시대의 지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율법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율법을 인간의 우열(優劣)을 가리는 도구 내지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사람은 구실만 있으면, 다른 사람을 비하합니다. 차별하고 버리고 죽이는 인간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구실로 그런 어둠의 역사를 꾸며 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 제사의례도 사람들을 어둠 속을 헤매게 하였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리는 건물이었습니다. 인간이 자기 노동의 대가로 얻은 것을 성전에 가져와 제물로 바치는 것은, 하느님의 시선이 그 제물 위에 내려오게 하여, 자기가 얻은 것을 하느님의 빛으로 새롭게 보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자기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둠을 버리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빛으로 자기가 가진 것을 새롭게 보게 하는 의례였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사제들은 여러 가지 명목으로 제물 봉헌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면서 자기들이 풍요롭게 사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성전의 제물 봉헌을 폐기하자고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제사가 그 본연의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빛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사람들을 살게 하는 율법과 제물 봉헌이 되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믿으셨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죄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자비의 빛을 받아 사람이 그 자비를 실천하며 살게 하는 지침이었습니다. 제물 봉헌은 인간이 노동하여 얻은 것을 하느님의 자비의 빛으로 조명하여 그것을 새롭게 보고, 이웃과 나누도록 초대하는 의례(儀禮)였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은 어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기의 가족 외, 모든 사람을 외면하면서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자기 주변을 봅니다. 부모를 정성껏 모시는 효자는 부모로부터 빛을 받아 형제자매들을 보고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 신앙인은 하느님이 자비로우시기에 자기도 그 자비를 실천합니다.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자기도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첫 제자들을 뽑은 다음,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복음, 곧 기쁜 소식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어떤 이유에서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비난하고, 성토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둠속을 헤매는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행세하겠다는 것은 어둠의 지배를 받는 일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말은 사람들에게 기쁨이고 행복이라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부르시자 ‘곧 바로 그물을 버리고’ 혹은 ‘곧 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제자는 주저하지도 않고, 망설이지도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맹목적으로 혹은 광신적으로 믿고 순종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물과 배와 부모를 버리고 떠나는 일은 한 순간의 경솔한 결단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심사숙고하여 결정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이 부르시자 제자들은 ‘곧 버리고 떠났다’고 말하는 것은 배와 그물과 아버지를 중심으로 살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 안에 하느님의 빛을 보고, 주저도, 망설임도 없이 그분을 따라 나서서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복음서들이 예수님을 빛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만 소중히 생각하며 살던 우리 역사의 어둠 안에 자비롭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예수님이 빛과 같이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실천하여, 우리도 그분의 제자 되어 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업이 무엇이든, 우리의 관심사가 무엇이든,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각하고 그분의 자비를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한 사람이 잘 살기 위해 의지하였던 이기심의 배와 욕심의 그물을 버리고, 출신과 가문을 의미하는 아버지도 떠나서, 예수님 안에서 깨달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사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자기만 보는 어둠을 버리고, 예수님의 빛을 받아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 되어, 참으로 자유롭게 살라는 복음의 초대입니다. ◆

 

 

  하느님 나라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은 후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복음 전도를 위해서 예수님은 동역자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몇 명의 제자를 부르신 후,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고 기적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복음을 위해 온몸을 던진 예수님의 진솔한 삶을 요약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복음서 작가들 중에서도 유독 '하늘나라' 라는 표현을 좋아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유다교의 전통에 따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출애 20,7)는 십계명을 생각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그에 따라 유다인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야훼)에 모음을 붙여놓지 않았는데 자음만 가지고는 발음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늘, 땅, 바다의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출애 20,3)라는 계명도 있는데, 그 계명에 따라 하느님을 생각나게 하는 인간의 조각상이나 인물화마저 제조를 막았습니다. 모두 하느님의 이름과 모습을 함부로 부르거나 만들 수 없도록 원천 봉쇄한 조치입니다.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은 '하느님 나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말씀 하나,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 '하느님 나라'를 향한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으로 힘차게 파고 들어오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하느님의 나라는 오지 않았는데, 하느님의 궁극적인 통치는 역사의 종말에나 가야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느님 나라의 시간성을 두고 흐르는 긴장을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합니다.

제2독서인 1고린 1,10-13.17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세례를 베풀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러 보냈다고 말합니다. 고린토에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를 빌미삼아 파가 갈라진 사태를 보고 자신의 입장을 강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라는 용어는 공유하지만 내용은 차이가 나는데, 예수님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복음의 내용이었고, 바오로에게는 '예수님' 자체가 복음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당연히 후자의 것입니다. 이사야는 원수를 쳐부수는 하느님의 능력을 언제나 감동 넘치는 언어로 표현합니다(이사 8,23-9,3). 특히 하느님께서 이방인에게도 빛이 되신다는 언급은 복음(하느님 나라)이 가지는 보편적인 성격의 근거가 되는 구절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전한 '하느님 나라'는 언제나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 줍니다. 지하철 전도사들이 부르짖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에 등장하는 천당(天堂)이 바로 '하느님 나라'와 같은 개념이고, 노숙자에게 전해지는 따뜻한 죽 한 그릇으로도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길 수 있다는 강론도 들을 수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 나라'란 무엇일까?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두고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기신 것일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두고두고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복음이 어떤 난관에도 사라지지 않고 2천년 동안 먼길을 건너와 낯선 땅 한국에도 전해졌고,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놀라운 위력은 무엇보다도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하는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이재술 신부-


오늘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우리 모두가 긍정하게된 것은 분명 인류가 그만큼 성숙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아직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인정하고 동시에 이 두 정치적 가치 가운데 자유에 기운 쪽이 보수이고, 평등에 비중을 두는 쪽을 진보로 간주하는 것 역시 현대 정치학의 상식임을 전제할 때 사회주의 몰락은 평등과 정의에 상처를 입혔을 뿐 아니라 강자는 살아남고, 경쟁력 없는 약자는 퇴장하거나 강자에게 빌붙어야 하는 새질서에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현장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세상은 연 식량 생산량이 인류 전체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양인데도 전세계 60억 인구 중 10억 이상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지구상의 어린이 4만명이 매일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는 데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곡물의 40%는 잘사는 나라에서 가축사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무한 경쟁으로 질주하는 신자유주의사회에서 '균등한 분배'와 '함께 잘 살자'는 구호는 모순이고 불합리의 화신임을 드러내 주는 대목이며 동시에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정치 경제적 구조에서 복지사회, 함께 잘사는 사회를 꿈꾸는 것은 특별한 관심과 노력과 희생이 전제됨을 느끼게 합니다.

성서는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도 당신 모습대로 만드신 다음, 그 세상이 당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부족함 없이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절실하게 추구하는 하느님나라는 새로운 질서에 의해 구현되는 것이 아니고 맨 처음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을 회복할 때 실현되는 사회이며 동시에 그 사회는 새로운 가치와 욕구의 충족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의 원래의 모습인 하느님 모습을 회복할 때 이룩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의 토대는 우리들 자신의 본성은 하느님이며 우리의 자아실현은 하느님의 분신인 우리이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결국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는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건설하는 엄청난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본성을 되찾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살아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희망, 얄팍한 바램이 아닌,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샘솟는 절대 욕구는 바로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은 바로 하느님의 분신인 우리이웃, 또 다른 하느님이고, 특별히 가난한 이웃으로 존재하는 하느님입니다. 그 영원한 가치인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은 그 자체로 기쁨이고 환희이며 행복입니다.
오늘은 사회복지주일입니다. 또 다른 하느님인 어려운 우리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참 기쁨임을 느끼는 주일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한기 신부-

 


교회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계명에 따라 처음부터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이웃사랑을 실천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가난한 이웃은 항상 우리 곁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난의 문제가 어떠한 제도나 방법으로도 근본적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시사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자본주의, 공산주의, 복지국가건설, 혹 박애주의, 평등주의를 내세우며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 속에 제시해 보았지만 아직까지 가난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예수님의 혜안에 고개가 숙여질 따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 사람들의 버릇만 나쁘게 한다.” 면서 그들을 외면하는 핑계로 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이웃을 향해 닫혀있고 애련히 여기는 마음이 굳어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많은 경우 예수님께서나 사도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할 때 그들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기도와 치유를 행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결코 회피하거나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그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모상을 보아야 합니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또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는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쓰고 넉넉한 가운데서뿐만 아니라 어려운 가운데 있을 때에도 주변의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없는가 하고 늘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나도 혹은 우리 공동체에도 어려운 사람이 많은데 어찌 그런 사람들한테까지 도와 준단 말인가?” 하면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외면한다면 예수님의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이교도들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인도에 처음 가셨을 때는 그냥 평범한 수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는 사람을 도와 주러 갔었는데, 그 사람은 자신도 도움 받는 처지임에도 먹을 것을 자기 혼자 차지하지 않고 더 가난한 이웃에게 가지고 가서 나누는 모습을 보고 감동 받아 시작한 일이 지금의 사랑의 선교회 시발점이 되었다는 유명한 이야기나, 가까이는 우리나라 꽃동네를 창설한 오웅진 신부님의 첫 부임지인 무극 본당에서 만난 최귀동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 해 줍니다.

우리는 결코 넉넉한데서 얼마를 떼어서 혹은 훗날 내가 좀 잘 살게되면 그 때 가서 좋은 일도 많이 하고 가난한 이웃도 돌볼 수 있겠지만, 지금은 내 코가 석자라서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세상 마칠 때까지 가난한 사람은 항상 우리 곁에 있을 것이지만 내가 쓰고 남는 것으로 이웃을 도우려는 생각을 갖는다면 세상 마칠 때까지 결코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분명히 말씀드려야겠네요.

 

구원의 손길

-이용화 신부-

 


오늘을 교회는 사회복지 주일로 정하였다. 사회복지(社會福祉)라는 말은 사전에 의하면 ‘국민의 생활 안정과 복리향상을 추구하는 광범한 사회적 시책의 총체’라고 되어있다. 복지를 누린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권리이며, 복지 사회는 우리 자신들의 노력으로 이룩해야 할 지상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의 맹점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살기 위해서 경쟁이 너무 강조되어 약자(弱者)들을 만들어 내는 사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때에 사회 복지 주일은 강자가 약자에게 일회성으로 조금 떼어 주는 선심성 주일이 아니라, 그들에게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도록 촉구하는 주일이다.

복음에서 복음사가인 마태오는 예수님의 갈리래아 전도에 대해서 전하고 있다. 예수님은 구약의 여느 예언자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회개하라!’고 촉구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심판’에 대한 경고로 회개를 촉구했지만,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로 회개를 촉구하셨다. 사실상 두 회개의 외침이 같지만, 예언자들과 예수님의 회개 선포는 시각적으로 커다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정의를 앞세워 불의한 자를 심판하기에 앞서 불의한 자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그분은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고 외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제자들을 부르고, 그들은 어떠한 조건 없이 그분의 말씀에 기꺼이 응한다. 이 부르심과 응답으로 구원의 역사는 점차적으로 무르익기 시작한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한 아기의 소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아기를 통해 하느님은 천대받던 백성들을 귀하게 드높여 주고, 이 아기는 어두움에 있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실 주인공이시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로는 고리토 교회내의 분열과 갈등의 소식을 듣고 일치와 조화를 강조하며 호소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한 사람들로, 주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기에 인간적인 약점들(이기심과 분열)은 주님을 중심으로 살 때만이 극복될 수 있다.

복음과 독서는 메시아의 소명에 대해 일러주고 있다. 메시아의 소명은 한 마디로 ‘구원’에 있다. 소명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서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그 부르심에 응답한 자들은 많지 않다고 말한다. 주님은 오늘도 미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당신에게 초대하고 있다. 이 부르심에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기꺼이 ‘예’ 할 수 없을까? ‘아니오’라는 대답보다 ‘예’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상대적으로 밝아진다.

 

인간은 교회의 길이다

-신동민 신부-


"교회는 인간을 포기할 수 없으며, 이 인간이야말로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따라 걸어야 하는 첫째가는 길이고... 그리스도 친히 따라 걸으신 길이며, 변함없이 강생과 구속의 신비 속을 거쳐가는 길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1991년 반포하신 회칙「백주년」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곱씹어 생각해 보면 이 말은 인간과 교회의 관계,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의미와 교회의 존재 이유를 함축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오늘 사회복지 주일을 맞이하여 사회복지의 참 의미를 생각하는 우리들이 언제나 마음속 깊이 간직해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사회복지란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존재의 현재에 관심을 갖고,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모든 사회문제들에 개입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는 행위가 곧 사회복지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존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없이는 사회복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인간존재의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인간존재의 근원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교회는 인간의 의미를 신적 계시로부터 받는다"(백주년 55항)고 했으며, "우리가 인간을, 진정한 전인(全人)을 깊이 인식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 자신을 인식해야 한다"고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즉, 우리 교회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 분께 대한 신앙 안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있으며, 교회의 사회복지 또한 이러한 견지에서 인간의 문제와 그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문제에 접근하고, 개입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되어진 인간의 모습은 과연 무엇입니까?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께서 "영원하신 하느님이시여, 당신의 본질 안에서 나의 본질을 인식하겠나이다" 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인간은 하느님의 본질을 닮은 존재로서 "추상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제적,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인간"(백주년 53항 참조)으로서 존엄성과 초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품위를 지니고 있으며, 그 품위의 유지는 어떠한 조건이나 상황 속에서도 유지되어야 할 초월적 권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대사회는 가치가 전도된 사회로, 인간존재가 지니고 있는 의미나 가치가 경제논리나 정치논리만으로 평가되는 가슴 아픈 일들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교회는 "인간의 초월성의 표지요 수호자"(백주년 55항)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만 하며, 그러한 역할의 수행을 위해 선택한 것이 곧 사회복지 활동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복지는 결코 어떤 특정인에게만 유보되어진 특별한 활동이 아니라, 우리 교회 모든 구성원들에게 요구되어지는 의무입니다.

지금 이 순간 가치의 전도로 말미암아 하느님 자녀로서의 품위를 잃고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관심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한 일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행하는 것이 곧 사회복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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