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9일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자, 들어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을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고....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잘 자라 열매를 맺었는데,
열매가 삼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백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마르코. 4,1-20)
“Hear this! A sower went out to sow.
And as he sowed, some seed fell on the path,
and the birds came and ate it up…
Some seed fell on rich soil and produced fruit.
It came up and grew and yielded thirty, sixty, and a hundredfold.”
He added, “Whoever has ears to hear ought to hear.”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나탄을 시켜 다윗에게 축복의 말씀을 내리신다. 이제 이스라엘은 한곳에 자리를 잡고 원수들에 대한 두려움 없이 평온히 살 것이며, 다윗 집안에 내리신 자애를 거두지 않으실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신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거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을 들으며 복음의 씨앗이 잘 자라나서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것을 방해하는 원인이 무엇일지 묵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소 이 비유를 풀이해 주십니다. 씨가 땅에 뿌려졌는데도 새들이 쪼아 먹거나 뿌리가 없어 말라 버렸다는 비유는, 우리가 들은 말씀이 환난과 박해, 세상 걱정과 갖가지 욕심 때문에 숨이 막혀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낯설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라 너무나 또렷하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머리로는 잘 알아들었는데도 여전히 말씀의 씨앗이 내 안에서 자라지 못하는 답답한 느낌이 남아 있습니다.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는 내 마음에 어떻게 시원한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이렇게 고민하다가 예수님께서 시원한 호숫가에서 이 말씀을 하시는 광경을 천천히 떠올립니다. 그 장면에 머무르며 나를 가득 채웠던 걱정과 욕심과 계획에서 잠시나마 훌쩍 떠나 봅니다. 이를 ‘하느님 나라에 대한 관조’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고상하고 철학적인 진리의 관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자연과 사람들의 꾸밈없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느덧 영원을 담은 하느님 나라에 조금씩 물들어 가는 체험을 갈망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체험하는 동안 마음의 가시밭과 돌밭은 조금씩 치워지고 그곳에 말씀의 씨앗이 숨 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것 같습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위대한 시인이자 근대의 진정한 예언자적 인물로 인정받는 영국의 윌리엄 블레이크의 유명한 시 ‘순수의 전조’를 천천히 음미해 봅니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 씨 뿌리는 사람이 씨 뿌리러 나갔다 >
-전삼용신부-
마이클이 전화를 잘못 걸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으려는 순간 누군가 전화기를
들고 “전화 잘못 걸었소!” 하고는 바로 전화가 끊겼습니다. 마이클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다시 같은 번
호를 돌렸습니다.
“전화 잘못 걸었다고 하지 않았소!”
여전히 그 목소리였습니다. 그리고는 또다시 꽝 하고 전화 끊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이클은 뉴욕 시
경에 근무하는 경찰입니다. 그는 경찰의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잘못 걸려온 전화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세 번째로 그 집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남자가 대뜸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이, 또 당신인가?”
“네, 접니다. 제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잘못 걸린 전화라는 걸 아셨는가 궁금해서요.”
“그런 건 당신 스스로 알아내라구!”
또다시 꽝 하고 전화가 끊겼습니다.
그는 손가락 끝에 수화기를 매달고 잠시 앉아 있다가, 다시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가 대뜸
소리쳤습니다.
“아직도 못 알아냈나?”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건 ... 당신에게 전화 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다는 겁니다.”
“잘도 알아내셨군!”
네 번째로 전화가 뚝 하고 끊겼습니다. 마이클은 또다시 번호를 돌렸습니다.
“이번엔 또 뭘 알고 싶은 건가?”
“전 그냥 ... 인사나 하려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인사라고? 왜지?”
“아무도 당신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다면, 저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좋소. 안녕하시오. 이렇게 성가시게 구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마이클은 자기소개를 했고, 그도 조금씩 자기를 열었습니다.
“내 이름은 아돌프 메트요. 나이는 여든여덟이고, 지난 20년 동안 하루에 이렇게 잘못 걸린 전화를 많이
받은 건 오늘이 처음이오!”
그 말에 둘이 동시에 웃었습니다. 그리고 둘은 매일 전화를 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마이클도 고아로
자라서 아버지라는 느낌을 아돌프를 통해 받았고, 아돌프도 친구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돌프는 자신이
겪은 전쟁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그가 성취하여 얻은 것이나, 잃어버려 아쉬운 것들까지도 재미있게 이
야기 해 주었고, 마이클은 그에게 이것저것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넉 달 넘게 이렇게 좋은 친구로 지내고 마이클은 이젠 얼굴을 보아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아돌프 씨의
생일에 그의 아파트로 차를 몰았습니다.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무 대답
도 없었습니다. 경비원이 말했습니다.
“아돌프 씨는 그저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돌아오면서 허공에 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돌프 씨, 난 그때 전화를 잘못 건 게 아니었어요. 어쨌든 당신은 내 친구가 되었으니까요.”
저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읽으면서 씨 뿌리는 사람이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 씨 뿌리는 사람은 새가 집어먹을 줄 뻔히 알면서 길 위에도 씨를 뿌리고, 자라다 말 것을 알면서도
돌밭에 뿌리고, 숨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가시밭에 뿌릴까?’
물론 성서학자들은 그 때는 씨앗을 흩뿌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곳에 충분히 떨어질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씨앗이 귀중하게 생각된다면 그렇더라도 낭비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이클은 왜 굳이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는 그 사람에게 끝까지 전화를 걸었던 것일까요? 본인도
무언가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외롭게 고립되어 혼자 죽어가는 그 사람뿐만 아니라 마이클도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혼자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하십니다. 씨 뿌린다는 것은 그 씨가 아무런 열
매를 맺지 못해도 끊임없이 뿌리는 분이십니다. 어떤 이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여 당신과 친교를 이루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당신의 말씀의 씨를 뿌리시는 분인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 씨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그 말씀의 씨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씨가 주어졌
는데 씨 뿌리지 않는다면 더 이상 씨 뿌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참 그리스도인은 아니
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평생을 씨 뿌리다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씨 뿌리는 사람이셨기 때문입니다.
씨 뿌리다 보면 어떤 때는 길과 같은 사람을 만나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어떤 사람은 급 반기다가
도 바로 식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주저주저 하며 확실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
래도 씨 뿌리는 사람은 씨를 길에도, 돌밭에도, 가시밭에도 뿌립니다. 그것이 열매를 맺든 맺지 않던 나
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두려움,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에 지면 더 이상 씨 뿌리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씨 뿌리러 나가야 합니
다.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친구가 없는 삶은 지켜보는 이 없는 임종과 같다.”
예수님은 우리를 벗이라 부르셨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 씨앗을 내어주며 많은 벗을 사귀도록 합시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유를 가지고 기도를 할 때는 본래 관상보다 묵상이 적합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 부분을 가지고 묵상 대신 복음 관상을 해봤으면 합니다. 의미 내용을 깊게 알아듣기 위한 묵상은 이미 많이 해봤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의 복음 장면들은, 유심히 보게 되면 자신의 모습에 대해 많이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커다란 성장을 일궈낼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가르침을 베풀고 계시는 장소의 모습을 잘 봤으면 합니다. 호숫가이고, 너무 많은 군중이 몰려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셔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십니다. 사람들은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고 말입니다. 호수 모습, 하늘 모습, 바람소리, 사람들의 정지한 듯한 가운데서의 움직임, 예수님의 음색, 몸짓 등을 편안한 마음으로 살펴보세요.
특히 오늘은 거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잘 살펴보세요. 어떤 사람들이 와 있고,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는지. 어쩌면 거기 모여든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 안에서 길과 돌밭과 가시덤불과 좋은 땅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곤 그 사람들과 예수님과 더불어 그 모두를 통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눈여겨보십시오. 어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무언가가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그들과 헤어져 예수님 혼자 계시는 모습을 좀 보면서, 그 예수님께 다가와 질문을 던지는 열두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세요. 그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내면을 읽어 들이려고 애쓰십시오. 물론 그런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눈빛도 놓치지 마시면서.
<꽃피어나는 복음>
-양승국신부-
말씀을 선포하는 입장에서 정말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이쪽에서는 열심히 준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데, 저쪽에서는 별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 반응은 고사하고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시합니다. 눈 꼭 감고 앉아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길게 한다고 인상 빡빡 쓰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한 것은 완전히 한밤중입니다. 코까지 골며 주무시다가 옆으로 쓰러지기 합니다.
그래서 저는 형제들에게 첫 번째 중요한 자세로 ‘경청’을 꼽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 정말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호의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준다는 것, 그것처럼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매일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 때로 어렵습니다. 우리들의 제한된 두뇌로 한없이 크신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의를 찾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때로 그 말씀은 너무나 오묘하고 때로 너무나 함축이어서 건성으로, 적당적당히 들어서는 그 뜻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보물처럼 여기고, 귀를 쫑긋 세우고, 최선을 다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들을 때, 거기서 오는 말씀의 은총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성찬의 전례가 보다 더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미사가 끝난 후 우리들의 삶 안에서 미사가 지속되어야 합니다. 성찬례의 정신과 영성이 우리들의 생활 안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나눔과 희생, 봉사와 용서, 사랑의 실천이 일상 안에서 되풀이되어야 하느님께서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말씀의 전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의 씨가 우리 마음 안으로 떨어지는 것만으로 끝나버린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 이 말씀, 이 강론, 이 묵상, 정말 좋다, 그것만으로 끝나버린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이 보다 많은 결실을 맺도록 하기 위해서는 말씀이 우리들의 삶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복음 선포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생활 안에서 복음이 꽃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하느님께 한 가지 화살기도를 올려봅니다.
“주님, 잘 듣게 해주십시오.”
말은 또 다시 원기를 회복해 활발하게 뛰어다녔지만 몇 주 후 다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주인은 상처가 낫지 않는 원을 알아내야겠다 싶어 말을 차에 싣고 동물병원에 직접 찾아갔습니다. 수의사는 말을 마취한 후 검사를 시작했지요. 그리고 상처 안을 파고 들어간 큼지막한 나뭇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감염의 원인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항생제를 투여해도 그때뿐이었던 것입니다. 수의사는 여태껏 고통의 근본 원인은 해결하지 않은 채 겉으로 보이는 증상에만 신경을 썼던 것이지요.
우리도 이 수의사와 같을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즉, 표면적인 문제만 해결하고는 모든 것을 다했다고 결론내릴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문제의 진짜 원인을 그냥 지나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그 결과는 어려움과 힘듦의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그 씨가 길에, 돌밭에, 가시덤불 속에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졌을 때 어떻게 되겠는가 라는 것이지요. 당연히 좋은 땅에 떨어져야만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배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말씀이 그러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의 마음을 좋은 땅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좋은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좋은 땅에 떨어지는가 입니다. 그 씨를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해서 새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싹이 돋아났지만 해의 열기로 타 버린 것을 해의 탓으로만 돌려서도 안 됩니다. 가시덤불에 의해 숨이 막혔다고 해서 가시덤불 때문이라고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좋은 땅에 떨어지지 못한 것, 즉 주인이 그 땅을 좋은 땅으로 만들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곁에 늘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과 함께 우리들은 커다란 열매를 맺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을 버리십시오. 또한 굳은 믿음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좋은 마음의 밭을 만드십시오. 그래야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바로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듣자
-조명연-
어제 아침, 성당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묵상을 하던 중에 예수님의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못생기고 뚱뚱한 분이 아니라 멋지고 호리호리한 분이셨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겉모습만 생각하고 있으니, 정작 중요한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이지 않네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을 위해 당신의 몸까지도 하느님께 내어 맡긴 그 십자가의 삶인데,
예수님의 겉모습만을 따지다 보니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을 통해, 2천 년 전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도 제대로 따르지 못한 이유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겉으로만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만을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면서 하느님의 보살핌을 생각하기보다는 저분만 따르면 굶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고, 병자를 치료하시는 모습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기보다는 공짜로 치료될 수 있음을 또한 이제 아프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하시면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읍시다. 그 길만이 참된 구원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