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1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아녜스 성녀는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 초반 로마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열세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순교하였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유약한 나이에 보여 준 그녀의 위대한 신앙의 힘’을 높이 칭송하였다. 교회는 아녜스 성녀를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증언하고자 정결을 지킨 순교자로 기억하고 있다. 성녀는 한 마리 양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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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십시오. 왜 저 사람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코 2,23-28)
"Look! they are doing
what is forbidden on the Sabbath!"
Then Jesus said to them
The Sabbath was made for man,
not man for the Sabbath.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이끌 새로운 지도자를 뽑도록 하신다. 사무엘은 주님의 이 명에 따라 이사이의 아들들을 만난다. 주님께서는 사무엘의 예상과는 다르게 막내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마음을 보셨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항의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옛일을 언급하시며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밝히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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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는 놀랍게 들릴 두 가지 사실을 명백히 하십니다. 하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현대인에게 너무나 절실한 주제인 ‘자유의 체험’에 관해 묵상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의 주장을 이어 주는 접속사 “그러므로”는 논리적 귀결이나 인과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분리할 수 없이 깊이 연결된 직관적 깨달음이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안식일을 포함한 모든 율법 규정은 사람이 자유와 해방을 체험하게 도울 때 그 ‘존재 이유’가 있다고 알려 주십니다. 이어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자유의 몸’이시며 우리 역시 그러한 자유를 선사받았음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이제 이러한 자유의 체험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란 무엇이며 자유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의 답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안식일의 규정을 포함한 모든 계명의 정신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임을 깨닫고 이웃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것과,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온 자유를 체험하는 것은 사실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진리에 감명받고, 더 나아가 자신이 ‘타인을 위한 존재’라는 것을 깊이 깨닫는 사람은, “그러니, 십계명은 자유의 계명”이라는 노트거 볼프 아빠스의 말에 동감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에 대한 체험일 것입니다.

“어르신, 이곳에 앉으세요.”
그런데 이 어르신께서는 “나 노인 아니에요.”라고 거절하시면서 자리를 양보하는 저를 무안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절을 당하니 기분이 그리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계속 앉아있는데 괜히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마치 ‘자리도 양보하지 않는 뻔뻔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지요. 하지만 “제가 양보를 했는데도 어르신이 거절하셨어요.”라고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외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 그 순간, ‘그냥 전철에서 내려야겠다.’ 싶었습니다. 제가 내리면 자리가 생기는 것이고, 그렇다면 노인이라고 양보 받은 자리가 아니니 앉지 않으실까 편안한 마음으로 앉으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내릴 전철역도 아니었는데 내렸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좋은 마음으로 양보한 자리였는데, 아마 이 어르신에게는 오히려 부담되는 양보였나 봅니다. 그렇다면 그 좋은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어르신이 잘못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잘 생각해보면, 이 어르신 역시 남들에게 대접 받는 것이 편하지 않아서 좋은 마음을 가지고 제게 도리어 양보한 것이니까요. 서로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좋음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선택한 방법은 어르신이 불편하지 않게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일어나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었지요.
중요한 것은 나의 선의가 거절되었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상대방이 편안하게 선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 중심의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 중심이 아닌, 내 중심으로 생각하다보니 나의 선의가 거절되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으로 상대방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가슴에 새겨야 할 분명한 기준을 말씀해주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우리 사람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드신 모든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 역시 사람 중심, 특히 나의 이웃들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배려하는 삶, 사랑의 삶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따뜻한 글을 하나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30대 초반의 유치원교사입니다. 가벼운 우울증이 있어 간혹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곤 합니다. 그냥 눈물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친구들과 식사를 하다가, 저녁에 TV를 보다가, 아침에 출근을 하다가... 제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릴 때 주변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요?”
“내가 무슨 실수 했나?”
대부분 이렇게 ‘이유’를 물어봅니다.
하지만, 제가 일하는 유치원 아이들은 다릅니다. 친구가 이유 없이 울음을 터트릴 때 주변 아이들의 반응은 거의 한결같습니다.
그냥 함께 웁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옆 사람의 눈물을 함께 해주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서 마음에 크게 와 닿았습니다. 솔직히 저 역시 항상 이유를 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유를 묻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중요했는데 말이지요. 사실 주님께서도 항상 침묵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시지요.
이제부터라도 변해야 합니다. 이유를 묻는 우리가 아닌, 침묵 속에서 함께 울어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우리가 많아질수록 하느님 나라는 더욱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미움이 아닌 사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김대열신부-
…
허기진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다가 낟알을 까먹는다.
이를 못마땅하게 본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율법을 이야기하며 트집을 잡는다.
“당신의 제자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겁니까?”
행간을 읽어야 한다.
정말 율법에 나온 조항을 어겼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을까?
과연, 몇 퍼센트의 바리사이들이 613개의 율법 조항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고 있었을까?
어느 누가 미워지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미워진다.
그가 잘했던 못했던 모든 것이 미워진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지닌 또 하나의 약함이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이 싫었던 것이다.
낟알 몇 움큼이 없어지는 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더욱이 율법 조항에 어긋나는 듯 한 일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가 싫었고 그를 따르는 무리가 싫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러한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에 걸맞은 논리를 찾으려 한다.
대부분 빈약한 논리들이다.
안식일이라는 틀에 사람을 끼워 맞추려는 듯한 논리다.
사람이 돈을 위해 있는 듯한 논리다.
경계해야 한다.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잘못된 일을 비판해야 한다.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긍정을 위한 부정이어야만 한다.
율법 조항 613개가 많다고 하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의식할 수조차 없는 수없이 많은 복잡한 법과 규제 속에 살아가고 있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모든 법과 규제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과의 조화를 위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모든 생명체와 자연이 그 존재 이유에 맞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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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really simple, but we insist on making it complicated. (Confucius)
인간미가 넘치는 안식일 규정
-양승국신부-
아전인수(我田引水)란 말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어떤 사건이나 행동을 자기 멋대로,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또 잘 하는 것이 ‘확대해석’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듭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젯밤 아주 골치 아픈 일을 하나 겪었습니다. 밤잠도 설치고 아침에 출근하니 얼굴이 말이 아닙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할뿐더러 어둡고 시무룩했습니다. 그 얼굴을 본 아전인수, 확대해석 잘 하는 사람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오늘따라 왜 저리 인상 빡빡 쓰고 있지? 나한테 무슨 감정이라도 있나? 감정 있으면 말로 할 것이지 아침부터 재수 없게 왜 인상을 쓰냐구?’ 그걸로 끝나면 좋을 텐데 끝까지 다가가서 따집니다. “뭐 나한테 불만이라도 있습니까?”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이 아전인수나 확대해석의 명수들이었습니다. 안식일 규정의 취지는 원래 바람직한 것이었습니다. 탈출기 34장 31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합니다. “너희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
이 말은 인간을 정말 많이 생각하는 말, 최대한 배려하는 말이었습니다. 원시적인 형태의 ‘근로기준법’이었습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악덕 기업주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강도 높은 노역으로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저임금에 시달렸습니다. 안식일 규정은 정말이지 사람을 생각해서 만든 인간미가 철철 넘치는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안식일 규정의 문구 하나 하나를 철두철미하게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세부 규정을 만들어나갔습니다. 아무리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몸을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안식일에 걸어 다닐 수 있는 최대거리까지 규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거리는 1392미터였습니다. 더 철저한 사람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요리조차 일이라고 생각해서 안식일에는 하지 않았습니다. 스위치 하나 켜는 것, 엘리베이터 버튼 하나 누르는 것조차 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이 하루는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난삼아 밀 이삭 몇 개를 잘라먹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즉시 심기가 불편해졌습니다. 제자들은 밀 이삭 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재미삼아 몇 가닥 뜯어 먹었을 뿐인데 그걸 가지고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본격적인 수확이나 농사일에 전혀 해당되지 않는 장난이었는데, 그걸 그리도 확대해석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요즘 시대 안식일(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에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방에만 가만히 드러누워 있지만은 않습니다. 자녀들 끼니를 챙겨주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몸의 건강을 위해 평소보다 더 많이 들길을 걷습니다.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에 몰두합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을 즐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결정적인 실수를 놓치지 않습니다. 율법에 대한 그릇된 해석과 오해, 편협한 적용과 과장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인간의 건강과 유익을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안식일 규정을 통해 인간이 일이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반대로 사람을 안식일의 노예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이나 제도라할지라도 그것들이 인간을 힘겹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살수 없게 만든다면 백퍼센트 재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자유로움 자체이신 분, 하늘을 떠도는 구름처럼 거칠 것 없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제정한 법과 제도들이 조금이라도 그분 앞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볼 일입니다.
< 존재이유를 잊으면 괴물이 된다 >
-전삼용신부-
아놀드 슈왈츠네거가 주연한 ‘터미네이터’란 영화는 1997년 개봉하여 매우 큰 흥행을 일으켰습니다. 온 몸이 불에 타고도 또 다리와 손이 잘려져 나가고도 한 여인을 죽이기 위해 눈에 빨간 불을 켜고 쫓아오는 사이보그의 모습은 영화가 끝난 이후로도 아주 긴 두려운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무언지 모르는 공포로 보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이 영화의 발상이었습니다. 인간은 사이보그를 인간 자신들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가정에서 편안함을 찾기 위해, 혹은 공장에서 위험함을 감소시키기 위해, 혹은 전쟁을 위해 로봇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많은 로봇들이 만들어지는 이유와 같습니다. 그런데 2029년 미래에 이 로봇들이 인공지능을 가지게 되면서 더 이상 인간에게 종속되기를 거부하고 인간과 맞서게 된 것입니다.
로봇은 방사능에 영향을 받지 않음으로 핵전쟁까지 일으켜 30억이라는 인간을 죽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대장을 죽이지 못하자 타임머신을 이용해 그 대장의 엄마를 죽이도록 1984년 L.A.로 총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는 사이보그, 터미네이터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레지스탕스 대장도 한 병사를 과거로 보내어 자신의 어머니를 보호하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자신이 보낸 그 병사가 자신의 아버지가 되는 것도 재미있는 설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우리 편의를 위해 만들어 내는 어떤 것들이 결국엔 우리를 지배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상황이 오늘 복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 법’은 하느님과 인간을 위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안식일 법은 그것을 만든 예수님은 물론 예수님을 위해 일하는 제자들에게도 걸림돌이 됩니다.
안식일 법이 만들어진 배경은 이렇습니다. 바빌론 유배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성전은 파괴되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예배는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제 계급을 중심으로 고대 근동지방에 존재하는 안식일 법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상 창조 때부터 하느님은 6일 동안 일을 하고 안식일에는 쉬셨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하느님도 쉬셨으니 인간도 일주일에 하루는 쉬면서 하느님을 기억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안식일 법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이 예수님 시대까지 오면서 괴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을 위한 법이 아니라 돈 많고 시간 많아서 안식일에 일을 할 필요가 없는 이들, 즉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기득권들만이 하느님의 법을 지킨다는 정당성을 주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 법을 어기면서 동시에 도둑질까지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 법으로 옭아매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옹호하십니다. 다윗도 도망치면서 하느님의 법을 어겼지만 그것은 정당화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법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법에게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안식일 법을 어긴 제자들을 옹호하는 것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이 사형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법을 어긴 이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는 요즘 영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송강호 주연의 ‘변호인’입니다. 법이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느냐란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법을 어기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돈만 밝히던 속물 변호사 송강호는 법이 인간의 존엄성 위에 있어서는 안 됨을 깨닫고 인권을 위해 자신의 편안한 삶을 걷어차게 됩니다.
여기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나는 있는 법을 집행했을 뿐이다.”라고 말하며, 법이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고 국가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곽도원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국가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난 후, 눈에 핏발을 세워가며 읊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 “국가란 국민입니다.”, 이 송강호씨의 연기는 예고편만 다시보아도 왠지 눈물이 나옵니다. 정말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하고, 국가가 곧 국민이고 모든 법과 권력은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정신이 사라지니 법도 괴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학순 주교님도, 김수환 추기경님도, 또 지금의 많은 분들도 권력과 법에 맞서셨던 것입니다. 당신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법이란 것에 피해를 받는 이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예언직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예언직이란 흰 것을 희다고, 검은 것은 검다고 말해주어야 하는 의무입니다. 모든 박해와 죽음은 바로 이 예언직 때문에 비롯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고 수많은 과거와 현재의 예언자들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터미네이터가 인간을 해치기 위해 나타났다면 당연히 그것과 맞서야합니다. 괴물이 되어버린 것은 본래의 존재이유를 찾도록 맞서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만들어진 이유. 그것을 잊으면 나도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해야 하는 원초적 존재이유, 그것이 소명이고 부르심입니다. 내가 변질된 모습이 아닌 참 나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항상 내가 왜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되묻고 그 존재이유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