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8일 화요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2014. 1. 28. 오후 10:4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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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8일 화요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무렵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과 나폴리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대 알베르토 성인의 제자가 되었다. 1245년부터 파리에서 공부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3년 뒤 독일 쾰른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곳 신학교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에 관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겼는데, 특히 『신학 대전』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로 꼽힌다. 1274년에 선종하였으며, 1323년에 시성되었다.

☆☆☆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코 3, 33-35)

 

 And looking around at those who sat there he said,

"Here are my mother and my brothers.

Whoever does the will of God is brother

and sister and mother to me."

 

말씀의 초대

 다윗 임금과 온 이스라엘 집안은 하느님의 궤, 곧 계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신다. 다윗은 기뻐 춤춘다. 주님께 제물을 바친 다윗은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친척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시자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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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은 서양 중세의 전성기인 13세기에 활동한 교회의 대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축일입니다. 50년의 그리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그가 남긴 방대한 저서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철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성적인 탁월함과 학문적 업적보다 우리를 더 감동시키는 것은 그가 보여 준 깊은 신앙과 겸손입니다.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지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 하느님께서 내가 당신의 뜻에 따라 말하고, 내가 받은 것들에 맞갖은 생각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빈다”(지혜 7,7.15). 지혜서의 이 말씀처럼 성인의 학문은 바로 기도하고 경배하는 신학이며 철학이었습니다. 내면 가장 깊은 데서 하느님의 신비를 경외하는 가운데 겸손하게 그 신비의 봉사자가 되기를 갈망한 성인의 삶이었기에, 교회는 그를 ‘천사적 박사’라고도 부릅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의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니콜라오 성인의 축일에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한 그는 비서 수사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쓴 것들은 하느님의 신비에 비하면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대표적 저서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 대전』을 기꺼이 미완성의 상태로 남겨 둔 채 펜을 놓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성인의 지극한 겸손과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말해 줍니다. 현대 세계가 겪는 위기들의 뿌리는 사실 많은 경우 ‘앎’의 위기에 있습니다. 이익과 간판, 명예와 허영 등을 추구하는 가운데 지식욕과 지배욕에서 자라난 ‘앎의 의지’들이 세상을 어지럽힙니다. 우리는 이렇게 물든 이 시대의 병든 모습을 제대로 깨닫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보여 준 모범처럼,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에서 비롯되는 참된 앎의 길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가르멜 수도원에 전설로 남아 있는 수도원장이 있습니다. 그는 니콜라스 헤르만(Nicholas Herman)으로, 1611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전쟁과 여러 일을 전전하다 55세 때 수도원 평수사로 들어와 부엌일을 하게 되었지요. 그는 이 일이 너무나도 행복했답니다. 자신이 만든 식사를 수사들이 먹는 것을 바라보며 항상 감사했습니다.

그는 수사들을 섬기면서 갈수록 행복이 커졌습니다. 그는 작은 일도 큰 일로 생각했고, 접시 하나 닦는 것을 수만 군중에게 설교하는 것처럼 중요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20년을 변함없이 살자 함께 사는 수사들은 점차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나중에 이 수도원에서 원장을 뽑을 때 원장 후보조차 될 수 없었던 평수사인 그가 원장에 뽑히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국왕 루이 12세가 수도원을 방문해 그에게 행복의 비결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지요.

“행복의 비결은 섬기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광의 자리를 찾아서 다닙니다. 그래서 돈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그렇게 애를 씁니다. 하지만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 그 자리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영광의 자리는 오히려 섬김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가장 겸손한 사랑을 간직하면서 섬기는 삶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이해하려면 진정 그것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지요. 나무를 이해하려면 나무가 되어야 하고, 바위를 이해하려면 바위가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이해하려면 주님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앞서 말씀드렸던 니꼴라스 헤르만 수도원장처럼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겸손한 모습으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주님처럼 살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나의 기준에만 맞춰서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기준인 것처럼 착각에 빠져 살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 사람들이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이들을 기쁘게 맞이하러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주 뜻밖의 말씀을 하시지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는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의 기준과 주님의 기준은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는가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들은 과연 어떤 기준을 따르고 있을까요?

이제는 주님처럼 살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뜻을 철저하게 실천하시는 그래서 가장 겸손한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이해할 수 있고, 우리 역시 주님의 진정한 형제자매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많이 하는 사람은 기도도 잘한다(새뮤엘 클러리리).

 

 내 사람, 그리고 우리     

- 이승주 신부-

 

이른바 세계화라는 그럴 듯해 보이는 물결이 우리나라를 휩쓸면서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언어 습관인데 불과 십수년 전까지 우리 입에
자연스럽게 담겨 있던 ‘우리’라는 말이 이젠 거의 ‘내’라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개성의 존중, 개개인의 자존감 향상과 주도적
삶의 추구라는
멋진 의미들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그 포장 속에 더욱 본질적인
원동력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소유’에 관한 욕망입니다.
우리 아들 우리 딸이 내 아들
내 딸로 변하면서 자녀들에 대한 집착과 몰입은 더 심해졌습니다. ‘우리’라는
끈적거리고 두루뭉술한 말로 편안하게 얼기설기 엮여 있던 관계들은
‘내’라는 예리하고 건조한 말로 재단되면서 단단하게 묶였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혈연을 앞세워 군중 밖으로 예수님을
불러내고자 하는 행위는 관계를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의 욕망을 상징합니다.
그 마음을 부정하거나 책망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관계들이
우리의 소유로 전락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이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공유되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것, 가장 사랑하는 사람. 그 어느 것도 나의 것이 아니며
그 모두와 함께 우리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엄마가 됩시다

-이명옥 수녀-

 

“그건 환희라고 해야 할까? 경이로움? 글쎄요. 어떤 말로도 표현이 잘 안 돼요. 엄마가 되는 체험, 그게 여성으로 살면서 느끼는 가장 큰 기쁨이에요. 제가 낳은 아이를 처음 받아 안았을 때, 아이와 눈을 맞추고 젖을 먹일 때, 아이가 온전히 저를 믿고 의지하고 있다고 느낄 때도 그래요. 아이를 키우면서 저도 함께 성장하는 걸 느끼면 정말 기뻐요. 제가 여자로 산다는 게 참 좋아요.”
저희 수도회 독서포럼인 ‘행복한 책읽기’에서 나눈 엄마들의 이야기 중에 제 마음에 가장 깊숙이 남는 이야기입니다. ‘여성으로 살면서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라는 질문에 엄마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엄마가 되는 체험에 대해 신이 나서 말씀해 주십니다. 저는 한 분 한 분 표현하실 때마다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만큼 감동으로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동시에 하느님의 자녀들이 태어나는 순간 하느님도 그 영혼을 받아 안고 이렇게 기쁘고 행복하시겠구나. 그런 생각이 뒤따르면서 또 눈물이 납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더러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 예수님을 낳는 어머니가 되고 예수님의 형, 누이가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의 자녀들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베풀어지면 가장 기뻐하시는 분은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자기 자신을 나누어 줄 때 큰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은 나눔의 신비입니다. 베풀면서 더 기뻐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형제, 누이가 됩시다.

붙잡지도, 붙잡히지도 말지니!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오늘 드디어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앞선 20-21절을 보면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여겼고,
그래서 붙잡으러 나섭니다.
그러니까 오늘 마리아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음은
그저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붙잡아가기 위해 찾은 것이고,
누가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냐고 예수님께서 반문하시는 것은
너무도 매정하게 모자 관계와 형제 관계를 부정하고,
붙잡으려는 그들의 손을 아주 매몰차게 뿌리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차례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부모와 형제를 버리고 따라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에게만 그걸 요구한 게 아니라 당신도 그러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미친 것은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고
정신이 오직 아버지 하느님께만 미치는 겁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고 할 때 그 情神一到입니다.
곧, 정신이 한 곳, 곧 하느님께만 미치는 것, 도달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미쳐야 하는데
우리의 정신이 예수님의 정신에 훨씬 못 미쳐
하느님께 못 미치고, 하느님께 도달하지 못 한 거지요.
하느님께 기도를 드릴 때 드는 분심도 마찬가집니다.
마음이 여러 개로 나뉘는 것이 분심分心인데,
마음이 하느님 아닌 다른 것들에 나뉘어 머물기에
일심一心으로 하느님께 기도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미치기(도달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미쳐서 다른 것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느님 이외의 것들은 버리고, 뿌리치고, 내팽기쳐야 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를 버려야 모두를 소유하고
모두를 소유해야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소유합니다.

저는 매주 치매 노인 시설에 가서 미사를 드립니다.
어떤 때, 특히 요즘 같은 때
몹시 편찮으신 제 어머니는 자주 찾아뵙지 못하면서
남의 어머니를 위해 미사 드리는 것이 뭐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제 어머니를 버렸기에 남의 어머니가 남의 어머니 아닌 제 어머니고
제 어머니를 버렸기에 모든 어머니를 섬길 수 있습니다.

또 이런 생각도 합니다.
제가 자주 농담 삼아 하는 얘기대로
한 여자 소유하는 것을 포기했기에 나는 모든 여자를 소유한다고.

그러니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주님의 어머니와 형제가 되려면
붙잡지도, 붙잡히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또한
모든 어머니와 형제들의 아들과 자매들이 될 수 있습니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어제는 강원도 횡성에 다녀왔습니다. 우리 본당 학생들이 스키캠프를 마치는 날이었거든요. 따라서 좀 먼 거리이지만, 얼마나 재미있게 노는지 그리고 내년에도 할 만한 프로그램인지를 보기 위해서 직접 운전을 해서 강원도 횡성에 있는 스키장까지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처음 가보는 스키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지도 한 번 보지 않고도 헤매지 않고 잘 찾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불과 몇 년 전 만 해도 지도책을 보면서 찾아가면서도 엄청나게 길을 헤매는 길치가 바로 저이거든요. 그렇다면 제가 길 눈이 밝아서 그럴까요? 바로 내비게이션 때문입니다. 내비게이션이 운전대 바로 옆에서 왼쪽으로 가라, 오른쪽으로 가라를 말해주다 보니 걱정 없이 원하는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것이지요.

이 고마운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문득 ‘참 착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안내해주는 길로 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때 “안내해 주는 대로 왜 못가니? 운전을 고따위밖에 못해? 너 바보 아냐?” 식의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화 한 번 내지 않고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다시 안내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안내를 시작해주지요.

그리고 이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사랑의 길과 정반대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뭐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인간들처럼 “이 바보야. 내가 몇 번을 말해야 하겠어? 너 한 대 맞아야 정신 차리겠니?”식의 윽박지르고 화를 내지 않으십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다시 한 번 제자리로 스스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항상 내 자신을 기준으로 활동하십니다. 마치 내비게이션이 지금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안내를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 역시 이 모습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화를 내고 윽박지르기 보다는, 예수님처럼 다시 기회를 주고 사랑으로써 감싸 안는 모습. 이 모습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서운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을 이들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고 반문하시지요. 그러나 이들을 문전박대하기 위함이 아님을 곧바로 이어지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선언을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남들이 화를 낸다고 나 역시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사람들이 남을 미워하고 판단하고 단죄한다고 해서 나 역시 똑같은 모습을 취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모습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일까요? 즉,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실행하고 있을까요? 내 이웃의 어떠한 행동에도, 말없이 참아주면서 다시 기회를 주고 사랑으로 감싸 안는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 이웃의 어떠한 행동에도 화내지 말고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세요.

  

 말씀에 머물 때     

-구경국 신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요한 사도에게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어머니로 맞아들일
것을 부탁하실 정도로 효자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입에서 어머니와 친척들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의미의 말이 나왔다는 사실은 매우 의아하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상황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생각에 그를 붙잡으러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으로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군중이
함께 있는 곳, 즉 하느님의 말씀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
머뭅니다. 하느님의 말씀 바깥에 있으므로 당연히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예수님을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끌어내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거부하신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어느 본당 공동체에 가든지
그곳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선행과 봉사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 사이에서 가끔 불협화음이
들려오곤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하느님 말씀의 바깥에 머물러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같이 그들 중 누군가가, 아니면 모두가 봉사의 근본을
하느님의 말씀에 두고 있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이 함께할 때 하느님의 뜻을 바로 알아 실행할 수 있고, 말씀에 충실히
머물 때 한 가족이 되어 함께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이인가?

-김현숙 수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이인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만 하느님 나라의 비밀이 알려지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어머니는 어린 자식을 들쳐 업고 보따리 장사를 다니는 아주머니가 오시면 아이를 내려놓고 물 한 모금 마시고 쉬었다 가라고 하셨다. 아이도 좀 놀릴 겸. 그런데 그 꼬마가 내 책에 낙서를 한 적이 있었다. 화를 내는 내게 어머니는 “나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고 내 자식을 돌봐준 사람들이 있었다. 내 자식 코 한번 닦아준 은공을 평생 못 잊는 법이다.”라며 싫은 내색을 하지 못하게 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이인가?
큰언니는 목욕탕에서 혼자 씻고 계신 할머니를 보면 다가가 등을 밀어드린다고 했다. 내가 모르는 할머니의 등을 밀어드리면 누군가 우리 어머니한테도 친절을 베풀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이인가?
언젠가 몸이 아픈 후배 수녀님을 위해 죽을 끓여주었다. 정말 입맛이 없었던지 한 숟가락 들더니 “이렇게밖에 끓일 줄 몰라요?” 하며 숟가락을 놓고 투정을 했다. 그의 옷을 세탁해 널어주고 죽을 끓여주는 것이 남을 배려하는 데 인색하고 둔한 나에게는 보기 드문 이변이었다. 그런 나의 호의에 퇴박이라니!
이 일을 수녀원 생활에 호기심 많은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한테 들려주었더니 깔깔거리며 웃었다. 우리 서로 형제 자매라면 허물없이 퇴박하기도 하고 또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도 나는 후배 음악선생 수녀에게 “피아노 좀 잘 쳐봐! 잘 칠 때까지 계속 쳐요.” 하며 애꿎은 핀잔을 주고 서로 깔깔거리며 웃는다. ‘이 사람들이 바로 나의 어머니요 형제요 누이’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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