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2014. 2. 4. 오후 8:52:01

글자

2014 2 2주님 봉헌 축일

 

 

교회는 성탄 다음 40일째 되는 날, 곧 2월 2일을 예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이 축일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한다. 예루살렘에서는 386년부터 이 축일을 지냈으며, 450년에는 초 봉헌 행렬이 여기에 덧붙여졌다. 6세기에는 시리아에서 이 축일이 거행되었고, 로마는 7세기 후반에 이를 받아들였다. 8세기 중반에는 ‘성모 취결례(정화) 축일’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18세기 프랑스 전례에서 ‘주님 봉헌’으로 바뀌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날을 ‘봉헌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다. 이에 따라 교황청 수도회성은 해마다 맞이하는 이 봉헌 생활의 날에 모든 신자가 수도 성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봉헌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한다.

☆☆☆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루카 2,22~40)

 

When the days were completed for their purification
according to the law of Moses,
Mary and Joseph took Jesus up to Jerusalem
to present him to the Lord,



 

말씀의 초대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는 주님의 길을 닦을 것이며, 레위의 자손들을 정화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지난날처럼 주님의 마음에 들게 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과 깊은 연대감을 지니고 계셨다. 그분께서는 죽음의 공포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또한 대사제가 되시어 당신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는 분으로,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 있다(제2독서).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려가 성전에서 주님께 봉헌한다. 시메온 예언자는 아이를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한 뒤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 아기가 많은 사람에게 반대받는 표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젊은이들이 즐겨 부르는 『가톨릭 성가』 469번 ‘사랑하면 알리라’라는 젠 성가의 가사는 이러합니다.
“언제나 나는 물었다. 언제나 주께 물었다./ 세상은 사랑 찾는데 왜 고통이 있냐고?/ 오직 한마디 내게 주었네, 마치 물음에 답하듯이./ 사랑하라 알고 싶거든 빛이 솟음을 너 보리라./ 사랑하라 말해 주네. 사랑을 하면 알리라./ 사랑하라, 슬픔 가고 기쁨을 찾으리.”
오늘 주님 봉헌 축일에 교회는 ‘봉헌 생활의 날’을 지내며 주님께 봉헌된 삶을 선택한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들은 위 성가 가사처럼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찾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십자가의 주님께 세상의 모순과 고통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고 강렬하게 물었던 이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논리와 복음의 가르침 사이의 적당한 타협에 만족할 수 없는, 뜨거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리에 대한 추구는 사랑의 선택 안에서만 그 참된 길을 발견하는 것임을 깨닫고 그 길을 걷기로 결심한 이들입니다.
독일에 머물렀던 시절, 오랜 숙고 끝에 봉헌의 삶을 선택한 한 분과 교분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욕심과 바람이 아니라 오직 정직하게 ‘진리와 진실을 찾는 이’가 되기를 바라던 성실한 젊은이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공동체와 이웃을 위한 사랑의 삶에 그토록 애타게 찾던 진리가 있음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많은 수도자가 자신의 서원을 더욱 새롭게 다지는 이 복된 날, 문득 자신의 응답의 결실에 감사하고 있을 그가 떠올랐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봉헌 생활의 길은 수도자들만이 아니라 조금은 다른 방식이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주어져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인생살이에서 실천할 사랑의 소명을 주님에게서 부여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봉헌된 맏아들

_김유겸  신부-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
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요한 1서가 우리에게 밝혀주듯이 봉헌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누가 맏아들을 내보였는지, 누가 맏아들을 바쳤는지를 생각한다면 그건 분명 하느님이다. 봉
헌이란 것은 자신에게 속한 것을 치명적으로 누군가와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숨겨야 할 것을 드
러내는 것이고 남과 나누지 말아야 할 것을 나누는 것, 혹은 그 이상이다.

그래서 상처와 왜곡과 파괴를 동반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이 일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은폐와 소유를 포기하면서까지 진정으로 함께해야 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 치명적으로 나눌수록 함께 함의 정도는 커진다. 맏아들을 내어주신 분은 하느님이고 그래서 상처받은 분은 하느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함께하길 원하신다. 요한 1서는 이것을 하느님께서 드러내신 사
랑이라고 강조한다.

  
주님 봉헌 축일이 보여주는 신비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봉헌을 하느님 당신만의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행위를 인간의 손으로 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주님의 신비스러운 행위에 인간을 동참시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해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서 신비를 행하게 된다.

주님 봉헌 축일에 교회가 복음 말씀을 통해 열어주는 장면은 마리아 와 요셉이 예수님을 하느님 앞에

봉헌하는 장면이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고 자신의 공간을 열어 개방하고 말씀이 현실이 되도록 출산한 이이며 그의 신심 깊은 배필이자 협조자이다. 이는 곧 교회와 그와 혼인한 배필들이자 협조자들을 의미한다. 그들이 현실이 되신 말씀을 성전에 모시고 오자 성전은 그 참된의미를 되찾는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맡기신 그일들은 교회를 통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그행위로 인해 성전은 그 의미를 되찾는다.

                                                                                                     

교회와 그의 신심 깊은 협조자들은 미사성제를 통해 사람이 되신 말씀을 예물로 바친다.

그 순간 인간은 하느님의 행위를 자신들의 손으로 행함으로써 차원을 건너뛰게 된다.
봉헌은 우리에게 내려진 하나의 선물이다.

선물인 이 행위는 시메온의 말처럼 영혼이 칼로 꿰찔리는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행위는 분명 우리를 거룩함으로 인도할 것이다.

 

 

-서공석신부-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의 부모들이 모세의 법이 명하는 대로 아기를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들이 태어나면 출생 40일 만에, 딸이면 출생 80일 만에 어머니는 정결례 절차를 밟아야 하는 당시 유대교의 법이었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시므온의 노래는 루가복음서를 쓴 사람이 채집하여 수록한 초기 교회의 노래입니다. 루가복음서는 마리아의 노래(1,46-55), 즈카리아의 노래(1,68-79), 시므온의 노래, 이렇게 세 개를 채집하여 수록하였습니다.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하였다는 예언,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라는 말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공동체가 겪은 갈등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겪어야 했던 아픔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언 내용은 예수님을 체험한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역할을 해석하면서 발생한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원의대로 살고 싶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와의 이해관계 안에서 보려합니다. 배우자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도, 그 사랑 안에는 어느 정도의 자기중심적 생각이 감춰져 있습니다. 자기의 직장이나 사회를 보는 우리의 눈은 더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 한 사람이 잘 되는 데 필요한 재물이고, 지위이며, 권력이라 생각합니다. 신앙도 그런 것을 얻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다는 말은, 사람이 자기중심적으로 주변을 보지 말고, 하느님 중심으로 주변을 보라는 뜻입니다. 그 하느님은 심판하고 벌주고 군림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나온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탈출 33,19) 선하신 분입니다. 사람도 하느님을 본받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을 하도록 유도하는 지침인 율법이었습니다. 하느님에게 봉헌하라는 말은 사물을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 보고 처리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봉헌하면서 자기중심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선한 실천을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맏아들을 봉헌하는 것은 이제부터 태어나는 모든 자녀를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 보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시선과 실천을 바꾸기 위한 봉헌의례입니다.

 

일반 종교 현상에서 봉헌은 인간이 신에게 무엇을 바치는 행위입니다. 인간은 그 봉헌으로써 신의 마음에 들고 신은 그에게 어떤 혜택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과 신 사이에 거래를 성립시키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높은 사람 혹은 강한 사람으로부터 혜택을 받아내기 위해 하는 행동과 같습니다. 신에게 먼저 무엇을 바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신으로부터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로부터 비롯된 봉헌은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 마음을 움직여서 혜택을 받아낼 대상이 아닙니다. 신앙은 인간이 하느님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변하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봉헌하는 것은 하느님의 시선이 그 봉헌된 것 위에 내려오게 해서, 그 시선으로 자기가 가진 것을 보고 처리하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현세적 사물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시선으로 부모와 주변을 보고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효도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쉽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형제자매가 서로 상대방의 시선으로 보는 것을 우애(友愛)라고 말하고, 부부가 서로 상대방의 시선으로 보는 것을 부부애(夫婦愛)라고 말합니다. 모두가 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실천하신 병 고침과 용서는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하느님에게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세례에서 끊어버릴 것과 믿을 것을 약속하면서 하느님에게 봉헌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이 우리 위에 내려오도록 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분의 생명을 살겠다는 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우리 위에 내려오셨다는 사실도 우리는 믿었습니다. 현세적인 우리 욕심의 시선을 접고, 하느님의 숨결을 존중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봉헌생활이라는 말은 수도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은 세례에서 봉헌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숨결로 새롭게 살도록 노력해야 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자기와 자기 주변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세상의 한 생명체로서 누릴 수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을 보면서 그분의 숨결이 이 세상에 살아있게 노력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비우고 베풀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세례로써 봉헌된 사람이면, 우리도 그 하느님의 일을 실천합니다. 우리 자신만 보는 시선과 우리 자신만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넘어, 하느님의 시선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 그분과 같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높이기보다는 비우고, 많은 것을 가지기보다는 베풀고, 이웃을 미워하고 무관심하기보다는 사랑하는 새로운 마음을 찾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교회의 오랜 관례에 따라, 오늘은 앞으로 일 년 동안 사용할 초를 축복하여 성당과 각 가정에 비치합니다. 하느님에게 봉헌된 우리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촛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당 전례 때나, 가정에서 함께 기도할 때 즐겨 촛불을 밝힙니다. 우리가 세례에서 봉헌되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빛으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비우고, 베풀고, 사랑하는 우리의 노력은 연약하지만, 하느님의 빛으로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촛불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빛입니다.”(마태 5,14).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의 일이 나타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세상을 버리고 하느님을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삽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세상에 작고 약한 빛 하나를 더 밝히는 것입니다. ◆

 

 

 

 

 

  < 봉헌하면 생명, 가지려 하면 독 >

 -전삼용신부-


 

 

 

 

 조두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원을 보았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엔 상처에 관한 내용인줄 알았는데 영화를 다 보고나서는 치유에 관한 영화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원이네 문방구, 그리고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아빠, 이들은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원이는 늦게 학교에 가게 됩니다. 문방구 앞에서 기다리다가 자존심 때문에 소원이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고 말하며 먼저 학교로 뛰어갔던 같은 반 남자친구, 바쁜 탓에 소원이 머리를 묶어줄 수 없었던 엄마, 아빠. 그리고 자신을 해치려는 못된 아저씨에게 우산을 씌워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소원이의 착한 마음. 이 모든 것들이 되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의 발단이었습니다.

소원이는 결국 그 악마 같은 사람 때문에 대장까지 파열되어 평생 옆구리에 호스를 차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살아난 것만도 기적입니다. 그러나 언론은 한 아이와 가족의 피해는 생각지도 않고 카메라를 들이밉니다. 그렇게 비싼 일인 실에 입원을 해야만 했고 가족은 마음고생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고통을 받게 됩니다. 소원이는 우산을 씌워준 것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고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세상과 담을 쌓게 됩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는 작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친구가 적금을 털어 도와주고 아이들까지 소원이를 위해 모금을 합니다. 혼자 학교로 갔던 같은 반 남자 친구는 자기가 함께 갔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후회 섞인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치유되기는 소원이의 상처는 너무도 큽니다. 특히 옆구리로 변이 새어나와서 그것을 닦기 위해 바지를 벗기려는 아빠가 그 무시무시한 범죄자처럼 느껴집니다. 아빠가 병실에 들어오면 부끄러워 이불로 얼굴을 가리고 둘이 있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아빠는 소원이가 냉장고나라 코코몽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코코몽 인형 안으로 들어가 조금씩 소원이와 친해지려 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을 좋아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점심시간에 밥도 먹지 않고 소원이만 볼 수 있는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코코몽 인형 속에서 소원이를 응원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보이면 그 무시무시한 학교 앞 길도 힘 있게 걸을 수 있습니다. 소원이는 코코몽 덕분으로 학교도 갈 수 있었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나쁜 아저씨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원이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 코코몽이 아빠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원이는 누군가가 자기를 아프게 한 만큼 그만큼 큰 사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소원이는 아빠의 희생 덕분으로 잃어버렸던 말도 되찾아 말을 하게 되고 아이들과도 이전처럼 자신의 사탕을 나누어주며 아빠에게 농담도 하는 그런 아이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면 이렇게 줄 수밖에 없습니다. 소원이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던 범죄자는 짧은 쾌락으로 자신의 온 인생을 맞바꾸었습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어야지 그것을 내 것으로 삼으려다가는 그것이 내 안에서 독이 되어 나를 죽이게 됩니다.

봉헌은 사랑하면 당연히 주어야 하는 내 자신이고 내 자신의 희생입니다. 소원이 아빠는 소원이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소원이는 그 제물을 받아들였고 다시 인형 속에 들어가 있는 아빠의 땀을 닦아주었습니다. 봉헌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향이 자신을 태워 아름다운 향기를 올려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랑한다면 자신을 소진시키고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초에 우리 조상들은 가난해지려 하지 않고 부자가 되려 했습니다. 부족함이 없었지만 금지된 것까지 가지려 했습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니 관계는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이 아담과 하와의 죄를 당신의 봉헌으로 기워 갚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당신 것이라 여기지 않고 다시 하느님께 봉헌해 드립니다. 그분이 당신의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봉헌은 우리 죄와도 직결됩니다. 죄란 마땅히 봉헌해야 할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려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라푼젤이란 디즈니 만화영화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는 불로초와 같은 꽃이 한 송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로초는 수백 년을 산 마녀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불로초를 감추어놓고 자신만 사용하여 항상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임신을 한 왕비가 큰 병에 걸렸습니다. 왕비와 아기까지 생명이 위험해지자 온 나라 사람들은 그 생명의 꽃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마녀가 감추어둔 꽃을 뿌리째 뽑아서 왕비를 낫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예쁜 공주가 태어났는데 그 공주의 머리카락은 공주가 노래 부를 때마다 금색으로 변하며 그것을 만지는 사람은 누구나 치유되고 젊음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마녀는 그 공주를 몰래 훔쳐서 자신이 살고 있는 깊은 산 속 높은 탑 위에 가두어 두고 자신만이 또다시 그 생명과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탑 위에 한 도둑이 숨어들면서부터입니다. 그 도둑은 왕궁에서 왕관을 훔쳐 달아나다가 그 탑까지 숨어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공주는 몰래 그 훔친 물건을 감추고 자신을 밖으로 내보내 주면 나중에 그 왕관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엄마라고 속여 왔던 마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주가 그 왕관을 돌려주면 그 남자는 바로 떠나버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도둑은 자신이 훔친 왕관을 버리고 목숨을 걸고 라푼젤을 참 부모님에게 돌려줍니다. 그렇게 되자 마녀는 더 이상 공주로부터 오는 생명력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애니메이션이 다 그렇듯이 왕과 왕비는 자신의 딸을 찾아준 그 도둑과 자신들의 딸을 혼인시킴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됩니다.

 

라푼젤이라는 공주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긴 했지만 결국 우리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봉헌할 줄 알면 그것이 비로소 우리 것이 되어 그것과 하나가 됩니다. 이 생명나무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나타나십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를 봉헌하시기에 그분을 되돌려 받습니다. 우리 또한 그 분을 영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들면서 주인에게 도조를 바치지 않는 못된 소작인들 때문이 주인의 외아들인 당신이 돌아가셔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봉헌하지 않고 내 것으로 가지고 있으려고 한다면 그 생명나무는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되어버립니다. 마녀가 라푼젤을 자기 혼자의 것으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왕국과의 관계단절을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소원이를 자기 것으로 취하려고 했던 어린이 성추행범이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오늘 봉헌축일은 우리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분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고 오롯이 다시 바쳐드릴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분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내 것으로 소유하려 하면 그것은 내 안에서 독으로 변하여 나를 죽이게 됩니다.

경주 최씨가 오랫동안 만석꾼 집안으로 이어져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집 가보가 돈을 똥처럼 여겨라!’라는 집안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오래 있으면 그것이 대변이 되어서 그것을 밖으로 밀어내지 않으면 똥독이 옮아 나를 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생명은 나에게 생명을 주는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봉헌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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