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3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2014. 2. 4. 오후 8:53:03

글자

20142월 3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르5,1-20)

  

"What do you want with me, Jesus,

son of the Most High God?

For God's sake I beg you, do not torment me."

He said this because Jesus had commanded,

"Come out of the man, evil spirit."

 

 

말씀의 초대

 다윗 임금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에 쫓기는 신세가 되자 그는 주님의 처분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심한다. 모든 신하에게 퇴각 지시를 내린 다윗은 울며 머리를 가린 채 맨발로 올리브 고개를 올라간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마주하시고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명령하셨다. 더러운 영들은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고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의 허락으로 그들이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자, 돼지 떼들은 비탈을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죽었다. 이 일을 보고 들은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기 고장을 떠나 주십사고 요구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주일 학교 다니던 어린 시절에 오늘 복음의 내용을 듣고서 좀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과 더러운 영들 사이의 대화의 내용도, 그 영들이 ‘군대’라고 하는 표현도 낯설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마귀들이 애꿎은 돼지들에게 들어가 호수에 빠져 죽는 모습이 너무나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사실 지금도 오늘의 복음에 묘사된 모습을 떠올려 보면, 그것을 본 사람들이 기겁하였던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이해하기 힘든 성경 말씀의 깊은 뜻을 막연하게나마 처음으로 감지한 것은,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책들을 하나하나 읽어 나가다가 『악령』이라는 소설을 만났을 때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의 머리말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돼지 떼를 호수로 몰아넣은 더러운 영들의 이야기를 골랐습니다. 그의 가장 난해한 소설로 꼽히고 또 완성도에서도 논란이 많기도 한 작품이지만 저는 여기서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인지 소설을 읽은 지 아주 오래되었지만 오늘 복음 말씀을 대하면 먼저 이 작품이 떠오릅니다.
작가가 이 성경 구절을 선택한 이유를, 머리말에 같이 싣고 있는 러시아의 대시인 푸시킨의 시구에 비추어 보면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때려죽인다고 해도 흔적이 보이지 않는군./ 길을 잘못 들었어. 이제 어떡한담./ 아무래도 악령이 우리를 들판으로 내몰아서, 사방을 헤매게 만드나 보다.”
이 소설에서 도스토옙스키는 허무주의나 무신론, 공산주의 같은 이념에 사로잡혀 진정한 삶의 방향을 상실하고 있는 당시의 젊은이들과 사회의 모습을 그려 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서로 파괴하고 자기 자신마저 죽음으로까지 내몰게 하는 혼돈 시대의 배후인 ‘악령’의 특징을 보여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이를 윤리적 감각과 타인을 제대로 사랑하는 능력을 잃은 정신적 공허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막다른 길로 질주하는 돼지 떼 같은 이 시대의 혼돈 속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시선이 향하고 우리의 귀를 기울여야 하는 곳은, 주님께서 계신 곳이어야 합니다.  

 

 

 

 

 

  

 

 희생과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선 조건이 꼭 있더군요. 일단 돈을 번 다음 또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모두 마친 다음에 희생과 나눔을 실천하며 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세상 것들을 통해 자신을 만족시킨 다음에 주님의 뜻을 실천하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뜻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들을 통해서는 ‘나’를 만족시키기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로또 복권만 당첨되면 나눔을 실천하면서 행복하게 살겠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복권에 당첨된 것입니다. 그는 3개월 동안 행복했습니다. 오랜만에 주변 사람들에게 인심도 팍팍 썼습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난 뒤,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의 돈을 탐내는 것만 같아 불안해지더랍니다. 그리고 큰 돈 같았던 당첨금이 그렇게 크지 않은 액수라는 생각도 들더랍니다.

세상의 것들은 이렇게 만족을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세상의 것들을 통한 만족만을 채우려고 애쓰고 있지요. 이 만족을 과연 채울 수 있을까요?

1960년부터 1980년까지 MBA 졸업생 1500명을 대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언제 할 것인가?”라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돈을 번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겠다.’라고 답변한 사람은 83%로 1245명이었고, ‘돈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내가 원하는 일을 하겠다. 그러면 돈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17%로 255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후 이 1500명을 다시 추적해서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101명이 15억 원 이상의 돈을 번 백만장자가 되어 있더랍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전자의 질문인 ‘돈을 번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겠다.’고 대답한 사람 중에 정말 돈을 많이 벌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1245명중 단 1명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처음부터 돈과 상관없이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한 사람은 255명중 100명이나 큰돈을 벌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먼저 실천하면 세상의 것은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세상의 것을 먼저 해야 한다고만 생각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구해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과정 안에서 금전적인 피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지요.

우리는 주님을 내 안에 과연 모시고 있나요? 혹시 세상의 것을 쫓기에 주님께 내게서 멀리 떠나 주십사고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의 것보다 먼저 내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주는 두려움  

-이승주 신부-

 

더러운 영들이 마침내 쫓겨 나가고 오랫동안 그 영들에 시달리던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되찾은 이 기적적이고 감동적인 순간에, 마을 사람들은 그 능력을
펼치신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달라’는 청을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를 모두 알아맞혔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한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입니다. 졸지에 손실을 보게 된
이천 마리의 돼지들 때문인지 자기들에게도 불똥이 튈까 봐 걱정을 해서인지
마을 사람들은 하느님의 구원을 두려워하며 거부하고 달아나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느끼며 주님의 현존과 능력을
체험했다 말할 때 대부분은 자기들이 기대하던 바, 혹은 이상적으로
여겨왔던 바가 이루어졌을 때인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그 성령의 활동이
내 생활에 원하지 않는 변화를 초래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나 손해를
유발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 앞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 원망하며 불편해하는
마음을 감추기 쉽지 않지요. 압살롬에게 쫓겨 달아나면서 사울의 친척
시므이에게서 온갖 악담과 저주를 들었을 때 다윗은 그의 머리를 베어 버리는
대신 그마저도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이려는 진정한 순명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지고 가야 할 마지막 십자가는 구원 앞에 선 두려움입니다.

 

손을 내밀어 주세요

-이명옥 수녀-


“수녀님! 침대 끝에 누가 서 있어요. 학교 가는 길에 자꾸 어떤 꼬마아이가 보여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자꾸 보인다고 하소연을 하는 젊은이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친구들은 오랫동안 외톨이로 지냈거나 본인이 감당하기 힘든 외로움을 겪곤 했습니다. 세상에 발을 딛고 살고 싶지만 스스로는 자기 세계에서 빠져나가기 어려워 누군가의 손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동네 사람들은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묶어두고 휘어잡으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자기를 보호할 옷도 안 입고, 참을 수 없어 밤낮으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면서 더러운 영의 노예로 ‘무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토록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그한테서 저는 주님이 심어둔 갈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자기 마음에 꿈틀대는 진짜 바람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는 지긋지긋하고 더럽고 힘센 마귀들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열망과 간절한 소망이 자신 안에 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생명으로 다시 거듭나고 싶다는 소망! 예수님과 맞닥뜨린 순간 가슴 밑바닥 끝까지 비추는 희망과 생명의 빛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알아보는 이 사람의 진심 어린 갈망을 보시고 가엾이 여기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힘으로 휘어잡거나 묶어두는 방법으로 치유하지 않으시고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시며 그를 더러운 영한테서 빼내주십니다. 예수님의 손을 잡고 구원에로 나가도록 끊임없이 우리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할 가엾은 이웃은 없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빛으로 어둠을

-김찬선신부-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오늘 복음은 저를 의아해하게 하는 점이 한 둘이 아닙니다.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하면서도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까지 하는 거나
악령인 주제에 감히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말한다고 하는 거나.

제게도 그런 체험이 있습니다.
제가 잠깐 본당에 있을 땐데 어느 날 미사 중
2층 성당으로부터 오는 어떤 강렬한 힘이 느껴져 올려다보니
어떤 사람이 거기서 미사를 드리며 저를 내려다보는 것이었습니다.
평일 미사에는 신자들이 모두 1층에서 미사를 드리는데
그분만 혼자서 컴컴한 2층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도 이상했고,
무엇보다도 그분의 눈빛이 보통 강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직감적으로 정신이 온전치 않거나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미사 후 신자들에게 얘기를 하니
그분은 밤 12만 되면 칼을 들고 휘둘러
가족들을 공포에 몰아넣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가정 방문을 하여 그분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며칠 안 있어서 인사이동이 되는 바람에 직접 만나 확인치는 못했지만
그 체험은 너무도 강렬해서 지금도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런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드는 생각은
그 영이 얼마나 대담하면
미사에 와서 하느님의 사제와 대결을 하나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때도 미사 드리는 내내 지지 않으려 눈으로 기 싸움을 했지만
지금도 저는 악령에 대해서는 아주 담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과연 영들의 각축장이고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더욱더 치열한 영들의 각축장입니다.
그것은 악령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자기들의 근거와 소굴로 만들려 하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하늘가기를 싫어하고 우리를 자기들 거처로 차지하려 하고,
우리가 안 되면 돼지 안에 머물지라도 이 세상을 떠나려 하지 않고,
자기가 머물던 지방도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악령들을 주님은 쫓아다니며 우리에게서 몰아내십니다.
주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시어
이 악령들과 대결을 하여 이기신 분이시지요.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면 악령은 마지막 발악을 하지만
나오라는 주님의 명령에 꼬리를 내리고 사라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인도로 악령과 대결하면 됩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악령은 고통을 미끼로 군림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인간은 두려워하면서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령을 두려워 피할 것이 아니라
직면하고 대결을 해야 하고 이겨야 합니다.

어떻게?
성령을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무장함으로써.

어둠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고
빛이 없으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둠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이 없는 겁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사라지는 것이고, 없는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한
어둠의 세력이 있을 곳은 없습니다.

 

불신이 가져온 불안감

- 이진원 신부-

 

주변에서 보는 가장 안타까운 모습은불안감속에 사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잘못하면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고, 청소년들은 성적이 떨어질까 봐 시험기간에는 주일도 거르기 일쑤다. 대학생들은 취업 걱정에 친구들과 경쟁을 하고, 취업을 한 뒤에는 세상에 뒤쳐질까 봐 불안해한다.
부모들은 자녀가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질까 봐 불안해서 아이들을 쉴새없이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돌려대고, 연인들은 서로를 잃게 될까 불안해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는다. 사람들 마음에 온통 불안감투성이다. 심한 경우 불안감으로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오늘 복음의 마을 사람들은 돼지 떼의 죽음을 보면서 예수님 때문에 무엇을 더 잃게 될까 봐 불안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나줄 것을 청한다. 마귀 들린 사람이 멀쩡해진 것보다 그에 대한 대가로 돼지 이천 마리를 잃은 것이 더 크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 마을에 계시면 벌어질 일들이 불안하다. 변화하는 것도 두렵고 예수님을 믿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불신
?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적이다. 그리고 불신은 그 사람에게불안감?을 불어넣어 그 사람을 피폐하게 한다. 하느님께 대한 불신도 우리를 세상에 얽어매는 족쇄가 되어 돌아온다. 세상을 다스리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는 만큼, 마귀 들린 사람을 낫게 하는 능력을 보고 믿는 만큼, 지금은 손해인 것 같은 그 신앙이 우리한테는 어떠한 세파도 이겨낼 수 있는 진정한 평화로 되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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