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5일 연중제4주간 (수)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2014. 2. 6. 오전 8: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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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5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마르6,1-6)
 

 

 They said, “Where did this man get all this?
What kind of wisdom has been given him?
What mighty deeds are wrought by his hands!
Is he not the carpenter, the son of Mary,
and the brother of James and Joseph and Judas and Simon?
And are not his sisters here with us?”

And they took offense at him.

 

 

 

 

 

 

 

 

말씀의 초대

 다윗은 주님께 죄가 되는 인구 조사를 한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주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다윗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내리시려는 재앙에 무척 괴로워하면서도 주님의 자비를 믿으며 겸허하게 받아들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놀라운 지혜로 가르치시자 고향 사람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 조사를 시행하는데, 성경은 이것이 하느님께 죄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벌로 온 이스라엘에는 흑사병이 창궐합니다. 현대인들이야 당연히 ‘인구 조사가 무슨 죄인가?’ 하는 의문을 갖지만 구약의 배경에서 이러한 행동은 사실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네가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를 세어 인구 조사를 실시할 때, 사람마다 자기 목숨 값으로 주님에게 속전을 바쳐야 한다.”(탈출 30,12) 하고 이르십니다. 이로써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오직 당신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그 당시의 인구 조사는 일차적으로 군사적 전략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백성을 군사 조직에 남김없이 편성하고 그렇게 조직된 군대를 자신의 힘과 소유라고 여기는 것이 그 시대 임금들의 기본적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시편에 “이들은 병거를, 저들은 기마를 믿지만, 우리는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의 이름을 부르네.”(20〔19〕,8)라는 대목이 나오듯, 성경은 이렇게 사람의 힘과 군사력에 의존하는 것은 주님을 잊는 불신앙의 표현이며 유혹에 넘어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결국 다윗은 인구 조사의 행위로 주님이 아닌 사람의 힘에 의지하는 ‘실천적인’ 불신앙의 죄를 저질렀다고 하겠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의 많은 사람이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보다는 정치적 수완을 통한 강성한 국가를 바라는 마음을 가졌기에 다윗도 이러한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전체가 그 대가를 치르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다윗은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괴로워하며 사람이 아닌 주님의 손에 나라의 운명을 맡깁니다. 그리고 고통 받는 백성을 대신해서 진심으로 자신이 벌을 받기를 청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는 자비로 변합니다. 서양 속담 중에 “하느님께서는 한쪽 문을 닫으실 때 다른 쪽 문은 열어 두신다.”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 중에 열어 놓으신 문을 보게 되는 이는, 자신의 나약함과 죄를 온전히 고백하며 오직 주님의 자비에 희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1박2일간의 동창 모임을 잘 마치고 왔음을 먼저 신고합니다. 사실 인천에서 먼 양양까지 갔지만, 그곳에서 한 것은 별 것 없습니다. 동해 바닷가를 걸어보지도 못했고, 근처의 유적지를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피부에 좋다는 온천물에 몸을 담그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너무나도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사람과 함께 했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사제’라는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창 신부들과의 자리. 어떻게 생활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동창신부들과의 모임이 편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오랫동안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20년 넘게 함께 생활했던 동창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잘 알기까지 갈등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지나고 서로를 잘 알게 되면서, 이제는 그 누구보다도 편한 사이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안다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 동창들과는 조그마한 방에 함께 누워 잠을 자도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과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을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처음 보는 낯선 사람과 그 조그마한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이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잘 모르기 때문이지요.

잘 안다는 것은 이렇게 내 자신에게도 편안함을 가져다주면서 더불어 행복이라는 것도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는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편안함과 기쁨 그리고 궁극적으로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주님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의 관점으로 주님을 이해하려 하고, 나의 관점만으로 주님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고향을 찾아가십니다. 고향의 회당에서 가르침을 전하시는데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모습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어렸을 때부터 보았던 예수님 그리고 그 친척들까지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이었습니다. 자기보다 부족한 사람이라고 보았는데,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니 좋게 볼 리가 없었겠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고향에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주님의 은총을 스스로 걷어찬 결과이지요.

우리 역시 주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편해지고, 주님을 알면 알수록 이 안에서 큰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는 게 병!     

-안융 신부-

 

전라도 땅 ‘광주’는 내가 나고 자란 그래서 내게는 어머니 품과 같은 곳입니다.
무등산 자락 눈 덮힌 서석대 바위기둥이나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는 중머리재의
억새는 그냥 그대로 나의 향수를 자극합니다.
또 소박하고 정 많은 이웃들은 사람 사는 맛을 한껏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그곳이 좋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에서 다시 살게 된다면?’이라 가정할 때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물론 그곳에서의 삶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많은 인연들에 너무도 익숙하기에 편안하겠지만
그것이 때로는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 나가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막연한 염려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자렛
을 찾으셨습니다. 그분을 가르치고 그분의 성장을 이끌어 준 곳, 젖먹이 때부터
그분을 지켜보았던 이들이 살고 있는 그곳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을 반기지도 않을 뿐더러 그분의 말씀과 이적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분이 자신들이 알고 있던 ‘목수 예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 속에는 과거를 통해 정형화된 예수만 있을 뿐 주님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일말의 여지도 없었습니다. 결국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무지無知’가 참다운 만남을
위한 걸림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만든
예수의 이미지가 우리와 주님과의 참만남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주님, 제 마음을 열어 주시고 제 이웃 안에 계시는 당신의 현존을 알아보게 하소서.

 

류해욱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고향 마을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고향 사람들이 처음에는 놀랍니다. 묵상 안에서 그분의 지혜에 탄복하고, 그분이 행하신 기적에 대해 경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삶에서 놀라고 경탄할 수 있음은 중요합니다. 깨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황동규 시인은 <수련> 이라는 시에서 “이적 앞의 놀람 또한 살아 있는 것의 속뜻이 아니겠는가.” 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그 놀람이 진정 살아 있음, 깨어 있음의 증표가 아니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곧이어 자기들의 놀람을 부정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고 맙니다. 진정 깨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정관념에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행적보다 원래의 직업, 누구의 아들, 누구누구의 형제 등의 틀 안에 집어넣고 그가 누구인지를 다 안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니 새로운 진리를 알아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은 전혀 없습니다.

참으로 깨어 있음, 살아 있음은 바로 우리가 아직 모른다는 것, 사람과 세상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열려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생각, 바로 고정관념이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리게 함을 묵상합니다.

열려 있는 마음이 없는 고향 사람들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그들한테 믿음이 없음에 놀라셨습니다. 이 대목을 묵상하며 우리에게 그런 열려 있는 마음, 진정한 믿음이 있는지 새삼 돌아봅니다.

 

하늘의 무지개는?

-김찬선신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오늘 복음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놀라고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니까 서로 놀라는 것입니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 지혜를 말씀하시는 당신을
고향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에 대해 놀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맥락에서 우리의 불신에 대해 놀라실 겁니다.

제가 강의 때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내 뜻대로 되지 않은 이유를 인간에게서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능력 부족 또는 나의 잘못으로 내 뜻대로 안 되었다고 생각하거나,
나에게 탓을 돌리고 싶지 않으면
다른 누가 잘못해서 내 뜻대로 안 되었다고 남에게 탓을 돌립니다.

그런데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내 탓, 네 탓을 따질 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있는 겁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 거기에 내 뜻이 없음은 당연하고,
내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 다른 이의 뜻대로 된 것이라 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꼭 그렇게 해야겠습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저는 다른 사람에 의해 제 뜻이 좌절되기보다
이왕이면 하느님의 뜻에 의해 좌절되고 싶습니다.
이는 다윗이 인구조사의 잘못을 하고 벌을 받게 될 때
인간에게 벌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의 벌을 받으려고 했던
그 바람과도 같지만 바람이기 이전에 믿음입니다.
내 뜻이 잘못되었기에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 좌절시키신 거라고
우리는 믿는 것이고,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믿어야 할 것은 내 뜻대로 안 된 것만이 아닙니다.
내 이해를 넘어서고,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지혜로운 말씀과 기적이
어디서 왔을까 의아해 합니다.
나자렛의 인간 예수에게서는 그것이 나왔을 리가 없다고 하면서도
그렇다고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임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믿지 않음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믿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과 똑같은 인간 예수님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에 대해
그들이 불쾌해 함을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진정 겸손한 사람은 세상에 널부러져 있는 신비를 봅니다.
진정 낮아진 사람은 하늘이 자신을 땅에까지 낮추는 것을 볼 수 있고
그에 대해 그리고 그 많은 은총에 대해 너무 감격하고 경탄할 겁니다.
이에 비해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은 오늘 예수님의 경우처럼
하늘을 깨고 하느님께서 오셔도 보지 못하고 불쾌해 할 겁니다.
그들은 하느님은 하늘에 처박아 놓고
지상의 모든 것은 다 자기 인간들이 해야 하고,
또 인간들이 한 것이어야 직성이 풀리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뜬 무지개는 하늘의 표지일까요, 아닐까요?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도입부 삼아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장면을 봅니다. 비교적 예수님 공생활의 초기인데, 다른 곳에서 사도직을 좀 펼치시다 고향 땅을 찾아가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표정이나 마음을 알아들을 수 있으면 좋겠고, 더불어 제자들과의 대화 내용이나 전반적인 분위기를 살피는 것도 유익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가셔서 가르치시는 장면을 좀더 유심히 살핍니다. 먼저 회당의 내외적 분위기를 살피고 모여 있는 사람들 모습도 잘 봅니다.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누며 분위기는 어떤지 보세요.

특별한 사건이 전개되고 있는 것은 아닌 만큼 그저 예수님 모습과 사람들 모습을 대비시켜 가며 보고 있노라면 뭔가 전달되어 올 것입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이 세상을 대하는 모습도 삐져나오고 자신의 모습도 비춰 나올지 모릅니다.

이런 모든 관상을 할 때 선입견을 가지고 들어가지 말았으면 합니다. 성경을 대할 때 자기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 그저 들은 이야기나 읽은 이야기에 의해 해석된 것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가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눈을 가지고 잘 보기만 하면 분명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얻고 그를 통해 성장이 이뤄질 터이기 때문입니다.

유심히 살피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기도가 아직 충분히 익지 않았을 땐 유심히 살피려고 해도 잘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꾸준히 해나가다 보면 눈썰미도 점점 날카로워져 세밀한 부분까지 짚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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