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4일 연중 제4주간 화요일

2014. 2. 4. 오후 8:55:39

글자

201424연중 제4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마르코 . 5,21-43)

 

He said to her,

“Daughter, your faith has saved you.
Go in peace

and be cured of your affliction.”

 

 

 

 

말씀의 초대

 도주하던 압살롬은 머리카락이 나무에 휘감겨 매달리고, 요압 장군은 다윗의 뜻과는 달리 압살롬을 죽인다. 압살롬을 애타게 기다리던 다윗은 그가 죽었다는 전갈에 깊은 충격을 받고 목 놓아 운다(제1독서).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와서 병으로 죽어 가는 딸을 살려 주십사고 청한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인이 진심 어린 마음으로 치유를 믿으며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 병이 낫는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지만 소녀에게 가시어 그녀를 일으키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제와 오늘의 제1독서는 다윗의 비참한 신세를 고스란히 보여 줍니다. 반란을 일으킨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 ‘울며 머리를 가린 채 맨발로 올리브 고개를 올라가는’(어제 제1독서 참조) 다윗의 모습은 깊은 연민을 자아내게 합니다. 그리고 그 배은망덕한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며 목 놓아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다윗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인간 운명의 가혹함에 할 말을 잊습니다.
다윗의 이야기처럼 몰락한 임금의 모습에 관하여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 가운데 하나는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비극 『리어 왕』입니다. 두 딸에게 배신당한 채 더 이상 자신이 놓인 상황을 마주할 도리가 없어, 마침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지’ 반문하며 광기로 도피하는 비극적 인물 리어 왕의 모습은 우리를 압도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다윗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차분히 읽어 보면, 그의 고난은 단지 역사 안에서 수없이 반복된, 권력의 정점에서 몰락한 통치권자들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아니며, 또한 셰익스피어가 『리어 왕』에서 보여 준 것처럼 문학적으로 탁월하게 그려 낸 비극적 영웅의 초상도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그 대신 우리는 인간의 죄악과 권력의 덧없음이 불러온 절망과 허무의 바람이 이는 곳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신앙인이 직면하는 인생의 진실은, 죄와 불운이 가득하다 하더라도 언제나 구원의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제 독서에서 보듯, 다윗이 주님의 처분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은 체념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삶은 자기 혼자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품속에 있는 보잘것없는 죄인임을 깨달은 신앙인의 삶은 결코 허무로 끝나는 비극의 주인공과 같지 않습니다. 실패와 고난 속에서도 구원을 바라볼 수 있는 순례자의 길과 같습니다.

비밀 아닌 비밀     

-이승주 신부-

 

몸의 원래 모습을 찾기 위해 큰맘 먹고 체계적으로 운동을 하다 보니
사람의 몸에 세세하고 신비로운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근육과 관절, 신경, 혈관 하나하나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일정한
원리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몸이 이러할진데 마음은 얼마나 섬세하고 정교할 것이며 그 영혼은
어떻겠습니까. 우리 안에는 많은 비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비밀인 것은
감춰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두 해 동
안 숱한 고생을 하며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붓고도 효험이 없이 상태만 더 나빠지
던 여인은 끝까지 알고자 하는 뜻을 멈추지 않았기에 마침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힘을 스스로 꺼내 얻을 수 있었습니다. 회당장의 딸이 이미 죽었다고
예의바른 포기를 종용하며 비웃던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내쫓기고, 끝까지 알고
자 하는 세 제자와 부모만 남아 비밀의 문을 열어 보게 됩니다. 이 일들은 다시
비밀에 붙여지고 이 비밀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때까지 비밀로 남게
됩니다. 기적은 비밀이 밝혀지는 것이고 그 비밀은 주님께서 이미 마련해 주신 것이기에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비밀 아닌 비밀입니다.
알기 위해 멈추고, 알고자 함을 멈추지 마십시오.

 

 

구원을 보고 들은 사람들

-이명옥 수녀-


어제 예수님께서는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가셔서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는데 오늘은 ‘배를 타시고 다시 건너편’으로 되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참 많은 사람을 만나십니다. 되돌아오신 그분을 맞이하던 많은 군중,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 제자들, 죽음에서 일으켜진 열두 살 소녀, 회당장 야이로, 그의 부인, 회당장 집에서 소란하게 울던 사람들. 이들의 공통점은 오늘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눈으로 보았다는 점입니다.

오직 믿는 마음으로 그분 옷자락의 술을 만지고 구원된 여자는 자신 안에서 직접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군중과 제자들은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죽은 열두 살 소녀를 생명으로 데려오셨습니다. 아이의 부모와 그의 집에서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던 사람들도 다시 살아난 소녀를 보고 몹시 놀라 넋을 잃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구원을 이렇듯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이 구원되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여인한테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소녀의 아버지한테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고 하시며 믿음을 지니라고 당부하십니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참된 생명이신 예수님을 성사를 통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받아 먹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고백하는 몫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집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딸아,

-김찬선신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하혈하는 이방 여인의 치유 얘깁니다.
이 여인은 참으로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하혈하는 병을 오랫동안 앓은 것도 불쌍하고,
그 병을 고치느라 가진 것을 죄다 잃은 것도 불쌍하지만
병을 앓으면서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아무 위로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
무엇보다도 그녀의 불쌍함이었습니다.

당시 여자가 하혈하는 것은 부정함의 표시였으니
그 병을 내놓고 얘기할 수도
하소연 할 수도
고쳐달라고 떼를 쓸 수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투정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위로받을 수 있는 병이 아니라 창피한 병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소녀의 아버지는 공개적으로 살려달라고 하는데
이 여인은 예수님께도 고쳐달라고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여인은 그런 연유로 살그머니 예수님께 다가와 옷에 손만 댑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힘이 나와 그 여인에게 들어갑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그 지긋지긋하고 수치스런 병은 치유됩니다.

너무도 감동적입니다.

우선 여인의 그 겸손함과 믿음이 감동적입니다.
옷깃만 닿아도 치유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낮춰질 대로 낮춰진 여인의 겸손에서만 가능합니다.
믿음은 겸손의 열매이고
겸손할수록 믿음이 커지고
겸손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그 따스함이 감동적입니다.
당시는 하혈하는 여인과 접촉을 하게 되면 부정을 탄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접촉을 알아채신 걸 알고 예수님께서 화를 내실까봐
여인은 두려워 떨었던 거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으시고,
오히려 믿음을 칭찬하시고,
크나큰 격려를 하시며,
병을 치유해주십니다.
육신이 건강해질 뿐 아니라
마음도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안히 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때 평안히 가라는 말씀은 더 정확히 번역하면
“평화로 가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평화로울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평화가 되라는 격려입니다.

저는 고백성사를 줄 때 야단칠 때도 있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는 고백의 내용이 좀 시덥지 않아도
좀체 야단치지 않고 칭찬을 하고 격려를 합니다.
고백소에 들어오는 그 용기가 칭찬받아 마땅하고
잘 고백할 줄 몰라도 마음만으로도 훌륭하지요.
실상 꼼꼼히 죄를 다 고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뉘우치는 마음과 새롭게 살아가려는 마음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님과 여인 사이의 그 인격적인 관계가
감동적이고 아름답습니다.
이제는 치유자와 병자의 관계도 아니고,
한 남자와 이방인 여자의 어색한 관계도 아니고
부성적 사랑이 물씬한 아버지와 딸의 관계입니다.

주님께서 “딸아”라고 부르시는 거기에
사랑이 물씬 느껴지지 않습니까?
저는 “아들아”하는 소리를
자매님들은 “딸아”하는 주님의 부르심을 오늘 듣도록 하십시다.

 

 

주변을 보면 사업하시는 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들이 사업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어떤 이익을 기대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설혹 지금 당장은 손해를 볼 지라도 나중의 흑자를 예상하면서 시작하는 것이 사업이지요. 만약 흑자가 아닌 적자만 계속 보게 된다면 그 사업의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이 있습니다. 바로 인생 사업입니다. 그리고 이 인생 사업에서도 성공을, 즉 흑자를 내는 것이 정상적인 삶이겠지요.

인생 사업에서 흑자를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마도 행복한 시간이 불행한 시간보다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편안, 즐거움, 보람 등의 시간이 불안, 괴로움, 허무함 등의 시간보다 더 많을 때 흑자를 보는 인생,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나의 인생에서 흑자를 보면서 살고 있을까요? 사업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흑자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인생 사업에서는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쉽게 포기하고 쉽게 좌절하는 경우가 왜 그렇게도 많은지요? 그 이유는 사랑으로서 다가오시는 주님을 굳게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떠올려집니다.

어떤 남자가 야간 산행을 하다가 그만 절벽에서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구사일생으로 떨어지면서 어떤 돌부리를 붙잡게 되지요.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그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돌부리를 놓게 되면 절벽 아래로 추락할 것이고, 그렇다고 계속해서 돌부리를 잡고만 있을 수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하느님께 제발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지요.

“손을 놓아라. 살려거든 지금 네 손에 움켜쥐고 있는 그 돌부리를 놓으란 말이다.”

이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손을 놓으면 떨어져 죽을 테니까요. 그래서 그는 말씀을 무시하고 꾹 참았습니다. 해가 떠오르면 지나가는 사람이 자기를 구해줄 것을 믿으면서 말이지요. 해가 뜨고 살려달라는 말을 들은 어떤 등산객이 이 남자에게 말합니다.

“그 손을 놓으세요!”

하느님과 똑같은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발아래를 볼 수 있었지요. 자신이 낭떠러지라고 생각했던 그곳, 자신의 발 30Cm밑에는 평지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터운 믿음으로 과감하게 손을 놓을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있으며, 자신의 인생에서 흑자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지요. 야이로의 딸과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 모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랐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치유의 은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야이로의 딸은 인간적인 판단으로 분명히 죽었고, 그리고 자그마치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 역시 의사들로부터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 믿기만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우리 인생의 커다란 성공을 가져오게 하니까요.
은혜를 감사로 받는 사람은 그 빚의 1회 분을 갚는 셈이다(세네카). 

 

 

 

그분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끝까지 견디어 내며 나아가 봅시다.

-김기현신부-

 

 어린 왕자로 유명한 생텍쥐베리의 친구 중에 기요메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친구가 다음과

같은 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기요메는 우편 행낭을 전달하기 위하여 한 겨울에 남미의 안데스 산맥 위를 횡단하던 중,

하강 기류에 휩쓸려 깊은 산중에 비상 착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살아남기 위해 해발

4,500미터가 넘는 고지대에서 영하 40도의 혹한을 견디며 끊임없이 걸어야만 했습니다. 어

느 누구도 한겨울에 안데스 산맥으로 그를 구조하러 올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요메는

피로와 굶주림, 뼈를 에는 추위와 동상 등과 싸우면서 며칠간 계속 걸어갔지만, 탈진 상태가

되어 끝내 쓰러지고 맙니다. 그는 완전히 지쳐 버렸고 이제 잠의 유혹 속으로 빠져 들기 직전

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잠은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휴식을 선사할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

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감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 눈 덮인 비탈에 쓰러져 있던 기요메는 바로 50미터

앞에 큰 바위가 하나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는 생각합니다. 만일 자신이 여기에서 죽

는다면 그 시체는 겨울철의 잦은 눈사태에 휩쓸려 계곡 깊숙이 빠져 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시신이 언제 발견될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그러면 자신은 실종자로 처리되어

법률상의 사망 처리는 4년 후로 연기 될 것임을 상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50미터만 더

걸어가서 앞에 있는 그 큰 바위 위에서 죽는다면 자신의 시체는 봄이 되면 곧 발견되어, 사랑

하는 아내가 자신의 명의로 된 보험금을 즉시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칩니

다. 그러자 그는 주저 없이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일어선 그는 그 바위마저

도 지나 이틀 밤과 사흘 낮을 계속 걸어간 끝에 결국 구조되기에 이릅니다.】


이야기에서 보는 것처럼 기요메라는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 때문이었고, 그 사랑과 책임감이 그를 살리는 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와 마찬가

지로 우리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 때문에 고통을 견디어 내고 영광스럽게 되신 분이 계신데

요. 오늘 독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

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을 얻어 누리기를 바라시며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

혀 돌아가셨습니다. 그 희생과 사랑이 우리에게는 생명을 가져다주었고, 그분 자신에게는 하

느님의 오른쪽에 앉게 되는 영광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가족과 공동체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견

디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생활을 하다보면 부부관계에서 오는 어려움 때문에 부부관계

를 끝장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또 속을 썩이는 자녀를 보며 ‘니 멋대로 살

아라..’ 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또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하다보면 갈

등을 겪기도 하고,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고, 재정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며 ‘다 그만두고 마음

편하게 지내자..’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포기하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

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견디어 내고 이겨낸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공동체

안에는 사랑과 기쁨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나’는 주님이 주시는 상과 위로를 받아 누릴 수

있겠죠.


오늘 하루, 그분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끝까지 성실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우리 본당은 미사 3시간 전에

보일러를 켜 놓아야 따뜻해진다.

그 일을 내가 해야 하는데 세 번이나 깜박해서

신자분들이 추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그래도 덜덜 떨 정도는 아니었는데,

얼마 뒤에 만난 동기 신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친구는 미사를 봉헌하다가 덜덜 떨었다고 한다.

왜 그런가 했더니, 난방을 하는 할머님이

에어컨을 켜 놓았다고 한다.  

 

 

 

 

주님을 만질 만한 거리     

-남상근 신부-

 

열두 해쯤 앓았는데도 차도가 보이지 않으면 불치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칠 수 없다는 것이죠. 더 갈 데가 없습니다. 막다른 골목입니다.
그러나 하혈병을 앓던 여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손만 대도
구원이 내리리라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 열두 살짜리 아이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습니다. 달리 방도가 없는 것이죠.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잠자는 것일 뿐이라고, 다시 일어날 거라고 여깁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고, 예수님은 소녀의 손을 잡았습니다.
주님을 만져도 기적이 일어나고, 주님이 만지셔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누구든 한쪽이 포기하지 않으면, 넋이 나갈 만한 일이 일어납니다.
피가 멎습니다. 죽은 이가 깨어납니다.
그러니 관건은, 아직 할 만한가 아니면 이미 끝장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적어도 주님을 만질 만한 그런 거리라고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해 주실 것이 있습니다.
손 닿을 거리에 있으면 주님은 해결해 주십니다.

 

  

죽음을 넘어선 믿음

- 신희준 신부-

 

오늘 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왜 그들만 새로운 생명을 얻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을까요??
일단 두 사람을 살펴보면 그 사이에 이렇다 할 공통점은 없어 보입니다. 한 사람은 열두 해나 하혈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중년 내지 노년의 여인일 테고, 다른 한 사람은 아마도 십대의 어린 소녀였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먼 곳에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온 이방인일 테고, 다른 한 사람은 그곳 지방 출신이지만 이미 숨을 거두고 죽어 있습니다.
한 가지 공통점이라면, 두 사람 다 막다른 골목에 당도해 있다는 점입니다. 몇 년 동안 의사란 의사는 다 찾아봤기 때문에 이제는 돈도 사람도 없는 처지의 중년 여인이나, 이미 숨을 거둔 어린 소녀나,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인간적 희망은 어디에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혈병에서 나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끈을 여인은 놓지 않았습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죽음을 이겨내고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끈을 소녀의 부모는 놓지 않았습니다. 열두 해의 긴 고통과 죽음이라는 큰 절망을 맛본 후에야 여인과 소녀는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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