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9일 연중 제5주일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오.5,13-16)
Your light must shine before others,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glorify your heavenly Father.
말씀의 초대
참된 단식은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오갈 데 없는 떠돌이를 받아 주고, 헐벗은 이를 덮어 주며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이스라엘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며 상처가 아물리라(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의 신자들에게 자신의 지혜와 언변으로 그들을 설득하려 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그의 복음 선포는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고, 신자들의 믿음이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소금은 제맛을 잃으면 버려질 것이며,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추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의 착한 행실이 사람들을 비추어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해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아주 오래전에 일본의 작가 미쓰하라 유리의 『길』이라는 시집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짧고 쉬운 시들이 아름답고 뜻이 깊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권 사 두고 보좌 신부로서 사목지에서 만나는 청소년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간 절판되어 더 구할 수 없어서 아쉬웠는데, 최근 한 신자에게서 이 책을 선물받고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이 시집에는 ‘길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맨 처음 길을 걸은 사람 훌륭해/ 험한 길 처음으로 걸은 사람/ 이름을 외울 가치가 있을 만큼 훌륭해/ 그 오롯한 자세/ 정말 아름다워/ 허나 그 뒤이어/ 이름 따위 안 남을 줄 알면서도/ 꾸준히 길을 밟아 다지며 걸어간 이들의/ 소박한 걸음/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니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복음의 요구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자신과 가정을 돌보기에도 벅찬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가르침이 가슴 깊이 와 닿을 수 없는 이상일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위의 짧은 시가 노래하듯, 주님의 뜻을 실행하는 삶은 누구에게나 자기 나름의 처지에서 가능합니다. 어떤 이가 먼저 길을 내는 몫을 맡았다면 다른 이는 그 길을 걸어가고 따라가 줌으로써 그 길을 넓히고 다지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실 일들, 우리를 통해 하실 일들에 미리 제한을 두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도록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에 신뢰하고 감사하며 응답하는 것이 참행복의 길일 것입니다.
빛과 소금이 되려면
-조재형 신부-
어릴 때 선생님들께서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보시곤 했습니다. 그러면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유관순 누나 등을 말하곤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존경받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았으면 합니다.
존경받는 사람의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로는 그 사람의 직책이 있습니다.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그 직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그러한 직책이 일정한 부와 명예를 보장해주기도 합니다.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판사, 의사… 등이 있겠습니다.
둘째는 한 분야에서 오랜 정진 끝에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운동 분야에 이런 사람들이 있고, 학문을 연마하는 사람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으며, 요즘에는 예술과 컴퓨터 분야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 그러면서 일정한 경지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기도 합니다.
셋째로는 특정한 직책에 있지는 않고, 그렇다고 한 분야에서 입신의 경지에 이르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게 이런 사람들은 청렴하며, 희생과 봉사 정신이 뛰어나고, 남에 대한 배려가 크며,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은 겉으로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향기가 은은하면서도 멀리 퍼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분들 때문에 때로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지을 수 있으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조건에서 존경을 받아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신앙인들이 자신의 직분과 직책 때문에 존경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신앙인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경지에 이르러 존경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세 번째 이유로 존경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2000년 역사를 지닌 교회는 오늘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합니다. 그 빛과 소금은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들어간 교회의 건물 때문에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향기를 이웃에게 전하는 그런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그 이름값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희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참으로 아름다운 말입니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덕담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초는 자신의 것을 다 태워서 빛을 비추어 줍니다. 소금은 모든 것을 주고 녹아야 맛을 냅니다.' 빛과 소금처럼 모든 것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내어주신 그리스도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삶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지방자치 단체장을 뽑는 선거가 있습니다. 여당과 야당은 선거를 준비하면서 국민들에게 새로운 공약을 준비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발전과 성장의 그늘에 가려서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의료, 교육, 육아, 주택'과 같은 부분에서 국민들을 위한 복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선택적 복지이든 보편적 복지이든 우리 사회가 발전과 성장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은 선진 국가를 향한 발걸음을 시작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는 더더욱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합니다. 각 지역에 있는 본당과 교회 시설들은 세상의 등대가 돼야 합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사랑의 빛을, 희망의 빛을, 믿음의 빛을 밝혀줘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등대지기가 돼야 합니다. 그 삶이 비록 외롭고 고단할지라도 우리는 기꺼이 소금이 되어 모든 것을 내주었던 제2의 이태석 신부가 돼야 합니다. 제2의 마더 데레사가 돼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복지, 희생이 없는 복지, 십자가 없는 복지는 포장은 예쁠지라도 알맹이가 없기 마련입니다. 구호는 멋질지라도 공허한 메아리가 되기 마련입니다.
어두울수록 빛나는 작은 빛
-김인식신부-
신학생 시절, 산청으로 신앙학교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저녁이 되고 하루 일정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잠시 산책을 했습니다. 외진 곳이라 주위에 어떤 불빛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반딧불이를 보았습니다. 캄캄한 어둠속이었기에 반딧불이의 작은 초록색 불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참을 그 불빛을 보며 서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불빛에서 점점
그 빛이 비치는 주위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빛은 주변이 얼마나 어두운가에 따라서 그 밝기가 결정됩니다. 빛이 밝은 곳에서 작은 불빛은
밝아 보이지 않지만, 빛이 없거나 많지 않은 곳에서는 작은 빛이라도 밝게 보입니다. 그래서 어
두울수록 빛은 더 밝아 보이고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어둠이 작은 빛을 삼키는 듯 느껴지는
공간에서도 빛은 그 고유의 모습을 잃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강해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작은 것, 적은 것, 낮은 것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큰 것, 많은 것, 높을 것을
향한 길을 걸어갑니다. 그렇게 커지고 많아지고 높아지는 것이 나의 삶을 밝혀 준다고 생각합
니다. 사실 세상은 그러합니다. 경제적인 여유를 찾으려 하고, 부와 권력과 명예가 가져다주
는 기쁨을 찾습니다. 그 기쁨이 밝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큰 나무 아래 더 큰 그늘이 만들어지는 만큼 양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세상의 방법
은 더 큰 불평등과 어둠을 만들어 냅니다. 커지기 위해 남이 작아져야 하고, 많아지기 위해 남
의 것을 빼앗아야 하고, 높아지려고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합니다. 그래서 작고 적고 낮은 사람
들은 점점 더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빛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우리 신앙인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달라야 합
니다. 마치 거대한 어둠이 우리의 빛을 삼키려는 듯 느껴질 때도 빛으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빛은 더욱 빛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둠에 맞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분이 우리 교회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오늘 우리에게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서공석신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 맛을 잃는다.’는 동사는 그리스어원문에 ‘어리석어진다.’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서에 같은 동사를 찾아보면, 실천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26)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인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인은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여 삶이 제 맛을 내게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도 말했습니다. 빛은 어둠을 밝힙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 세상을 밝히는 빛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제자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실천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소금과 빛, 이 두 개의 단어로 복음서는 신앙인이 세상에서 할 역할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소금은 자기 스스로를 지키지 않고, 용해되어 음식의 맛을 바꾸어 놓습니다. 빛은 자기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고, 스스로를 불태워 주변의 어둠을 쫓아내고, 보이지 않던 현실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신앙인을 소금과 빛에 비유한 오늘 복음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소모하여,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실천을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서의 ‘행복 선언’에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이 소금과 빛으로 있기 위해 요구되는 실천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 행복 선언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선언은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목말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선언이 의미하는 바를 실천하는 사람이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행복선언들은 지켜야 할 계명도 아니고, 수양해야 할 덕목(德目)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언자적 선언이며 권고입니다. 신앙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일하시게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자유롭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무시하고 무엇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같은 계명을 지키고, 같은 덕목을 수련하여 획일적으로 살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피조물과 다양한 생명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하신 일입니다. 획일성을 강요하면, 인간 생명은 위축되고 창의력도 말살됩니다.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유롭게 또 다양하게 살 것을 원하셔서 자유로운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 위에 군림하지 않고, 숨어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가 자유로운 실천으로 소금과 빛이 되어 은혜롭게 살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자유롭게 사셨습니다. 그분은 주어진 각본대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유대교가 요구하던 계명 준수에 얽매여 살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당신의 창의력으로 다양하게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만나면, 병고를 덜어주고, 죄인이라 낙인찍힌 이를 만나면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율법을 못 지켜, 혹은 직업이 세리라 소외당한 이들을 만나면, 그분은 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기쁨이고 해방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당부하신 말씀도 기쁜 소식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며 죄를 용서해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실천하신 바를 제자들도 실천하여 사람들을 살맛나게 하는 소금이 되고, 사람들이 진실을 보게 하는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는 먼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재물을 자기 삶의 보람으로 삼지 못 하는 사람입니다. 재물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지만, 그것을 많이 가지겠다는 마음은 강박관념이 되어 사람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그런 욕심에 사로잡히면, 재물을 마치 인생의 목적인 양 그것을 위해 삽니다. 복음은 그런 욕심의 강박관념에서 해방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복음서는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에 고통과 슬픔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신앙인은 그런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겪는 아픔을 함께 겪으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복음서는 또한 온유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무슨 일에든, 자기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이웃의 생각을 알아듣기 위해 온유하게 경청하고, 이웃과 더불어 하느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복음서는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인생이기에 신앙인은 자기도 이웃에게 베푸는 노력을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의로움은 하느님이 베푸셨기에 우리도 베푸는 데에 있습니다. 복음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욕심 없는 사람입니다.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은 자기를 기준으로 사람들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신앙인은 자기를 기준으로 주변을 보지 않습니다.
잘 먹고 잘 살며, 자기 품위를 유지할 수 있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한 몸 편하게 살 수 있어서 사람의 도리를 다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웃보다 더 강하고 더 높아서 성공한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함께 계신 하느님이 자기의 삶 안에 살아 계시게 사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소금과 같이 스스로를 긍정하지 않고 내어주어서,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섬김을 세상이 맛보게 합니다. 신앙인은 빛과 같이 자신을 소모하여, 욕심의 어둠을 사라지게 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보게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께 기도하여 자기의 소원을 성취하려 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자유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에게서 참다운 자유를 배워 새롭게 실천합니다. 우리의 실천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혹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사랑과 보살핌과 용서가 사람들의 삶의 맛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과 보살핌과 용서가 우리로 하여금 이웃을 보게 하는 새로운 빛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소금과 빛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행복선언에 뒤이어 예수님은 설교를 듣는 이들이 지녀야 할 태도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길거리에 내던져져 사람들의 발에 차이는 한심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원래 소금은 맛이 변하지 않는 식품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맛을 잃다니…? 예로부터 이스라엘에서는 움막 형태의 화덕을 만들고, 내벽에 소금을 입혀 복사열을 사용해 빵을 구워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지나 내벽의 소금을 벗겨내면 짠맛이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실생활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다인에게 ‘산 위의 도시’란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산성(山城)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바꾸어보면 ‘산 위의 도시’란 사람들의 눈에 쉽게 노출된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도 실생활을 반영합니다. 유다인의 가옥은 창문이 아주 작아 무척 답답했습니다. 사막 지대에서 모래와 먼지를 막으려면 당연한 조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등불을 끌 때는 바닥에 내려놓고 됫박을 덮었는데, 이는 안 그래도 답답한 방안에 그을음까지 들어차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등불을 막 켰다면 반드시 ‘등경 위에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같이 당시의 실생활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로써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친밀하게 비추어보고 교훈 삼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자, 산 위의 도시이자, 등경이다”라는 말씀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자세, 혹은 교회의 역할을 암시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둠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에게는 언제나 빛으로 삼아야 할 모델이 필요한데, 바로 그리스도인이 그런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1고린 2,1-5에서 바오로는 자기가 고린토 교회를 방문했을 때 가졌던 마음자세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은 오직 하느님의 성령과 능력을 드러내려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고린토 교우들의 믿음도 자신과 같아야 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는 ‘유식한 말’이나 ‘인간의 지혜’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인 이사 58,7-10에 보면 “너의 빛이 어둠에 떠올라 너의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오리라”(10절)가 나옵니다. “세상의 빛이 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시적 감흥까지 듬뿍 배어 나오는 구절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지중해 세계에는 이른바 유토피아 사상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비단 플라톤 외에도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등이 있었고, 유다 땅에서는 에세네파의 쿰란 수도원이 유토피아를 추구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는 수도회들이 유토피아, 즉 신앙인들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공동체를 지향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크고 작은 수도회들을 보면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얻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수도회에 제한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전체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 곧 세상이 보고 따라야 하는 대조사회(對照社會)여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향한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 역시 세상의 빛이어야 합니다. 만일 그 역할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포기한 셈이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어둠이다.” 예수님의 불호령! 생각만 해도 추워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