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0일 월요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스콜라스티카 성녀는 480년 무렵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성인이 세워 그녀에게 맡긴 여자 수도원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성녀는 베네딕토 성인과의 영적 담화를 통하여 수도 생활에 대한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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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코 6,53-56)
Whatever villages or towns or countryside he entered,
they laid the sick in the marketplaces
and begged him that they might touch
only the tassel on his cloak;
and as many as touched it were healed.
말씀의 초대
솔로몬은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들을 소집하고 주님의 궤를 모신다. 그 궤 안에는 모세가 넣어 둔 두 개의 돌 판이 들어 있었다.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에 가득 찼고, 솔로몬은 주님께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웅장한 집을 지었다.’고 고백한다(제1독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지방으로 갔지만 거기서도 수많은 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온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라도 손이 닿기를 청했으며, 실제로 손을 댄 이들은 모두 치유되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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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은 스콜라스티카 성녀의 축일입니다. 수도 생활의 초석을 놓은 성 베네딕토 아빠스(대수도원장)의 누이동생인 성녀 역시 고귀한 봉헌의 삶을 살았습니다. 성녀가 남긴 일화 중 특히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은 오빠 베네딕토 성인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이미 수도원을 세워 수도 생활을 하던 베네딕토는 일 년에 한 차례 정도 방문하는 스콜라스티카를 수도원 동료들과 함께 수도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만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한번은 스콜라스티카가 오라버니에게 조금 더 함께 머물며 대화하자고 청했지만 베네딕토는 수도원 규칙에 어긋난다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때 성녀가 하느님께 기도드리자 갑자기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비가 밤새도록 퍼부었습니다. 베네딕토와 그의 동료들은 어쩔 수 없이 수도원에 돌아가지 못한 채 스콜라스티카와 밤을 지새우며 영적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성녀를 ‘편드신’ 이 일화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그의 『대화집』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누이동생이 오빠보다 더 강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요한 성인의 말씀대로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스콜라스티카가 선종하였을 때 베네딕토는 여동생의 유해를 자신을 위해 준비해 놓은 묘지에 안장하였는데, 이로써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말하듯, “한마음이 되어 하느님 안에서 일치되었던 이들 오누이는 그 육신도 함께 묻히게”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의 깊은 형제애와 영적 친교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고 미소 짓게 합니다. 사람 사이의, 혈육의 정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통해 얼마나 더 아름답고 온전해지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 모두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성녀의 삶을 요약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진리를 마음속 깊이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한 마을에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현자와 부자이지만 어리석은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부자가 지혜로운 현자를 사냥에 초대했지요. 그리고 사냥터까지 가는데 부자는 빠른 말을 타고 가고, 현자는 아주 느린 말을 타고 가도록 내주었습니다.
말을 타고 가는데 갑자기 소나기 쏟아지는 것입니다. 부자는 말을 빨리 몰았지만 대피소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비로 인해 흠뻑 젖고 말았지요. 그런데 느린 말을 타고 온 현자는 비를 하나도 맞지 않은 것입니다. 부자는 이 모습을 보고서 무척 화가 났습니다.
다음 날, 부자는 다시 한 번 지혜로운 현자를 사냥에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제와는 반대로 자신은 느린 말을 타고, 현자에게는 빠른 말을 주었지요. 다시 어제와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부자는 말이 너무 느려서 어제보다도 더 많이 비를 맞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현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비를 하나도 맞지 않은 것입니다. 부자는 화가 나서 이렇게 물었지요.
“어제 분명히 이 느림보를 타고 가서 비에 젖지 않았잖아요?”
이에 지혜로운 현자는 이렇게 답변했답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쏟아지는 비에 대처할 줄 아는 것이 지혜지요.”
사실 현자는 느린 말을 탔을 때, 소나기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얼른 옷을 벗어 깔고 앉아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소나기가 지나가자 다시 옷을 입었던 것입니다. 한편 빠른 말을 타고 갔을 때에는 소나기가 도착하기 전에 빨리 말을 몰아 비를 맞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부자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며 불평불만을 던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상황을 지혜롭게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혜로운 현자는 어떤 상황이 와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 상황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 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지혜로운 현자의 모습보다는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혜롭게 현 상황을 헤쳐 나가기보다는, 어리석게 불평불만만을 던질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그래서 더욱 더 주님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어리석고 나약한 우리들의 부족함을 주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충분히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달라고 청했지요. 그래서 특별한 기도를 해달라고, 또한 특별한 관심으로 자신을 만져달라고 청한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자기들이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때문이라고 불평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합니다. 바로 주님만이 구원을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믿음으로 실제로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평불만대신 주님 안에서 지혜롭게 현 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행위, 구원의 길
-안융 신부-
제2차 세계대전 중 원폭투하로 수십만 명이 사망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나가사키. 그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나가사키 언덕에서는 약 4세기 전에
예수회 회원인 바오로 미키 수사를 비롯한 26명의 순교자들이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오직 하느님을 믿으며 그리스도교 교리를 가르쳤다는
이유만으로 25명의 동료들과 함께 박해를 당한 바오로 미키의 거룩한 최후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마지막 설교를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나는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의 길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이 길이 나의 원수들과
내게 폭력을 가한 모든 이들을 용서하라고 나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천황을 용서하고 나에게 사형을 집행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라고 간청하는 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배에서 내리는 예수님의 일행을 알아본 사람들이 많은
병자들을 데려와 구원을 받게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믿은 사람들로 인하여 구원의 구체적인 결실이 맺어집니다. 바오로 미키를
비롯한 순교자들 역시 주 예수님을 알고, 믿었으며, 그분만이 자신들의 삶과
죽음의 의미임을 분명히 알았기에 기꺼이 순교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순교를 통한 그들의 신앙 증거가 오늘날 일본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주님이 우리 삶의 모든 것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복되다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begging him to let them touch even the fringe of his cloak"
영어로 읽으니 청하는 간절함이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우리 번역에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달라고 청하였다고 하는데
그저 청하는 것보다는 간청, 곧 간절히 청하였다 함이 좋을 듯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간청하는 사람이 행복치 않음은 말할 필요도 없고,
비참하고 불행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보면 간청을 하는 사람은 주님께
찬미와 흠숭을 드리는 사람 못잖게 훌륭하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왜냐면 찬미와 흠숭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도라면
간청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나게 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간청하는 존재이고
하느님은 우리의 간청을 들어주시는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임이
이 간청하는 기도에서 잘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느님은 어떤 것을 더 좋아하실까요?
당신의 영광이 더 드러나기를 바라실까요,
아니면 당신의 사랑이 더 드러나기를 바라실까요?
여러분이 부모라면 자신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식에게 영광스런 부모가 되기를 더 바라십니까,
사랑과 자비의 부모가 되기를 더 바라십니까?
재산과 권력을 많이 가진 부모가 되기를 더 바라십니까,
재산과 권력은 없지만 자식을 많이 사랑한 부모가 되길 더 바라십니까?
사랑이 전혀 없는 부모라면 모를까,
사랑이 조금이라도 있는 부모라면
자식에게 재산과 권력을 뽐낼 부모 아무도 없고
그저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고
사랑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랄 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한 기도는 하느님을 가장 하느님답게 하고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일 겁니다.
간절한 기도는 또한 기도하는 사람을 복되게 합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처지는 안타까운 처지임에 틀림이 없지만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허위가 없이 진실하고,
허영이 없이 겸손하며,
갈림이 없이 오롯하고,
거짓이 없이 순수하며,
진실하고 겸손하며, 오롯하고 순수한 사랑만이 그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절한 기도가 필요 없는 제가 되기를 바라기보다
비록 제가 곤궁 중에 있을지라도 간절히 기도하는 저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능력
- 이진원 신부-
몇 년 전 일반 대학원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대부분 신자가 아니기에 사제이면서도 그냥 평범한 대학원생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생전 처음 만난 사제에게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많은 질문을 던졌고, 사제도 똑같은 사람임을 신기해했다.
그중에 정말로 똑똑하고 자신만만한, 그래서 믿음은 나약한 사람이나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연락도 못하고 지내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예비자 교리를 받는다고 하더니 급기야 세례를 받았다. 그 후에 만난 그 사람은,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신앙을 가진 것만이 아니라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달라져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신앙을 갖고 변화된 사연을 들으면서 그동안 그에게 신앙을 권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뛰어다니며’ 주변의 알고 있는 병자들을 모조리 예수님께 데려 온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사람은 모두 병이 낫는 구원을 받았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해, 사람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할 몫은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는 것뿐이고, 나머지는 예수님께 맡기면 되는데 그 사람의 됨됨이까지 미리 판단하고 지레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그분의 능력을 믿고 용기를 내어 그분께 초대하면 그 사람을 예수님 앞에 데려온 우리도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