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8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2014. 2. 11. 오전 1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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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8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
(마르 6,30-34)  

 

His heart was moved with pity for them,
for they were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and he began to teach them many things.

 

 

말씀의 초대

 솔로몬의 꿈에 주님께서 나타나신다. 주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는지 물으시자, 그는 듣는 마음을 주시어 선과 악을 분별하여 백성을 잘 통치할 수 있게 되기를 청한다. 부나 장수 대신 분별력을 청한 솔로몬을 가상히 여기신 주님께서는 그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주시고, 그가 청하지 않은 외적인 축복도 약속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에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며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사람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만나는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실행하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그 선택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인 일에 관한 것일 때도 있고, 때로는 인생의 흐름을 바꿀 만큼 중요한 것일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선택 가운데에서 특히 의미 있는 것은 우리가 ‘윤리적(도덕적) 선택’이라 부르는 선과 악의 분별입니다. 왜냐하면 윤리적 선택은 결국 그 사람의 됨됨이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올바른 윤리적 선택을 하게 하는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솔로몬 임금에게 허락하신 대로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통찰하였듯이, 이것 없이는 부와 성공과 건강 같은, 자신에게 유익한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문제는 아무리 지혜로운 삶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갖가지 유혹이 깃든 세상에 살면서 인간이 자신만의 힘으로 이러한 분별력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분별력을 바라는 솔로몬은 먼저 ‘듣는 마음’을 주십사고 청한 것입니다. 주님의 소리를 겸허하게 듣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분별의 지혜는 자라고 보존됩니다. 이러한 이라야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옳고 훌륭한 일, 다른 이들을 위한 일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타인을 위한 삶을 선택하게 하는, 듣는 마음과 분별력의 진정한 중심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연민의 감정이 살아 있지 않으면 분별력과 주의력은 진정한 이웃 사랑의 행위를 선택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보다 주님께서 지니신 그 뜨거운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청해야 할 것이고, 또한 그러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

제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보고합니다. 모두가 놀라운 일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낫게 했으며,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기쁨을 준 일입니다. 이 모든 행동은 하느님의 능력을 지녔기에 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쉬게 하십니다. 주님의 능력에 대해 감사할 시간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면 누구나 교만해집니다. 본인은 평상시처럼 행동해도 사람들은 금방 느낍니다. 감사와 겸손한 자세만이 그분의 능력 안에 계속 머물게 합니다.
봉사자에게서 주님의 능력이 빠져나가면 자신의 능력만으로 일하려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따라오지 않습니다. 자연히 역정을 내고 강압적이 됩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 서로가 지칩니다. 교회 봉사자들이 가끔씩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이유입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스승님의 넓고 따뜻한 배려입니다.
신앙인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도
당신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겸손과 감사와 열정을 지니면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그분의 능력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보고하러 온 사도들에게 조용한 휴식의 시간을 가지라고 배려하십니다. 활동과 휴식은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의 양 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하나의 균형이 깨질 때 생명은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영성 생활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상사에 온 정신을 집중하여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영적인 휴식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영성의 대가들은, 영혼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자기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진정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영적인 휴식이란, 잠시만이라도 현실에서 벗어나 조용히 머무르는 침묵의 순간을 말합니다. 곧 온몸의 긴장을 푼 상태에서 모든 생각과 감정 그리고 몸의 움직임을 정지하고 자신의 영혼을 텅 빈 상태로 만드는 고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나 10분만이라도 오감의 자극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그 빈 공간을 주님께서 영혼의 충만함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마음과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바쁘다 하더라도 하루에 10분이나마 영혼의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통하여 충만한 영성 생활의 맛을 느껴 보는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어제는 인천교구 대신학생 학생들의 등록금 책정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2012년 1학기를 다닐 신학생들이 등록금을 책정하고 납부하는 날인 것이지요. 이 신학생들을 보면서 벌써 방학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방학했다고 인사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등록금을 납부하고 곧 개학이라며 신학교로 다시 돌아갈 날이 가까워져 온 것입니다.

문득 제가 학창시절, 방학을 시작하면서 했던 행동 하나가 떠올려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계획표였습니다. 커다란 원을 하나 그린 다음에 시간을 표시하지요. 그리고 구체적인 하루 일과표를 만들었던 때를 떠오릅니다. 이 일과표는 초등학교 때에는 방학숙제로 제출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하루 일과표를 만들었지만, 이 일과표대로 살았던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작심삼일이 아니라 작심하루도 지키지 못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 지요.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니, 그때의 일과표에는 커다란 문제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쉼’의 시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공부만 많이 하면 좋을 것 같아서 공부하는 시간만 엄청나게 많이 배정을 했었고, 그 결과 단 하루도 그렇게 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한 공부하다가 갑자기 그 시간이 되면 어떻게 다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외가 얼마나 많은 세상인데, 정확하게 시간단위로 구분해서 계획을 세우니 당연히 실천과는 거리가 먼 쓸모없는 계획표를 만든 것입니다.

그때의 일과표를 떠올리면서 세상을 사는 지혜를 깨닫습니다. 첫째는 쉼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앞으로만 달리는 기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역에서 쉬어야 하고, 또 때로는 정비의 시간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획일화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외 역시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먼저 전교활동을 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말씀하시지요. 사실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이셨지요. 따라서 쉬지 않고 계속해서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려야 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하는 데에 쉼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간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이로써 더 큰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쉼을 위해 외딴곳으로 제자들과 떠나시지요. 그런데 그곳에 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무척이나 피곤하셨고, 정말로 쉼의 시간이 필요하셨습니다. 하지만 획일화된 마음이 아닌 넓은 마음으로 그들을 가엾게 보시어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들을 보며, 가장 일차적으로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넓은 마음입니다. 고정관념을 갖고서 섣부르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주님의 마음으로 나의 이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주님을 닮는 것이며, 주님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신앙인의 모습이지요.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떤가요? 너무나 속 좁은 마음으로 내 뜻대로만 모든 것을 판단해버리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면, 당신이 기대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게 된다(로버트 하프).

 

측은지심     

-안융 신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고 파견된 제자들(마르 6,7 참조)이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돌아와 스승에게 자신들이 한 일과 말씀을 통해서 가르친
모든 것을 전하며 몹시도 기뻐합니다. 기쁨에 들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잠시 외딴 곳으로 가서 쉬도록 권유하십니다. 그러나 쉼의 시간
을 통해 지친 심신을 회복하기도 전에 그들 앞에 많은 군중이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였고, 예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가르침을 베푸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하시며 많은 기적을
베푸시고, 가르침을 주실 때에 복음사가들은 자주 그분께서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셨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었고, 그 마음이 복음 선포자의 기본 소양임을 의미한 것은 아닐까요.
동양의 성현인 맹자 역시 유교에서 모든 덕德의 근본으로 여기는
인仁, 즉 어진 마음으로부터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우러나온다고 가르칩니다. 영성생활을 통해서 완덕完德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사람을 가엾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진정한 완덕의 길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전달된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참된 쉼을 찾아라

-안호석 신부-


본당에서 신자들과의 모임 후나 잠깐의 대화를 하고 헤어질 때면 신자들은 친절하게 “신부님, 들어가서 쉬십시오.” 라고 인사합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이 말이 듣기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쉬면 냄새만 나지요 ? 냄새 나라고 ?” 라고 무안을 줍니다. 아마 대부분 신자들은 사제나 수도자에게 그렇게 인사하는 것 같습니다. 매번 이런 인사를 받아서인지 저는 늘 몸과 마음이 ‘쉬어서  (  ? ) 냄새 날’ 정도로 피곤한가 봅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은 전도여행에서 돌아와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예수님께 보고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라고 초대하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쉬어라 !’ 는 ‘들어가 쉬세요.’ 라는 의미와 다르겠지요 ?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쉼’ 으로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11,28 ) 예수님께 오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성취욕이라는 짐을 내려놓고 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쉬라 !” 는 의미는 자신의 일과 업적만 보는 시야에서 벗어나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시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전도에 따르는 사명과 책임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당신과의 일체감을 상실하지 않았을까 염려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육체적인 휴식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휴식도 취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따로 제자들하고만 시간을 보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어수선하고 바쁜 생활 속에서 예수님하고만 따로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깨닫는 것은 큰 은총이자 축복입니다.

 

외로움이 그리움 될 때까지

-김찬선신부-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외로움.

어느 정도면 적당한 외로움일까?
외로움이 불행이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여야 할까?
아니, 적극적으로 외로움이 행복이려면 어떠해야 할까?

외로움이 쓸쓸함이 되어서는 아니 되겠지요.
외로움이 그리움이 되면 좋을 겁니다.

그리움은 사랑이기 때문이고,
그리움은 사람을 귀히 여기게 하며,
자신은 보석 상자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종종 우리는 너무 많은 일에 치입니다.
그래서 일에서 손을 놓고 쉬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일을 더 잘 하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일에 시달리는 것이 사람에 치이는 것보다 차라리 낫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에 치이곤 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다보니 사람이 귀찮아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중한 이웃이 잉여인간이 되기도 합니다.
잉여인간, 그거 심하게 얘기하면 인간쓰레기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쓰레기 속에서 사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일만 쉴 것이 아니라 사람 만나는 것도 쉬어야 합니다.
외로움을 느낄 때까지 쉬어야 합니다.
외딴곳으로 가야하고 거기서 하느님을 우선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느님만큼 귀해질 때 다시 이웃에게로 갑니다.

이것이 피정을 떠나는 이유이고, 제가 밤 등산을 혼자 가는 이윱니다.
우리 오늘 피정이나 밤 등산 한 번 떠나보실래요?

 

 

 

 
며칠 전, 급하게 어디를 갈 일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마음도 무척이나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호등은 저를 도와주지 않는지요? 계속해서 빨간 신호등에 걸려 서야만 했습니다. 신호가 바뀌어도 교차로에서의 막힘 현상으로 신호를 받지 못하고 다음 신호등을 기다리는 상황까지 놓이니 초조함과 함께 약간의 화도 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문득 빨간 신호등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바라보며 이것이 오히려 주님의 배려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서두르다가는 위험할 수도 있으니 빨간 신호등에 잠깐 서서 쉼의 시간, 즉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지요.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쉼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물론 내 앞 길이 파란 신호만을 받아서 쉴 새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싶겠지요. 그러나 그렇게만 되었다가는 큰 일 날 수도 있습니다.

제가 10년 전 볼링에 완전히 심취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점점 볼링 점수가 높아지면서 재미를 많이 느끼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단 한 번의 실수로 퍼펙트를 아깝게 놓치게 되었습니다. 이 날은 특히 점수가 높게 나와서, 몇 번 계속 치다보면 분명히 퍼펙트라는 것을 기록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 10게임 이상을 쳤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는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너무 무리해서 허리를 다친 것이지요.

이 날 역시 제 몸에서는 빨간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만 치라고 허리가 뻐근했었거든요. 하지만 퍼펙트라는 욕심에 그만 계속 쳤고 결국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세상에 파견했던 제자들이 나름대로 성공을 하고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신났나 봅니다. 예수님처럼 자기들도 놀라운 기적을 행할 수 있었으며,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사람들의 회심을 체험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예수님께 보고하면서 무척이나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넘쳐났겠지요. 이런 분위기를 타서 다시 다른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고, 놀라운 기적도 행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계속 파란 신호를 받아 쉬지 않고 앞으로 가는 것보다는 잠시 멈추어 서서 기다릴 수 있는 빨간 신호를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야 서두르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게 제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바쁘게 살아오신 분.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흐름 속에서 정신없이 살았다면 이제는 주님 안에서 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그러한 충전의 시간, 도약의 시간이 있어야 더 앞으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진짜 행복의 대가는 아주 저렴한데도 우리는 행복의 모조품에 참으로 많은 대가를 지불한다.(발로)

 

 

기억을 부르는 쉼     

-김효준신부-

 

똑같은 행동이라 할지라도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하는 것과 아무 생각
없이 행하는 것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갓난아이가 엄마를 향해
손을 휘젓는 행동과 다 큰 성인이 상대방을 향해 손을 휘두르는 행동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하는 행동은 목적 없이 하는 행동과는
달리, 그 행동 안에 이미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귀한 목적을
갖고 시작했더라도 이 행동이 장기간 반복되다 보면, 행동에만 정신이 쏠려서
본래의 목적을 잊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숭고하고 아름다운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봉사활동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활동만 남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행동이 의미 있는 결과를 맺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 행동의 목적을기억해야 합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 숭고한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한을 제안하고 계십니다. 한 발 물러설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한 발 물러선 후 내 모습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행동 속에 묻히기 쉬운 숭고한 의미를 순간순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영적 모라토리움(Moratorium)

-김찬선신부-

 

모라토리움(Moratorium)이란 말이 있습니다.
라틴말로서 ‘채무의 지불 정지’, ‘유예 기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채무를 갚을 능력이 없을 때 지불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
일정 기간 유예 기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말에서부터 모라토리움 신드롬이란 말도 나왔습니다.
지적, 육체적, 성적으로 한 사람의 몫을 다 할 수 있으면서도
성인으로서 그리고 사회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못하는
미성숙한 사람의 현상을 일컫는 것으로
이때의 모라토리움은 이런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될 때까지
사회에 대한 기여를 일정기간 유예해 주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영적인 모라토리움도 있습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뜻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사람들이 너무도 몰려들어
먹을 겨를도 없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일종의 휴업 공지처럼 잠시 쉬겠다고 선언하고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일들을 유예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안식일과 같은 개념입니다.
일을 쉬지만
사실은 일을 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일을 단순히 쉬는 것과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쉼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다시 찾고
자기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다시 찾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방향성을 다시 찾고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상황인식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힘을 다시 얻고
새로워진 나로 사람들에게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영적 모라토리움을 한 번 선언해보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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