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3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다.
어서 돌아가 보아라.
마귀는 이미 네 딸에게서 떠나갔다.”
(마르7,24-30)
“Lord, even the dogs under the table
eat the children’s scraps.”
Then he said to her,
“For saying this,
you may go.
The demon has gone out of your daughter.”
말씀의 초대
솔로몬의 정략적 혼인을 통한 외교 정책(1열왕 11,1-3 참조)은 솔로몬이 늙자 그의 마음을 주님에게서 돌아서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솔로몬이 다른 신에 대한 예배를 그의 아내들에게 허락하자, 주님께서 진노하시며 그의 나라가 분열될 것이라고 이르신다(제1독서). 시리아의 페니키아 출신의 한 여인이 자신의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이교도인 그녀의 믿음을 시험해 보신다. 그녀는 겸손하고 굳건하게 답하였고, 그녀의 청이 이루어졌다(복음).
☆☆☆
오늘의 묵상
현인 중의 현인으로 칭송받던 솔로몬이 말년에 잘못된 길로 들어섭니다. 오늘 제1독서를 읽다 보면, 느긋하게 ‘해피 엔딩’과 유종의 미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노년의 솔로몬을 기대하다가 갑작스러운 반전에 큰 당혹감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당혹감이 큰 만큼 성경 말씀이 우리의 험한 인생의 진실을 얼마나 정직하고 준엄하게 비추어 주는지에 대한 놀라움도 큽니다. 구약 성경은 민족적 영웅이었고 인간적 위대함의 가장 큰 모범이었을 인물에 대해서도 미화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나이와 경험이 언제나 지혜를 보존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씁쓸한 인생의 진리도 생각하게 됩니다.
현명하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았던 한 인물의 몰락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주목하며 독서 말씀을 다시 천천히 읽다 보니, 이 구절이 예리하게 가슴에 박힙니다. “자기 아버지 다윗만큼 주님을 온전히 추종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근본적인 사실에서 솔로몬의 파국은 시작되었습니다. 한때는 솔로몬이 지닌 지혜의 쓸모 있는 한 부분이었을 ‘인간적인 영리함’이 그를 지혜의 참된 원천인 겸손과 믿음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정략적 혼인을 통한 외교 정책’(1열왕 11,1-3 참조)이 그 단적인 예일 것입니다.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수완을 통한 외적인 성공이, 자신이 조금씩 지혜의 길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힘만을 믿고서 하느님께 지혜의 길을 묻는 것을 게을리할 때 우리의 장점과 수완은 더 이상 온전한 삶을 돕지 못합니다. 오히려 오만함과 자기도취로 이끌어 참된 지혜의 길을 버리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솔로몬의 화려하나 불행한 노년의 삶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피정을 위해 신학교로 들어오는 월요일, 저는 신학교 교수 신부님과 함께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수 신부님께서는 이번에 새롭게 뚫린 길이라면서 신학교로 가는 새 길을 가르쳐주시더군요. 이정표도 없는 아주 낯선 길이었지만, 이 길은 다른 길보다 훨씬 빠르며 또 넓고 편한 길이었습니다.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교수 신부님께서 이 길을 안내해주시지 않았으면, 과연 이 길로 갈 수 있을까요? 분명히 이 길이 아닌, 예전에 항상 다니던 길을 통해서만 신학교에 갔을 것입니다.
목적지에 잘 도달하기 위해서는 나를 이끌어 주는 사람이나 거리의 이정표, 차 안의 내비게이션, 지도 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 안내를 잘 따르는 나의 선택입니다. 아무리 좋은 안내라 할지라도 내가 선택하지 않는다면 엉뚱한 곳으로 갈 확률이 그만큼 높아질 테니까요.
‘하늘나라’라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까지 잘 갈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주는 많은 안내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안내를 얼마나 잘 따르고 있을까요? 나의 쓸데없는 고집과 욕심으로 인해서 이러한 안내보다는 내 뜻을 앞세워서 하늘나라에만 가겠다고 우기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후회 없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편하지 않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올바른 것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편하고 쉬운 길만 선택하려 하기 때문에, 결국 후회 가득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인 이교도 부인과 예수님의 만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더러운 영이 들린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청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보여주셨던 사랑의 모습과 달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순간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고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선택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딸을 위해 스스로 강아지라고 칭하면서, 보통 사람의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까지도 모두 내려놓는 아주 어려운 선택을 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선택이 그녀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을까요? 지금 이 순간 정말로 후회 없는 선택을 하고 있는지요?
부스러기이지만 너무 충분한...
-김찬선신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나는 강아지로소이다.
개새끼라는 말이외다.
주인집 상 밑을 어슬렁거리다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강아지외다.
남들은 나를 주인집 아들과 비교하며 딱하다지만
그래도 나는 어미의 사랑을 듬뿍 받는 행복한 강아지외다.
하느님의 은총 중에 어미의 사랑만한 은총이 어디 있습디까?
그것도 저의 어미 같은 사랑은 보기 드문 사랑이외다.
제 어미의 저에 대한 사랑은 어떤 모욕도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으니.
불가마 속에 던져진 세 소년에게 어느 불꽃도 범접치 못한 것처럼,
아니 범접했을지라도 자유로웠던 그들처럼
모욕은 사랑을 모욕할 수 없고
사랑은 모욕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제 어미에게서 저는 넉넉히 봤소이다.
사실 저는 주님께서 부스러기를 던져주기도 전에
어미의 이 사랑을 보고 그 지긋지긋한 마귀에게서 벗어났소이다.
저는 사랑을 믿지 못하고 고통을 두려워한 강아지였지요.
사랑을 믿지 못하고 고통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마귀의 밥이잖아요?
그래서 어미의 사랑 안에 있지 못하고 마귀의 수하가 되었잖아요?
그러다 마귀보다 더 강한 어미의 사랑을 보고
고통보다 강한 사랑을 믿게 되었소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어미의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부스러기였소이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당신 사랑을 고루 나눠주시니
제게는 제 어미가 당신 사랑의 일부, 아니 당신의 사랑의 부스러기였소이다.
부스러기이지만 너무도 충분한.....
삶의 모든 것을 주님 발 앞으로 가져가자
- 김미자 수녀-
인생 여정을 가다 보면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 기회를 통해 한 단계 도약하는 은총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좌절하며 힘겨운 순간순간을 원망으로 지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교도인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부인은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맞닥뜨린 한계 상황 앞에서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찾아와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딸한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상황 한가운데 서 있는 이 여인의 절박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좌절하며 포기하거나 원망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우상을 찾아 위안을 받거나 요행을 바라지 않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와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겸허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간절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인이 예수님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면 누구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마귀가 들렸다는 것은 양심과 자유의지로 자신의 삶을 선한 방향으로 이끌지 못하고, 나쁜 힘에 얽매여 이끌려 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은 이런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이방인이든 유다인이든 모든 인간이 구원되어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믿음을 갖고 예수님 발 앞으로 가져가도록 합시다. 절박한 상황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문제를 그분 발 앞으로 가지고 가서 그분의 자비를 청하는 믿음을 가지도록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