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9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그는 눈을 뜨면서 “나무 같은 것이 보이는데
걸어 다니는 걸 보니 아마 사람들인가 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그의 눈에 손을 대시자 눈이 밝아지고
완전히 성해져서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저 마을로는 돌아가지 마라.”하시며
그를 집으로 보내셨다.
(마르8,22-26)
Looking up the man replied,
“I see people looking like trees and walking.”
Then he laid hands on the man’s eyes
a second time and he saw clearly;
his sight was restored
and he could see everything distinctly.
Then he sent him home and said,
“Do not even go into the village.”
말씀의 초대
말씀에는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다.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유의 법에 머무르는 사람은 말씀을 실행하게 되고, 이를 통해 그는 행복해진다(제1독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눈먼 이를 데려와서 그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어 치유해 주신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이 기적 이야기는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시려는 예수님의 노력을 보여 준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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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의 야고보서는 말씀을 듣고 실행하지 않을 때에는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쉬이 잊히게 된다고 알려 줍니다. 독서에서 지적하는 대로, 말씀을 자주 듣기는 하지만 제대로 실행하지는 못하는 게 우리의 일상인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어쩌면 우리의 마음가짐에 결의와 절박함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모든 실행이 그렇듯 말씀의 실천에는 각고의 노력과 결심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음악가 베토벤이 말년에 남긴 작품 현악 사중주 16번(작품 번호 135번)에 관한 유명한 일화는 우리 신앙인의 삶을 찬찬히 돌아보게 합니다. 베토벤은 이 위대한 작품의 마지막 악장의 시작 부분 의 악보 위에다 “그래야만 하는가?(Muss es sein?)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 Es muss sein!)라는 메모를 남겼습니다. 이 문장의 뜻과 유래에 대한 몇 가지 설명 가운데 한 통설을,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악장의 시작 부분에 “힘들게 내린 결정”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을 보면, 이 자문과 자답은 베토벤이 말년까지 소홀하지 않았던 진지한 삶의 태도, 곧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이겨 내고 다다른 삶의 경지를 절묘하게 요약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젊은 나이에 청력을 잃는 등 그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찼지만 고뇌와 결단의 순간들을 통해 가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과 은총의 수많은 사건은 우리의 내적 결단을 기다립니다. 이를 통하여 말씀과의 만남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대신 진정한 말씀의 실천으로 지속됩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적정한 무게를 획득합니다. 그러한 삶 안에서 우리와 주님의 만남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 변모되는 것입니다.
엄마의 손
-김효준 신부-
어린 시절 엄마의 따뜻한 손이 앓던 배를 어루만져 주면 기분도 참 좋았고 증도 금세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엄마의 손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이 어린 내게 와 닿으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엄마의 손에는 또한 강한 힘이 있었습니다. 엄마의 손이 닿자마자 꽁무니를 빼며 달아나는 통증들이 참으로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엄마의 손은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었고 강한 힘으로 일으켜 주었습니다. 엄마의 손은 동시에 강한 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벳사이다의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고, 두 눈에 침을 바른 그에게 손을 얹으시고, 마지막으로 눈에 손을 얹으십니다. 예수님의 공들인 손길이 결국 눈먼 이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의 손이 그의 눈을 열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손은 눈먼 이를 보듬던 예수님의 사랑이었으며, 그의 눈을 뜨게 했던 예수님의 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는 그런 사랑과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배앓이 하는 어린아이입니다.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눈먼 이입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없다면 우리는 매일매일 통증에 시달리고 어둠 속을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에겐 하느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그분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손이 우리를 살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느껴지십니까?
오늘 복음은 단순히 소경을 치유하시는 또 하나의 기적사화로 읽을 수 있지만 실은 매우 깊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소경을 치유하시면서 어떤 행동을 하시는지 유의해서 살피고, 치유해 준 그 소경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주의해서 듣고 묵상해야 그 상징적 의미를 알아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의 손을 잡고 동네를 빠져나오십니다. 왜 그 동네를 빠져나오셔서 치유하셨을까요 ? 그 동네에서 빠져나온 다음에 그의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대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십니다. 그가 대답하지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사람을 사람이 아닌, 나무로 보는 수준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의 눈에 손을 대시자 그가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분명하게 볼 수 있게 치유해 주신 다음에 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왜 다시 저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 눈먼 사람이 살던 그 마을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 소경은 어둠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장애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 마을에서는 영적으로도 눈이 먼 상태, 다시 말해 죄의 상태에 있었던 것이지요.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다시는 어둠의 세계, 죄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임을 깊이 알아듣게 됩니다.
-김찬선신부-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예수님께선 며칠 전
귀먹은 반벙어리를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그의 귀에 손을 대고 혀에 침을 발라 치유해주셨습니다.
이번에는 눈 먼 이를 따로 데리고 나가시는데
마을 밖까지 데리고 나가시고,
거기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어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지 마을로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마을로 다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반벙어리를 낫게 하신 기적 얘기나
오늘 눈먼 이를 낫게 하시는 기적 얘기는 마르코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러니까 마르코복음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사적으로 치유하시는 얘기를 전하고,
치유된 것을 공적으로 떠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에서 마을로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심은
잠자코 집에 들어가 있지 마을로 들어가 떠벌리지 말하고 하심입니다.
지난 번 반벙어리를 고쳐주시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럴수록 그가 더 떠벌리고 다녀 예수님을 난처하게 했기에
이번에는 아예 마을로 들어가지 말하고 하신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치유를 사적으로 하시고
치유된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하고 하신 뜻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것은 치유 받은 그 사람을 위한 겁니다.
떠벌리는 것은 마치 결혼반지를 시장에 내다 파는 것과 같고,
사랑의 선물을 남에게 주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떠벌리지 않음은 주님의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을
내밀한 것으로 간직하라는 뜻입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선물을 주시는데
열이면 아홉 당신의 선물을 남에게 주지 말라고 하시는 것과 같고
당신의 사랑을 고이 간직하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사적인 하느님 체험을 함부로 얘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에게 영적인 상담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자주 사적인 계시를 받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그분은 그러나 떠벌리지 않습니다.
저에게 가져오시고
저는 그것을 읽어보고 영적인 식별을 해드립니다.
저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모으고 있습니다.
혹시 다른 사람의 선익을 위해 공개할 필요가 있다면
나중에 그분이 돌아가시고 난 뒤 공개할 수는 있겠지요.
사적인 치유를 떠벌리지 말라고 하시는 두 번째 더 큰 이유는
당신의 구원사업을 위해서입니다.
구원사업을 위한 것이지만
그것은 얘기하지 말라고 할수록 더 널리 알려지게 되는 것을 노리는,
그런 고도의 전술도 아니고, 상술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사업이 십자가의 사랑을 통하여 이뤄지는 거지
이런 치유사업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치유란 주님 사랑의 한 표현일 뿐인데
사람들은 십자가로 드러난 사랑보다도 이런 치유적 사랑에 열광하고,
또 이런 것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개인적 치유를 떠벌리지 말라고 하심은
우리 신앙의 이런 성공주의를 경계하시는 말씀이고,
치유보다는 십자가 고통을 같이 짊어지는 사랑을 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떠벌리지 말고 고이 간직할 것입니다!!!!!

중세 시대의 유럽 어느 수도원에서 원장이 제자를 뽑기 위하여 지원자를 모아 놓고 시험을 봤습니다. 그 시험 중 첫 번째 시험은 배추를 심는 것이었는데 수도원 원장은 이상한 방법으로 배추를 심으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바로 배추의 모종을 나누어주면서 뿌리가 하늘로 가게 심으라는 것이었지요.
수사가 되기 위해 찾아온 두 청년이 밭으로 갔습니다. 한 청년은 원장의 말대로 뿌리가 하늘로 가게 심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청년은 수도원 원장의 말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배추를 심으려면 뿌리를 땅에다 심어야 살지 뿌리가 하늘로 가게 심으면 어쩌라는 말이야? 원장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이렇게 말하면 그는 바르게 뿌리가 땅으로 가도록 잘 심었습니다. 나중에 배추 심은 것을 보려고 원장이 와서 보고는 두 번째 청년 곧 배추 모종을 바르게 잘 심은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청년처럼 똑똑한 사람은 우리 수도원에 올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저희 수도원에서는 똑똑한 사람보다는 순명하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보면 이해하기 힘든 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어 주님께 하소연을 하고, 주님께 대한 불평불만으로 일관하는 경우도 참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가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떠한 순간에서도 당신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순명하는 사람을 원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셨지요.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벳사이다에서 눈먼 이를 고쳐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치유는 조금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단번에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많은 단계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십니다. 그리고 잘 보이느냐고 여쭈어 보시지요. 마지막으로는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셔서 뚜렷하게 보시도록 만드십니다.
이 모습이 어쩌면 우리들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처음부터 완전히 주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지요. 조금씩 조금씩 주님을 알아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은 굳세어지고, 주님께 철저히 순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단번에 모든 것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주님도 단번에 알고, 주님의 응답도 단번에 이루어지길 원하며, 주님의 사랑이 단번에 나에게만 내려지길 청합니다.
다시 한 번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정립해야 할 것입니다. 단번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욕심보다는 천천히 라도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순명을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보다는 순명하는 사람이니까요.

저 마을
-신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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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벳사이다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고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쳐 주시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다른 이들도 등장하면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으니 복음관상 기도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배경 삼아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려오는 장면부터 봤으면 합니다. 사람들과 눈먼 이가 평소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봅니다. 그러는 가운데 각자도 주위 사람들 내지 공동체 소속 사람들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지 짚어보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부분은 역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고쳐주시는 장면인데, 무엇보다 눈여겨 볼 것은 눈먼 이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는 행동입니다. ‘마을 밖’ 으로 데리고 나가셨다는 사실에서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와 깊이를 짚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눈먼 이는 마을 밖으로 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때도 묵상하듯 깊이 생각 속에 파묻힐 것이 아니라 그저 물끄러미 그 행동과 장면을 눈여겨 바라보는 가운데 가르쳐 주시는 바를 낚아 올릴 일입니다.
끝으로 눈을 치유시켜 주신 다음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을 봅니다. 특히 보내시면서 당부하시는 말씀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는 말마디에 담겨 있는 의미와 깊이를 알아듣는 것도 중요한 점 중의 하나입니다.
이처럼 관상을 하다 보면 대화 내용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그 말마디 자체만이 아니라 그런 말이 오갈 때의 분위기, 말하는 이의 표정이나 몸동작 등도 살피면서 기도하면 의외로 좋은 것을 길어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