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0일 연중 제6주간 목요일

2014. 2. 21. 오후 12:48:38

글자


201
4년 2월 20 
연중 제6주간 목요일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르8,27-33)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Peter said to him in reply,
“You are the Christ.”

 


말씀의 초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며,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겨서도 안 된다.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신앙인의 참된 자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라고 사람들이 말하는지 물으신다. 이어서 제자들 자신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도 물으신다. 이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라고 밝히시자 이를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큰 충격에 빠진다(복음).

☆☆☆

오늘의 묵상

 몇 년 전 이맘때 사랑하는 저의 외할머니가 선종하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에게 많은 사랑을 주었던 분입니다. 무엇보다 깊은 신앙으로 저에게 큰 모범이 된 외할머니에 대한 생각이 지금도 끊이지 않습니다. 임종을 지킬 때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고요히 내쉬던 순간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빈소에서 허전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할머니의 생전 모습을 회상하던 것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보다 더 깊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묘지에 외할머니를 안장하던 날의 풍경과 느낌입니다. 경기도 파주였는데, 아직 늦겨울이었지만 그날은 마치 봄날처럼 따스했습니다. 하늘도 아주 맑고 드높았습니다. 그리고 슬픔보다는 주님에 대한 감사함이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품에 할머니가 안긴다는 사실이 너무나 ‘확실하게’ 다가왔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믿음을 그처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듯이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고왔던 할머니의 삶이, 고생도 많았지만 하느님께 충실했던 그 삶이 주님의 자비 안에 온전히 받아들여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주님 곁에서 누릴 평화와 행복을 사랑하는 가족에게 나누어 준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본당 신부로 부임한 뒤로는 죽음을 앞둔 이들에 대한 병자성사나 교우들의 빈소를 방문해 연도를 바치는 일, 장례 미사를 봉헌하는 일이 잦습니다. 그러한 기회에 주님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온 분들이 조용히 주님께로 떠나며 슬픔 속에서도 표현하기 어려운 평화를 누리고 있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오롯한 자비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 이어지는 성경 구절에서는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고 말합니다(야고 1,13 참조). 참으로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며 충실히 살아온 사람에게 죽음은 심판을 이기는 주님의 자비를 만나는 자리일 것이며, 그 자비를 우리 또한 이 땅의 순례의 여정에서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양승국신부-

 

<열린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정말 둘도 없는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 내가 정말 사랑하고 있다고 여겼던 사람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물었을 때 대답이 이랬다면 기분이 어떠하겠습니까?

 

뭘 새삼스럽게 그런 걸 다 물어봐? 넌 그냥 여러 친구 중에 한명이지. 그냥 친구야.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주길 바래?”

 

정말 듣고 싶은 대답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너는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야. 존재의 이유. 너는 내 인생의 의미야. 네가 없는 이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물음은 바꿔 말하면 네 인생에 나는 무엇이냐? 네 인생에 나란 존재는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 라는 말도 됩니다.

 

동작이 빨랐던 베드로 사도가 재빨리 나서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간단하지만 참으로 명쾌한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승님은 나와 인류 전체를 구원하실 메시아이십니다. 스승님은 내 임금, 내 주님, 내 인생의 전부, 내 인생의 의미, 내 하느님이십니다.”

 

오늘은 베드로 사도가 정말 대답을 잘 했습니다. 예수님 마음에 쏙 드는 정답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보면 상황은 조금 달라집니다. 안타깝게도 베드로 사도는 아직 깊이 있고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당시 대다수의 백성들이 기대하고 있던 힘과 권력의 세속적 메시아, 위엄에 찬 영광의 왕의 모습을 한 메시아가 아니라 고통 받고 수난 당하는 십자가의 메시아라고 스스로의 운명을 밝히십니다.

 

그 말씀 끝에 베드로 사도는 크게 실망합니다. 자신이 기대했던 세속적인 희망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느낌과 더불어 자신이 깊이 사랑했던 스승의 끔찍한 죽음을 예견하며 크게 안타까워합니다. 이런 이유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흔들면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외칩니다.

 

곧 다가올 예수님 십자가의 신비를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했던 베드로 사도, 스승님 신원에 대한 파악이 아직 정확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베드로 사도, 그래서 아직도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이 세속적일 수밖에 없었던 베드로 사도를 향한 예수님의 질책은 날카롭기만 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고백하는 데 있어서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님과 함께 누릴 인간적 기쁨과 행복, 현세적 달콤함과 성공에만 연연했지 그분과 함께 겪어야 할 고통과 수난, 그분과 함께 지고가야 할 십자가는 철저하게 외면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향한 몰이해의 결과가 사탄아, 물러가라.”였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과 함께 많은 기쁨과 은총, 축복이 우리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입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그 선물들을 받아들이겠지요. 그렇다면 오늘도 예수님으로 인해 다가올 시련과 박해, 고통과 십자가가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감사하는 마음, 열린 마음으로 그 모든 인생의 부정적인 경험들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침묵      

-김효준 신부-

 

“난 널 사랑해.” 남자가 여자에게 고백합니다. 그리곤 여자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여자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남자는 듣고 싶지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자가 답한다 해도 남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입니다. 남자가 당황합니다. 
여자가 계속 침묵하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침묵할 때 남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답이 없으니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답도 
없으니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침묵은 우리를 이러지도 저러지
도 못하는 상황으로 몰아넣곤 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질문에 분명하게 답하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침묵할 때 예수님은 아무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속 사랑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반쪽짜리 사랑입니다. 사랑이 침묵 속에 묻혀
있을 때 그것은 사랑이라 불릴 수 없습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지만 침묵 속 
사랑은 무기력할 뿐입니다.
지금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나한테 예수님은 누구인가 ?

-이민순 수녀-


교회는 사순절을 앞두고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선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곧 죽음으로 향한 길을 걷기 시작하며 자신의 선교를 ‘사람들’ 의 고백과 ‘너희’ 곧 제자들의 고백을 통해 진단하십니다. 그러나 둘 다 실망스러운 답변을 들을 뿐입니다. 비록 베드로는 올바로 고백했지만 그것이 잘못된 메시아 고백이었음을 바로 이어서 볼 수 있습니다.( 32절 ) 

제자들이 어떻게 당신을 이해하는지 아신 예수님은 죽음을 향한 길을 가시는 동안 비유나 상징을 쓰지 않고 당신 사명을 명백히 가르치십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흠 없는 어린양이며 인간의 구원을 위한 대속물로 고난을 받고 죄인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사후 예언의 형식으로 초대교회의 선포를 마르코가 기록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르코와 교회가 수난 ( 사순시기 )을 앞두고 제자인 우리한테 신앙고백을 하도록 초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그것은 아마 수난이 의미하는 신앙의 회의, 무기력의 체험, 하느님 부재의 체험 ( 신성의 능력상실 )이 가져올 격랑을 잘 견디기 위한 사전 평가이고, 이를 통해 신앙의 상태를 깨달은 제자한테 더욱 열심히 하느님께 신앙의 지혜와 견고함을 구하라는 초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도생활을 하며 매번 사순시기를 앞두고 이 복음말씀 앞에서 “나한테 예수님은 누구인가 ? 나한테 하느님은 누구인가 ?” 라는 성찰을 하게 되는데 이 묵상이 참으로 은혜로운 기도이고 하느님과의 동반을 깨닫는 감사의 시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글을 대하시는 독자께서도 이 은총의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하는 사탄

-김찬선신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사랑을 하는 사탄.

사탄은 사랑을 하지 않는 존재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하는 사탄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베드로입니다.
사랑 잘못하다가 사탄이 된 겁니다.
나도 까딱하면 그렇게 사랑 잘못할까봐 두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잘못하는 사랑일까요?

한 마디로 얘기하면 애착적인 사랑입니다.
하느님께로 가지 못하게 붙잡는 사랑이고,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랑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가끔 사탄적인 사랑을 제게 하십니다.
한우리 운동 차원에서 마라톤을 하는데 마라톤을 뛰지 말라 하시고,
이제 나이 먹었으니 일을 좀 적당히 하라는 것이 그 예입니다.

이때 저는 매정하게 끊습니다.
그래서 저의 어머니는 저를 아주 매정한 자식이라고 하시는데
제 생각에 저는 예수님보다 훨씬 매정하지 않고 부드럽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며 꺼지라고 하시는데
저는 그 정도까지 하지 않습니다.

가끔 짜증어리고 신경질적으로 끊고,
어머니 연배의 다른 어르신들께는 그러지 않으면서
저희 어머니께만 그러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아무튼 사랑하다가 사탄되는 거 너무 쉬우니 조심합시다!

 

신앙고백비     

-신효원-

 

신앙고백비를 보러 갔습니다. 상주시 청리면의 산골 마을 삼괴리 뒷산 자락에
비석이 있었습니다. 모습이 특별했습니다. 상단에 십자가를 만들고 그 위에 
갓을 쓰고 큰 바위 위에 있었습니다. 조선 말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수많은 박해와 수난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풍파에 시달린 모습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천주라는 두 글자는 뚜렷하지만 그 밑에 새겨진 작은 글씨들은 쉽게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글씨의 흔적들을 손으로 더듬는 동안, 비석을 
세운 분의 심정이 짐작되어 눈물겨웠습니다. 그는 남몰래 산속으로 들어와
 
해질녘까지 돌을 다듬었을 것입니다. 수년이 걸렸겠지요. 혼자서 지키는 신앙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천주님을 향한 감당할 수 없는 그리움을 돌에 
새기기로 했겠지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센 믿음을 위한 다짐이기도

했겠지요. 그래서 한 동작 한 동작이 간절한 기도였고 당당한 신앙고백이었을
것입니다. 숲이 우거지고 인적이 없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안동교구에서 성지로
조성해서 순례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뒤돌아보면서
마음속에 신앙고백비를 세우기로 작정했습니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한 글자 한 글자 새기고 다듬기로 다짐했습니다.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 이창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물음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스스로의 잣대에 자유롭지 못한 저에게는 참 가혹하게 들립니다. 좋은 제 모습과 정확한 제 모습을 말해 줄 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정말 못난 구석이 많은 탓도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성격, 사교성과 대인관계, 가족관계, 사회적 영향력, 경제적 지위,지적 능력, 업무 능력 등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영역에서 바라는 기준에 한참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탓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제 태도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한 부분 때문에 다른 좋은 것도 갉아먹으면서 제 본모습도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겪은 부모님의 부재는 이를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날마다 자식들의 좋은 모습을 발견하시고 기뻐하셨으며, 부족한 부분은 함께 채워보고자 하셨습니다. 그때는 몰랐으나, 이러한 부모님의 존재는 제 자존감을 높여주었고, 세상에 흔들리지 않도록 땅속에 제 뿌리를 단단히 박을 수 있게 했습니다
. 
그런데 제가 착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 근원은 부모님 이전에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선함 그 자체이시며,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어졌습니다. 따라서 다른 피조물과 달리 인간은 이 세상에 하느님을 증거하며,그분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성 이레네오는 인간, 곧 살아 있는 인간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제 근원 앞에 제 존재 가치는 우뚝 설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가치가 저보다, 제 생명보다 더 우선한단 말입니까? , 주님!

 

 

 

성탄절이 다가오자 어머니는 네 살배기 아이를 데리고 선물을 사기 위해 거리로 나갔습니다. 거리는 온통 반짝이는 불빛과 즐거운 캐럴송으로 가득 차 있어 어머니는 기분이 좋아졌고, 당연히 아이도 기분이 좋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장난감 가게 앞에 멈춰 섰을 때 어머니는 예쁜 인형을 발견하고는 아이의 손을 잡아당겼지요. 그런데 아이는 가게로 들어가지 않고 자꾸만 어머니 뒤로만 숨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아이의 표정을 보니 울먹이며 전혀 즐거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만 갸우뚱거렸는데 아이의 신발 끈 한쪽이 풀어져 있는 것을 보았어요. 

“이런, 신발 끈이 풀어졌구나. 엄마가 매줄게.”

어머니는 쭈그리고 앉아 아이의 신발 끈을 매주고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는데 글쎄 아무것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장난감이 가득한 가게도, 화려한 조명도,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쭈그리고 앉아 보니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굵은 다리와 신발만 보일 뿐이었지요. 

그제야 어머니는 아이의 눈높이로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울상을 지었던 이유도 알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사람이나 사물이나 보는 각도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보는 각도만 정확하다는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눈높이 사랑’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눈높이 사랑을 원하십니다. 즉, 당신과 우리가 같은 시선을 맞추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예수님께 내 뜻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나의 시선에 맞추라고 하고 있지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역시 자신의 시선만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면서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를 생각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막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신 이래 처음부터 줄곧 거부해 오셨고 가장 엄하게 단죄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는 꾸중을 듣기까지 합니다. 

지금 나는 과연 예수님과 눈높이 사랑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보았으면 합니다. 사람의 일에만 신경을 쓴다면 나 역시도 예수님처럼 심한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면서 예수님과 눈높이 사랑을 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는 우리의 자유가 아니다.(코르네유)

자랑 말아야 할 은총이 있다

-전삼용신부-

신학교엔 똘레병이란 것이 있습니다. 똘레는 라틴어로 자르다라는 ‘tollere’에서 나온 말로서 신학교에서 잘릴까봐 두려워하는 병을 의미합니다. 요즘엔 그리 심하지 않지만 옛날 신부님들은 조금만 잘못하면 학교에서 쫓겨나기 일쑤였기 때문에 그런 병명을 지었던 것 같습니다.

한 불완전한 사제의 잘못으로 많은 신자들을 잃을 수 있기에 사제로 선발하는 기준이 까다로워야 한다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사람이 판단해서 학생들을 자르거나 하는 일들은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그 부르심을 따른 것은 자신이고 그래서 성소에 대한 선택도 자신의 의지를 크게 반영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사제가 되는 순간은 그 똘레병에서 해방되는 날입니다. 한 번 서품 받으면 누구도 쫓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 열심히 살아 서품을 받은 신부님들은 공식적으로 검증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위험성도 있는데 그 험난한 시기를 거쳐 왔기 때문에 사제가 되는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높은 수준의 사람이 된다고 착각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극단적인 신부님은 사제가 수녀님이나 신자들보다 더 높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수녀가 미사드릴 수 있어? 신자가 고해줄 수 있어? 못하잖아.”

결국 사제가 된 것이 본인이 똘레 당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미사나 고해는 성모님도 못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성모님이 성직자들보다 덜 거룩하시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성직자들의 영적인 능력은 성모님을 통해서 옵니다. 어떤 특정한 은총이 주어진 것이 자신의 거룩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은총은 자신보다 교회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개인적인 거룩함으로 받는 은총도 있지만 교회를 위해 개인의 거룩함에 관계없이 주어지는 은총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황님이라고 해서 혹은 많은 기적을 행한다고 해서 꼭 거룩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엔 우리의 첫 번째 교황님인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어보십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 어떤 이들은 엘리야,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소경의 눈을 띄어주십니다. 소경이 영적인 눈을 뜨자 영적인 눈으로 사람을 나무로 보게 되었습니다. 상징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의 상징입니다. 생명나무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보기 위해선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충만히 받아서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이는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에서는 그것이 사람의 힘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일러주셔서 가능했다고 하시며 그렇게 선택된 베드로에게 교회의 수위권과 천국의 열쇠를 주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잘나서 그런 축복을 받는지 압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수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교만한 마음에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을 설득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이 뽑은 첫 교회의 수장을사탄이라 부르시며 야단치십니다.

베드로는 하늘로 솟았다가 땅으로 고꾸라졌습니다. 그런 성령의 은총이 자신의 영성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여 주신 것임을 잊고 자신의 공로 때문인지 알고 교만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직자든 수도자든 교회에서 봉사하는 누구이든 하느님께서 그런 봉사의 능력을 주신 이유는 자신의 능력이나 거룩함보다도 교회를 위해 특별한 은총을 주신 것임을 깨닫고 교만해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사탄들
-김찬선신부-

저의 수도생활 경험에서 원수, 마귀는 
한 번도 원수, 마귀의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원수, 마귀는 예쁜 여자의 모습으로 옵니다.
원수, 마귀는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다가옵니다.
원수, 마귀는 선물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원수, 마귀는 비위를 맞추고 아부를 하며 옆에 진을 칩니다.
원수, 마귀는 맛있는 것을 자꾸 사줍니다.
원수, 마귀는 건강을 위해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저의 수도생활 경험에서 하느님은
많은 경우 원수, 마귀의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하느님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하느님은 듣기 싫어하는 사람의 말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십자가를 선물로 주십니다.
하느님은 어디를 가도 괴롭히고 상처를 주는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쓰디쓴 맛과 병고를 친구로 주십니다.

그런데 사람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눈을 홀리고
듣기 좋은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빼앗아가고
선물은 하느님의 은총을 갈망하지 않게 하고
아부는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게 하고
맛있는 것은 영적인 미각을 무디게 하고
順境은 逆境을 거부하고 안주하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께 가는 여정을 거부하고
이 세상에 안주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는 주님께 사탄으로 단죄 받았습니다.
주님을 위한다는 것이
주님의 갈 길을 막는 것이 됨으로 사탄이 되었습니다.
우리 삶의 어떤 것들이 주님께로 가는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인지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기본에 충실하기

- 이재학 신부-

 

어려서부터 기계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얼리어답터까지는 아니지만 새롭고 다양한 기능이 있는 전자제품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사용한다. 휴대전화만 해도 그렇다. PDA폰이라는 것도 써보고, 요즘에는 스마트폰을 쓰고 있다. 일정관리나 주소록 관리 등을 주로 쓰고 있기는 하지만 백과사전이나 인터넷 같은 여러 가지 기능도 사용한다.사람들과 뭔가 얘기하다가 궁금한 것이나 확실하지 않은 것들을 찾아서 보여주면 신기해하곤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휴대전화이지만 정작 전화가 잘 안된다면 휴대전화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전에 쓰던PDA폰이 기능은 참 다양하고 좋았는데 전화가 잘 되지 않아 지금은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다. 전화가 잘 안 되니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없다. 

무엇이나 기본이라는 것이 있다. 휴대전화는 일단 전화가 잘되어야 한다. 아무리 놀라운 기능이 있어도, 순금으로 만들고 다이아몬드를 박아놓았다고 해도 전화가 잘 안 되면 그건 휴대전화가 아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를 보면서 기본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신앙인에게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신앙고백이 아닐까?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것에 승복한다는 뜻이다. 승복한다는 것은 그렇게 살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 승복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는 베드로의 단순한 신앙고백을 주님은 기뻐하신다. 하지만 수난예고에 대해 펄쩍 뛰는 베드로의 모습은 승복하고 주님의 뜻을 받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사탄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하느님의 뜻에 참으로 승복하며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하느님의 사람인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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