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1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2014. 2. 22. 오전 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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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21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마르 8,34─9,1)


“Whoever wishes to come after me must deny himself,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For whoever wishes to save his life will lose it,
but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and that of the Gospel will save it.



말씀의 초대

 야고보서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소용없다고 가르친다. 곤란한 형편에 놓인 형제에게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말로만 위로하려한다면 이는 실천 없는 믿음이며 죽은 믿음이다. 믿음은 실천으로 완전해지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제자 직분의 길을 가르쳐 주신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오히려 목숨을 구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늘날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낯선 성찰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천주교 신자,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의식을 갖는 것과 제자의 길이 일치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소리 없이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세 없이도 충분히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진 것이 어쩌면 오늘날 교회가 겪는 여러 갈등과 문제의 뿌리인지도 모릅니다. 
신자 수가 늘어난 만큼 주님의 참된 제자의 길을 걷는 이들의 수가 늘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가지 체험을 통해서 실감합니다. 복음이 요구하는 가치관과 규범을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를 판단할 때 도외시하는 것을 ‘정교분리’라는 이름으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은 것도 한 예입니다. 이 점은 분명 우리의 신앙이 놓인 위기의 심각한 표징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회의 가르침 중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만 감탄하고 좋아하되, 전적인 헌신과 조건 없는 마음으로 제자의 길을 걷는 것을 무시하는 모습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이러한 병폐를 비판한 사람이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입니다. 그의 다음 말은 오늘의 우리도 경청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감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제자’를 부르러 오셨으며,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한다.” 
오늘의 제1독서를 통하여 우리 신앙이 마주하고 있는 고민이 교회의 초창기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제자의 길을 걷는, 실천하는 믿음을 살아갈 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닐 자격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 전까지는 외워야 할 것이 없었는데, 3학년 때부터 열심히 외워야 할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외우지 못하면 선생님한테 혼나야 했거든요. 그것은 바로 ‘구구단’입니다. 사실 2단은 너무나 쉬웠습니다. 이 쉬운 것을 왜 외우라고 하는지 잘 몰랐지요. 그런데 한 단씩 올라가면서 7단을 넘어서는 순간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포기하고도 싶었지만 혼내는 선생님이 너무나 무서워 포기할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7단을 외우고 나서 8, 9단은 아주 의외로 쉽게 외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는 구구단이 아주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별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지요. 

이 세상 안에서 이러한 점을 우리는 자주 체험하게 됩니다. 아주 어렵게 느껴지던 것들이 어디 하나 둘입니까? 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들 때문에 어렵고 힘들다고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이야기했던 적이 무척이나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렇게 힘들다고 하는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바로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 결과를 통해 얻게 된 것입니다. 

결국 지금 내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이 영원히 나의 앞길을 막는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구구단을 외우듯 하나둘 기본부터 착실히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기본기 하나를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이지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세상의 사람들이 쫓고 있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풍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십자가와 같이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구구단 이야기처럼,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은 나의 십자가가 결국 편안하게 주님을 따르는 참된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 어려움을 겪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래서 지금 겪는 고통과 시련 때문에 주님을 떠난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분명 나를 더욱 더 성장시키시려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주님 안에서 참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죽으면 살 것이고

-전삼용신부-

 

제가 한 사람을 알게 되었을 때 제 자신이 그렇게 이타적이고 헌신적일 수 있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밤새 전화기를 붙잡고 고민을 들어줄 수 있었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도 신발 끈을 묶어 줄 수 있었고, 벤치가 차가와 보여 겉옷을 벗어 깔아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자매를 집에 바래다주고 돌아서는데 그 자매가 그만 개똥을 밟은 것이었습니다. 참 안쓰럽기는 하였는데 다시 달려가기가 귀찮아 그냥 웃어넘기며 깨끗이 씻고 들어가라고 하며 돌아섰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며 깨달았습니다. ‘이젠 우린 오래된 연인이 되어버렸구나!’

처음의 헌신적인 마음은 온데간데없어졌고 그 발에 묻은 더러운 것의 냄새를 맡고 그것을 쳐다보는 것이 역겹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 후로 태양이 서쪽 하늘로 저물어가는 것처럼 통화시간도 줄어들고 만나는 횟수도 줄어들고 할 이야기도 줄어들고 그렇게 자연스레 관계가 정리되어갔습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 헌신하기가 조금씩 싫어진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도 사랑도 그렇게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요즘은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찾으려만 한다면 굉장히 많겠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육체적으로 더 편한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어제 저녁에도 중고등부 교사실에 이번 주에 시작하는 겨울신앙학교를 준비하느라 그런지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냥 지나쳐 사제관으로 들어와 쉬었습니다. 사제관에 들어와서는 ‘들어가서 고생한다고 이야기라도 해 주었으면 좋았을걸!’하며 후회스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매일 매일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시험대입니다. 어제는 그 시험에서 졌던 것입니다.

 

네로 황제의 박해시절 베드로는 로마를 떠납니다. 조금 가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향하고 계신 것을 만납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너를 대신해 내가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간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매일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위해 신발의 바닥에 붙은 더러운 물질을 닦아주고 싶은 헌신적인 마음이 없다면 동시에 그 사람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또 이웃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위하는 길은 이웃을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는 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바로 말뿐이고 실천이 없는 믿음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 것을 하나도 내어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라고 말만 하는 것은 위선이란 것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내가 사랑 때문에 힘들고 고통스럽지 않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고통이 죽을 것처럼 힘들다면 사랑의 완성의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부부가 사랑해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듯이, 그 목숨을 바치는 완전한 십자가의 사랑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나 또한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고통 없이 태어나는 생명은 하나도 없듯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는 인간의 죄의 보속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고 당신도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십자가의 죽음으로 교회를 탄생시키고, 당신은 부활하여 다시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십니다. 십자가 없는 탄생도 없고 부활도 없습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는 고통과 함께 죽었다가 참 아내요 참 어머니로 새로 태어나듯이 그리스도도 당신 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새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을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고통을 넘어선 새로운 탄생을 위한 문턱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아기를 낳는 고통을 겪어야만 어머니로 새로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그리스도처럼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어떤 사람을 새로 태어나기 위해 내 자신을 소진시킨다면, 오늘도 새로운 그리스도인으로 나 자신이 그만큼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해 우리 자신을 소진시킵시다.

 

발자국의 가치     

-김효준 신부-

 

겨울 산행 중에 길을 잃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눈 덮인 산속을 헤매고 다닙니다. 두려움이 밀려오고 눈물이 나고 그리고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 순간 기적처럼 눈 위에 새겨진 선명한 발자국을 발견합니다. 
평소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큼이나 하찮게 여겨지던 그 발자국이 
지금은 내게 새로운 삶을 선사합니다. 깊은 산속 눈 위에 새겨진 발자국은 
위기와 죽음의 상황에 처했을 때 비로소 그 고귀한 가치를 드러냅니다. 
지금 당장은 그 가치를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이 
‘무가치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 가치는 언젠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다만 지금 당장 알지 못할 뿐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왜 나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지, 왜 내가 무거운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으니 설득력이 없고, 설득력이 없으니 실행에 옮기기는 더욱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입니다. 다만, 눈 위의 발자국처
럼, 지금은 길을 잃지 않고 자신 있게 걸어가고 있는 내겐 무가치한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길을 잃을 것이고 눈 위의 발자국은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 될 것입니다. 
그런 날이 올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남겨 주신 발자국을 찾으십시오.

 

하느님을 섬기는 삶

-이민순 수녀-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앞두고 당신을 따라오는 군중을 가까이 부르셔서, 그들한테 당신을 따름에 대한 결단과 그에 따른 의무사항을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를 버리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마르코복음 1장 18절의 소명사화에서 제자들이 즉각적으로 자기한테 속한 외적인 것과 친족관계를 끊어버리고 따라나서는데 여기 34절에서는 자신을 버리는 더 본질적 결단을 촉구 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갈라티아서 2장 19 – 20절의 바오로처럼 나의 신조, 나의 의지를 죽이고 예수님의 의지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 십자가’ 란 나의 본성적인 약함 또는 이것으로 말미암은 허물과 내가 해야 할 의무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다시 말해 복음을 살아내야 하는 의무를 말합니다. 그리고 시대적으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받을 고통 또는 제자들과 순교자들처럼 죄인으로 고발되어 십자가형을 받아 죽을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버리는 결단과 십자가의 수모와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나의 전 존재가 신앙으로 알아듣고 응답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니에서 고뇌와 절규에 찬 밤을 보내셨듯이 ( 마르 14,32 – 42 )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아듣고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그로 말미암은 나의 고통, 고뇌, 피하고 싶은 마음 등을 하느님께 탄원하며 울부짖는 기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두려움을 모두 하느님께 드렸을 때 하느님께서 힘을 주시어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십니다. 이 여정을 통해 내 힘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는 없어지고 하느님의 의지가 나를 움직여 하느님을 섬기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김찬선신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 말씀을 듣고 누구나 의문이 생길 겁니다.
버리는 나는 누구이고,
버려야 할 나는 누구인가?
나를 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나를 버린다고 하니
버려야 할 나란 집어 들고 있는 나, 
또는 소유하고 있는 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려놓으면 가볍고 들고 있으면 무거울 텐데 왜 들고 있습니까?
주어버리면 평안하고 가지고 있으면 불안할 텐데 왜 가지고 있습니까?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하면 자기가 없어지는데
사랑을 하지 않고 좋아하기 때문이고,
좋아하는 순간 그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를 보면 내 거, 네 거가 없습니다.
그래서 네 것이 아니라고 해도 남의 물건을 그냥 가집니다.
구별지區別知, 또는 구별심區別心이 없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것을 가져도 내 것으로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모든 선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사용하면 
내 것, 네 것이 사라지면서 너와 내가 사라지는데,
내 것, 네 것을 구별하여 소유하는 순간 너와 내가 구별이 되고 
나와 너 대신, 곧 사랑 대신
내 것과 네 것, 곧 소유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들들은 “내 것”을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와 떨어져 나갑니다.
내 것 네 것이 없는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여 같이 살자고 하지만
내 것 네 것이 있는 아들은 내 것은 챙기고 아버지와는 헤어집니다.

창세기에서 선을 내 것으로 소유하는 순간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알게 되고
자기를 부끄러워하기 시작하며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칩니다.

벌거벗은 자기,
아무 것도 없는 자기가 부끄러워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쳐 숨는데,
갓난아기는 벌거벗은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벌거벗음으로 인해 더 사랑합니다.

사랑의 나는 이런 소유적 자아를 버려야 합니다.
아니, 사랑하기 위해서 나를 비롯한 모든 소유물을 내어놓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공동으로 소유하고 사용한 초대 교회처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양승국신부-

<길동무 같은 십자가>

  제게 지워지는 가장 큰 십자가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아무래도 제게 있어 가장 큰 십자가는 제게 과중한, 동시에 과분한, 그래서 몹시 부담스러운, 그래서 늘 도망가고 싶은 ‘직책’이었습니다.

  꽤나 이른 나이부터 제게 그 부담스런 ‘직책’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직책이란 것이 형제들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고, 또 앞장서서 모범을 보여야 하고, 공동체를 이끌어야 하는 부담스러운 것이었기에, 또 옷에 잘 맞지 않는 옷같이 불편했기에, 늘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도망가려고 하면 할수록, 단호하게 거절하고 사양할수록 더 제게 맡겨지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은데 굳이 하기 싫다는 사람에게 계속 일을 맡기는 장상들이 밉기도 하고 이해하기 힘들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지워주시는 신비의 십자가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직책을 통해서 더 많이 봉사하고, 그 책책을 통해서 더 많이 사랑하고, 그 직책을 통해서 형제적 친교를 위해 더 깊이 투신하라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마음이 많이 편해졌습니다.

  십자가라는 것, 참으로 묘합니다. 피하려고 하면 피하려 할수록 더 크게 다가옵니다. 도망가려고 하면 할수록 더 집요하게 쫓아옵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는 차라리 날 잡아 잡수세요, 하고 두 손 두 발 다 드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마음 크게 먹고, 그러려니 하고, 그냥 십자가를 껴안는 자세가 더 필요합니다. 있는 그대로, 주어지는 그대로 십자가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려는 관대한 마음이 요구됩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끊임없이 다가오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때로 정말 수용하기 힘듭니다. 때로 너무나 억울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내 십자가만 무거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필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십자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십자가는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목숨 붙어있는 한 끝까지 따라다니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 바꾸려하지 말고, 떨쳐버리려 하지 말고, 몸부림치지 말고, 그저 친구처럼, 길동무처럼, 연인처럼 여기며 그렇게 살아갈 일입니다. 그렇게 마음먹게 될 때 신기한 일이 한 가지 생깁니다.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던 십자가가 가벼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나를 짓누르던 십자가가 편한 멍에로 변화되는 기적이 생겨납니다.

 

 

십자가     

-신효원-

 

기도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이천 년 전 예수님 발치에서 그분을 바라보던,
그분을 따르던 이들이 오늘 다시 모인 것 같습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으러 오신 그분을 만나러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옵니다. 상처받고 병든
 
사람들이 그분의 손을 잡으러 옵니다.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은 이들이 예수님께 자신을 맡기러 옵니다
. 
로사 씨는 작년 봄에 산골로 이사를 했습니다. 교사였던 남편이 명퇴를

하고 농사를 짓기로 한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일하고 기도하고 글을 쓰는 것이
남편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기뻐하는 남편을 지켜보며 차를 끓이고 함께 김을
매면서 로사 씨는 행복했습니다. 겨울부터 기도회에 나온 로사 씨는 말없이 
기도에만 열중했습니다. 새봄이 왔을때 로사 씨가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
로사 씨가 말했습니다. “지난가을에 제가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고였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루지 못한 
남편의 꿈이 안타까웠고 더 사랑하지 못한 내 자신이 가여웠습니다. 하루하루를

지탱하기 어려워서 기도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남편을 그렇게 일찍
데려가신 뜻은 모르겠지만 그분은 고통 중에 함께 계시고 나보다 더 아파하시며
고통을 통해서 나를 부르셨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이제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갈 힘을 얻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 이창하-

 

얼마 전 중학교 동창들을 만났습니다. 결혼하고 애들 키우느라 서로 그리워만 하다가 무려 5년 만에 남편과 아이들한테서 벗어나 결혼 전처럼 홀가분하게 한바탕 수다를 떨었습니다. 한 친구가 저한테 물었습니다. “도대체 네가 일하는 곳은 뭐하는 곳이야?” 다른 친구도 맞장구칩니다. “맞아, 너 교회기관에서 일한다고 하면 무진장 착한 일 하는 줄 알아.” 정말 폼나게 대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신자도 아닌 친구들한테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생명운동을 하는 곳이야.” 친구들 반응이 썰렁합니다. 일단 생명운동이라는 용어 자체가 매우 생소한가 봅니다.
사실 같은 신자라도
 생명운동
을 설명하고 동참을 이끌어 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당장 먹고사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많은 사람들이 외면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는 생명공학 시대에 생명윤리 얘기를 꺼냈다간 광신자 취급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배아
·태아 단계를 거쳐 태어나고 아프고 다른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다 마지막엔 자신의 죽음을 맞게 됩니다. 생명문제는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운동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기도하기, 교육 참석하기, 반생명적인 공약을 내건 정치인에게 투표하지 않기 등 참여 수준과 방법도 다양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구원 사명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요한 10,10) 마침 오늘 복음의 부제는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입니다. 여러분! 생명의 길에 함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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