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3일 연중 제7주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마태 5,38-48)
I say to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that you may be children of your heavenly Father,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 하느님께서 그러하시듯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르신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제1독서). 이 세상의 지혜는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일 따름이다. 복음 선포자는 신자들을 위해 존재하며, 신자들 모두는 하느님의 것인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고대법의 근간인 ‘동태 복수법’을 폐기하신다. 그 대신에 원수마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 이것이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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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레위기의 유명한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르신 말씀입니다. “나, 주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복음에서도 우리는 산상 설교에서 내리신 예수님의 명령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실 놀랍기 그지없는 아찔한 말씀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되겠는가?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되겠는가?’ 하며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레위기에서 이 거룩하라는 명령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로 요약되는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거룩함이란 우리에게 멀리 있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고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때 도달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한편 복음에 나오는 완전해지라는 명령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원수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로써 이웃 사랑의 명령은 더 넓게 확장됩니다. 이 구절과 구조상 병행하고 있는 루카 복음의 말씀을 들어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5-36).
결국 완전함이란 흠 없는 완벽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늘의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그분을 닮아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의 그 어떤 기준과도 바꿀 수 없는, 주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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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경우, 성당에 들어서면 정면 벽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는 침묵 속에 계신 예수님 고상이 온통 손과 발이 못에 박혀 꼼짝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달려 있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뺨을 때리고 조롱을 해도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로 계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모습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에 대한 가르침이 참 많습니다. 용서는 용서받을 이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청할 때 성립된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용서는 아직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는 저렇게 십자고상의 모습처럼, 왼뺨을 때려도, 오른뺨을 때려도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온전한 자기 비움의 상태입니다.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조롱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바보가 되었을 때나 가능한 것입니다. 용서가 어려운 것은 이렇게 자기 존재를 무화(無化)해야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당마다 십자고상이 걸려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 죄로 말미암아 상처 받으신 하느님께서 저렇게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용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쳐다보고 생명을 얻었듯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 용서의 마음을 헤아릴 때, 상처 난 우리 마음에 새살이 돋고, 그분처럼 왼뺨도, 오른뺨도 내어 주는 바보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원수사랑 = 예수님 따라 하기
-박용식신부-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연예인들을 흉내 내고 따라하듯이 우리 신자들은 예수님을 흉내 내고 따라합니다. 예수님의 헤어스타일이나 패션이 아니라 예수님 사랑과 행동을 따라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몇 년 전에 쓴 「예수님 흉내 내기」라는 책에서 예수님을 흉내 내자고 했고, 지난해 가을 출판한 책 「예수님 따라 하기」에서는 예수님 사랑을 따라하되 원수사랑까지 따라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마태 5,38-48)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시면서, 그래야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에게 피해를 준 원수 같은 사람에게 앙갚음하고 보복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입은 피해에 복수하려는 인간 본성은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한 대 때리면 얻어맞은 아이는 두 대라도 때려서 앙갚음하려 합니다. 이런 인간의 악한 본성 때문에 예수님 시대 이전까지 이스라엘 율법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 있었습니다. 동태복수법이란 같은 형태만큼만 복수해야지 자신이 당한 피해 이상으로 보복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피해를 최대한 줄이려는 법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눈을 찔리면 눈만 찌르지 코까지 찌르지는 말라, 이빨이 부러졌으면 상대방의 이빨만 부러뜨려야지 다리까지 부러뜨리지는 말라는 식이죠.
예수님은 복수하지 말고 오히려 원수에게 잘해주고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가르침대로 원수를 사랑하고 미운 사람에게 잘해 주다가는 자신은 계속 피해만 입을 것입니다. '오른 뺨을 얻어맞고도 다른 뺨을 대주다'가는 뺨이 성할 날이 없을 것이고 '달라는 사람에게 주라'는 말씀처럼 달라는 대로 다 주다가는 자신을 위해서는 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은 인간 본능적으로는 참으로 지키기 어렵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지킬 수 있는 법은 아닌 듯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다 지킬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왜 지킬 수도 없는 법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을까요? 그 해답을 저는 이렇게 묵상합니다. "그 법을 지키는 사람에게 특별한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다.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행복을 미리 맛보게 하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로의 '초대장'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특별한 은총을 주신다는 하느님의 선포요, 공지사항이요, 초대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 초대에 응할 것인지 사양할 것인지는 자유입니다. 주님 초대를 거절하고 인간 본능대로 원수를 미워하고 보복하면서 사는 사람은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고, 주님 초대에 응해서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에게 잘 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벌써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은총과 평화를 원하는 사람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그토록 어려운지 알면서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 초대에 어떤 이는 응했고, 또 어떤 이들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원수인 사울을 죽일 수 있었으나 죽이지 않고 살려줬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느님 초대에 응한 결과 다윗은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 초대에 응하지 않고 원수를 미워하거나 보복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결과는 뻔했습니다. 앙갚음을 하고 보복을 했을 때 일시적으로는 후련하고 시원했겠지만 끝내는 더 큰 불행과 더 큰 피해를 입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와 비슷한 체험들이 있습니다.
큰 원수는 아닐지라도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원수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인생살이에서 피해를 받았을 때 보복하지 말고 잘 해주고 사랑해 주라고 가르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초대에 응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인간 상상을 초월한 은총을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 없이 믿습니다. 아멘.
자신이나 이웃
- 최인각 신부 -
예수님의 가르침 중 세상의 것과 크게 다른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원수'(怨讐)라는 낱말에는 원한(怨恨)과 복수의 마음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나에게 준 상처가 이미 가슴 깊이 새겨져 있고, 그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치가 떨리고 죽도록 미운데,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쉽게 다가오겠습니까?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을 곰곰이 묵상하며,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네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과 '원수'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보통 '악인', '원수'라고 하면, 우리는 '나쁜 사람'이나 '상처를 준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달리 '악인'이나 '원수'를, '불쌍한 사람'으로, '사랑이 필요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하신 말씀을 묵상하고 있으면, 남의 뺨을 친 사람은 정신이상자이거나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재판을 걸어 남의 속옷을 가지려는 자는 눈앞의 이익에만 연연하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한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과, 무언가를 달라고 하고 돈을 꾸려고 했던 이들은 정말 곤궁에 빠져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 참으로 불쌍한 처지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인'이나 '원수'를 '나쁜 사람'이라는 관점으로 보지 않고, '불쌍한 처지에서 ~한 사람'으로 본다면, 그 악인과 원수는 바로 나 자신이었고,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악인'으로, '원수'로 여겼던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그들의 악인이고, 원수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악인과 원수 = 자신이거나 이웃'이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예수님께서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은 바로 '불쌍한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주어라.'라는 말씀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렇기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과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신 주님 말씀이 더욱 이해가 갑니다.
몇 해 전,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으로, 사회전체가 온통 몸살을 앓은 적이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그 가족들이 많이 아파하였습니다. 어느 날 강론 중, "여러분 가운데 그 범인의 구원을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신 분 계십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딱 한 분 손을 드셨습니다. "그럼, 상처받은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분은 계십니까?"하고 물었더니 많은 분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도와 회개가 필요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저 역시, 예전에는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하고 손해를 끼치며,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쉽게 욕을 하곤 했습니다. 더욱이 마음에 들지 않는 뉴스가 나오거나, 운전 중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욕이나 거친 말을 하기보다는 그들을 위하여 복을 빌어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복이 필요한 사람은 선인과 의인보다는 불쌍한 사람(악인과 원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는 구급차나 소방차가 지나가도, 길가다 누군가 넘어져도, 누군가 싸우는 모습을 봐도, 교통사고가 난 것을 볼 때도, 누군가 내 차를 추월해도, 좋지 않은 뉴스를 들을 때에도, 누군가 욕을 하는 것들을 들어도, 십자가를 그으며 강복을 빈다. 그때마다 변해있는 제 자신을 보며 대견스러워합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선인과 악인, 사랑하는 사람과 원수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사랑하며,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여러분을 위해 정성껏 기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 주어라...
-김충수신부-
바로 이것이 우리 크리스챤들의 삶의 대원칙이다. 그러나 모든 자연인들은 이 말씀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즉시 반발을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공통된 心思이다.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수, 또는 내 아내를 욕보이고 죽인 원수, 나에게 몹쓸 짓을 한 원수, 내 재산을 가로챈 원수,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며 터무니없는 말로 비방하고 돌아다니는 원수... 등등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이 모든 인간들의 공통 심리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 여기서 사랑이란 말을 잘 해석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애정이나 우정 같은 따듯한 감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사랑"은 용서와 자비의 초자연적 노력을 말한다. 즉 그를 용서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와 복수심의 억제, 易地思之의 침착성과 인내심을 통틀어서 말한다.
또 어떻게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 뺨까지" 돌려댈 수 있겠느냐는 항변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 구 소련의 후르쉬쵸프는 예수님의 다른 말씀은 다 그런대로 이해를 할 수가 있어도 '누가 한쪽 뺨을 치거든 다른 쪽 뺨마저 돌려 대주라'는 말씀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 정말 누가 때리면 한번 맞고 그냥 미친 척 꾹 참고 있으라면 그럴 수는 있겠는데 다른 쪽 뺨까지 내어 주라는 말씀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는 말씀인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超抵抗 主義다. 대개는 무저항 비폭력을 주장하지만 예수님은 무저항 뿐 아니라 초저항을 주장하신다. 무저항이란 그냥 꾹 참고만 있는 것뿐이지 속으로는 앙심이나 복수심을 품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초저항이란 모욕과 폭력을 쓰는 사람에게 저항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한 수 더해서 용서와 자비까지 베푸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적개심이나 복수심을 품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그가 잘못하는 것을 나 자신은 물론이요, 하느님께서도 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마음이 바로 초저항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보여주신 초인적인 사랑이다.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때리고 침을 뱉고 조롱하며 모욕하는 악당들을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간절히 비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나이다." 이것이 바로 한 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까지 돌려 대주는 초저항 主義다. 복수를 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오히려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더 잘 대해주고, 축복을 해 주라는 말씀이 바로 예수님의 초저항 주의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고 그 어떤 악과도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도이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 말씀은 성서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黃金律이라는 것이다. 황금과 같이 귀하고 보배로운 가르침이라고 해서 黃金律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일찍이 많은 성현들이 소극적인 표현으로 남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왔다. 예를 들면 유대인의 대 율법학자이며 랍비였던 Hillel은 "네가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아라" 했고, 유대의 유명한 철학자 Philo는 "네가 당하기 싫은 것은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했으며, 헬라의 웅변가 Iscrates는 "다른 사람에게 당할 때 너를 노하게 하는 것은 남에게 하지 말라."고 했다.또 Stoa의 철인들은 "네게 해주기를 원치 않는 일은 너도 남에게 하지 말라"했으며, 공자는 "己所不慾을 勿施於人 하라"했다. 이 모든 훌륭한 가르침들은 모두다 소극적이요 부정적인 어법으로서 "하지 말라"는 내용들이다. 이런 식의 교육은 지나치게 말하면 아무것도 아니하고 팔장만 끼고 앉아있으면 성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철학은 "무엇을 하지 말라"가 아니라 "무엇을 하라"는 식의 적극적이요 긍정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매우 설득력이 있고 권위있는 가르침이기에 성서학자들은 입을 모아 황금율이라고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이러지 말라, 저러지 말라는 식의 부정적이요 소극적인 지도를 받으며 자라왔다. 그래서 그런지 늘 무엇엔가 억눌리고 쫓기고 숨죽이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미사 시간에 어린 아이에게 떠들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떠들지 말라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같다. 그 대신 부지런히 성가를 부르게 하거나, 성경 질문을 던지거나, 떠드는 어린이에게는 이름을 다정히 불러서 무엇인가 말을 시켜서 자연스럽게 주위를 환기시키는 작전을 쓰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성당에서 떠드는 어린이를 벌주시거나 미워하시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자비를 베푸시며 판단에 더디시고 분노를 모르신다. 성급한 비판을 하시지 않으시고 언제나 기다려 주시며 죄인을 단죄하시기보다 회개의 시간을 주시며 용서하려고 기다리고 계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하느님의 모습을 닮고 창조된 모든 인간들의 모습이어야 한다.
우리가 먼저 용서하고, 우리가 먼저 후하게 대접해주고, 우리가 먼저 사랑을 베풀면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이다. 누구나 남의 잘못은 무섭게 탓하면서 자기의 잘못은 쉽게 용서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오늘의 황금율처럼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네가 먼저 해주어라"하는 방식대로 내가 먼저 용서해주고 내가 먼저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하고, 내가 먼저 실례했다고 말을 하면 세상이 바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아주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다.
마음의 진화
-고찬근신부-
아인슈타인의 이론 중에는 작은 물질이라도 그것을 없앤다면 큰 에너지로 변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론은 반대로 큰 에너지가 작은 물질로 변할 수도 있다는 이론입니다. 물질이 변해서 에너지가 되는 것이 원자폭탄이라면 에너지가 변해서 물질이 되는 것이 창조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엄청난 힘으로 눈에 보이는 우주물질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물질들은 길고 긴 시간 동안 진화를 계속하여 지금의 동·식물이 되고 인간도 되었습니다. 동·식물과 달리 인간은 기술문명을 발전시켜왔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문자와 음악과 동영상이 허공에 가득 떠다니고, 뇌파만으로 컴퓨터를 작동하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생각하는 대로 실재가 되는 세상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므로 단순히 그런 발전이 행복을 보장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굶어 죽는 사람도 많은데 수백만 마리의 가축을 땅에 묻어야하는 일도 있고, 인류는 언제든지 스스로를 멸망시킬 수 있는 무기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기술문명이 발전하여 우리 몸은 편해졌다지만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이 완전함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과연 그 완전함은 무엇입니까? 그 완전함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마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은 긴 세월의 진화에 성공해서 지금은 편리하게 생활하며 다른 동·식물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심지어는 자멸할 수 있는 자유까지 지닌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원하시는 완전함에 이르려면 다른 측면의 진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마음의 진화가 더 필요한 것입니다.
진화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신을 계속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진화를 멈추면 도태되고 죽습니다. 마음의 진화도 어려운 일이고 그것을 멈추면 영혼이 죽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악인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일, 즉 오른뺨을 맞았을 때 다른 뺨마저 대주고, 싫은 사람과 함께 걸어가 주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고통이 따릅니다. 자비를 베푼다는 것도 나의 손해를 의미합니다.그러나 이런 고통과 손해를 통해야만 우리 마음은 진화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완전함을 향해서 진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완전함에 이르는 길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과 손해의 멍에를 지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그 길을 먼저 가셨습니다. 하느님은 그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길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완전함에 초대받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있고, 곱게 늙어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시간이 지나면 늙어가는 그 육체를 통해서 제대로 된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대로 된 인격….
사랑합시다
-맹석철신부-
예전에 뽀빠이 이상용이 진행하던 ‘장수만세’라는 노년층을 위한 TV프로그램이 있었다. 프로그램 중에 질의응답 퀴즈가 있었는데, 부부 중 한쪽이 문제를 내면 상대방이 맞히는 게임이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영감님이 “‘당신과 나’같은 사이를 두자로 뭐라고 하지”라고 말하자 할머니께서 “웬수”라고 답하셨고, 다시 영감님이“‘당신과 나처럼 평생을 함께 해로하는 것’을 네 글자로 말하면 뭐지”라고 묻자 할머니께서는 “평생웬수”라 답하셨다.
남녀가 연애하며 서로 사랑할 땐 “당신 없이 난 못 살아!” 하더니, 몇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단물 다 빠지고 나니까“당신 때문에 내가 못 살아!”가 된다. 여러분은 경험으로 다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우리들의 사랑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방법이 잘못되었기에 ‘부부’가 ‘웬수’가 되고, ‘천생연분’이 ‘평생웬수’가 되는 것이다. 부부 사랑도, 가족 사랑도 이웃과 원수 사랑도 바보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법을 바꾸라고 하신다. 약자에게는 맞서지 말고, 오른 뺨을 맞거든 왼뺨까지, 속옷을 뺏으면 겉옷까지, 천 걸음을 강요하면 이천 걸음을, 달라면 주고, 꿔 달래도 그냥 주어라.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결국 이 모든 말씀의 요지는 사랑에 어떤 조건도 달지 말라는 것이다. 사랑에는 좀스럽고 편협한 사랑이 있는가하면 한없이 넓은 하늘과 바다같은 사랑이 있다. 악질이나 선량을 가리지 않고 햇빛을 주시고, 표독한 자나 의인을 차별하지 않고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배우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잔머리를 굴리며 주판알 튀기는‘받기 위해 주는’ 이기적이고 가식적이고 소아적인 사랑이 아니다. 모두를 품어 안는 대지와 태양처럼 무조건 퍼주는 어리석은 사랑이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네 처자식만 아끼고 돌보아 준다면 그것은 세리도, 도둑강도도, 몰염치한도, 성폭력범도 … 어중이떠중이도 심지어는 짐승들도 완벽하게 살아내는 본능일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자비로운)사람이 되어라.” 여기서 완전하다는 것은, 어떤 행동이나 윤리도덕의 완벽함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완(온)전함을 뜻하는 것이다. 편협하고 이기적인 사랑을 넘어 혈육과 편정을 초월한 무조건적 사랑을 완성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나를 위해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해 너를 사랑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누가 원수인가?
-박임호신부-
부대에서 방공포병학교 교육생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여러 가지 상황들이 나오게 됩니다. 처음엔 같은 기수로 들어와서 동료애를 느끼며 잘 지내다가도 교육을 마칠 때가 되면 서로 원수같이 미워하는 교육생들이 생기지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부대로 가야 하는데 그것이 성적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지요. 나보다 누가 더 공부를 잘하면 내가 원하는 곳에 못가기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대 안에서 주워들은 말로 어디는 편하고 어디는 힘들고, 또 어디는 집에서 가깝고 어디는 멀고 하는 차이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훈련을 받고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 왔으면서도 결국 내 자신의 편안함 때문에 또는 생각의 차이 때문에 이런 상황들이 생기는 것이지요. 물론 조금이라도 편한 곳으로 가고 싶어하는 마음은 다 같을 것입니다. 어디서든 열심히 생활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지 그런 모습들이 조금 아쉽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원한이 맺힐 정도로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나 집단’이라고 합니다. 요즘에는 원수라는 말을 뜻 그대로 사용하기 보다는 폭넓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지칭하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또 자주 사용하는 말도 아니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나하고 관계없는 사람이나 멀리 있는 사람들하고 갑작스럽게 원수가 될 이유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원수와 이웃이 결정되겠지요.
그래서 그런지 오늘 예수님께서 왜 난데없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결국 서로에게 있어서 가장 가깝고 중요한 사람들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내 자신의 생각에 따라 원수와 이웃이 결정되는 그런 상황을 피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예수님 말씀의 또 다른 의미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누가 나에게 해를 끼쳐서 원수가 되기보다는 우리 스스로가 남을 원수로 만들어 버리는 상황이 더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내 생각만 하다보니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은 내 원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욕심이 되겠지요.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사랑을 나눠주시고 기회를 주시는데 하느님이 내 뜻에만 동참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은 우리의 욕심입니다.
지금 우리가 미워하고, 배척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봅시다. 때로는 그 사람들이 정말로 밉고 보기 싫어서 제발 사라줬으면 하지만, 결국 그 사람들은 내가 가장 가까이 하며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합시다. 우리가 그렇게 노력한다면 상대방 역시도 나를 그렇게 사랑해 줄 것이고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더욱 완전한 이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의 심화와 확장
-이수락신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탈출기21장에 나오는 이 말씀은 법적 규정입니다.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복수가 아니라, 법적인 형벌에 관한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죄에 대한 공정한 처벌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사법제도는 흔히 강자들의 편에 서기 쉬운 현실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규정은 눈에만 해당되는 죄를 범하였을 경우, 그것에 해당하는 벌만 주라는 것입니다.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그들을 보호하려는 노력이 이 법의 관심사입니다.
복수심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입니다. 누가 뺨을 때리면, 반사적으로 그의 뺨을 때리려고 합니다. 상대가 나보다 강해서 사정이 여의치 못하면, 멀리 가서 눈이라도 흘깁니다. “앙갚음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수심과 미움에서의 해방을 요구하십니다. 미움과 복수심은 마음과 정신을 얽어매는 모진 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집착에서 자유롭기를 바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서로에게 좋고 또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을 늘 추구하십시오.”(1테살 5, 16)라고 충고합니다. 악을 악으로 앙갚음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국, 오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강조하시는 ‘원수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사랑은 사다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다리는 두 개의 긴 나무로 이루어집니다. 사랑도 한 줄이 아니라 두 줄이어야 합니다. 한 줄은 벗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다른 한 줄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한계를 몰라야 합니다. 벽을 허물고 사랑의 영역을 넓혀 ‘원수 사랑’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사다리의 한 줄은 ‘심화’이고, 다른 한 줄은 ‘확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심화와 확장이 균형을 이루며 나아갈 때, 사랑이라는 사다리는 하느님을 향해 뻗어갈 수 있습니다.
‘원수 사랑’은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것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복음을 마무리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의 사다리를 타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예수님께서는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도 심화와 확장이라는 두 줄로 된 사랑의 사다리를 타고 하느님께로 올라가야 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가 바로 이 사랑의 사다리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오성기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주님의 축복을 기도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에서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가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당부입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3,16).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우리에게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시면서 오늘은 그 구체적 방법으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19,18)는 이웃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1. 사랑은 희생입니다.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 하느님의 숨결이 스며있는 성전인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선과 악을 구분하여 칭송과 단죄를 하기에 앞서, 사랑을 먼저 실천하고 보여 주어야 합니다. 모든 지혜와 현명함은 사랑이 없이는 위험한 도구입니다.사랑만이 모든 것을 완성하고 참 인간이 되게 합니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레위 19,17). 미워하는 사람을 만듦은 자신이 받은 상처와 피해를 생각함에서 오는 것이요, 미움과 다툼은 그 피해를 되갚고자 하는 마음에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욕심이 많으며 미움도 커지고, 상처와 피해의식이 클수록 미움이 쌓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희생으로써 변화와 성숙을 기다려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보겠습니다. 희생없이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희생으로서 사랑을 이루십시오.
2. 사랑은 용서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선에 대해서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인 것이며, 선에 대해서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며, 악에 대해서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인 것이라는 옛말대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해야할 신앙인들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원수에 대한 사랑에서 최고로 실현됩니다. 또한 그러한 사랑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자다운 행동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원한을 가진 사람을 용서하고, 미워하는 자에게 잘해주고, 악에 대해서 기도로 응하는 것은 가장 큰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용서는 생명을 낳고, 일치는 기적을 낳습니다. 반대로 미움은 죽음을 낳고, 분열은 멸망을 가져오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미워하는 사람에게 희생하고 잘해주며, 원수에게 희생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나 사이에 하느님을 개입시켜 같은 자녀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도 용서와 은총을 받을 수 있기에 서로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5).
3. 어린 시절부터 외우며, 성소를 키웠던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시인 뽈 포로의 원무(圓舞)입니다.
이 세상 모든 소녀들이
손에 손을 잡는다면
바다를 둘러싸고
원무를 출 수 있을거야.
이 세상 모든 소년들이
사공이 된다면
그들의 배로 파도 위에
멋진 다리를 놓을 수 있을거야.
그러면 이 세계를 둘러싸고
원무를 출 수 있을거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는다면….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임숙희-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우리 마음의 어둠을 비추시어 미움을 사랑으로 악을 선으로 갚으며 평화의 복음을 증언할 수 있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오늘 복음 말씀은 사랑과 용서를 주제로 제자들이 율법을 어떻게 예수님의 정신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지 가르칩니다. 제자들이 복수를 피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을 때 그들은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입니다.
첫째, 제자들은 복수를 피해야합니다. (마태 5, 38 – 42)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동태복수법 (탈출 21, 22 – 25; 레위24, 19 – 20; 신명 19, 21)은 잘못된 행위에 대해 더 많은 피해를 방지하려는 고대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단순히 그들 자신이 그들을 나쁘게 대하는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데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계속해서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예 복수하려는 생각 자체를 버리고, 무엇을 얻으려 하기보다 나누어줄 것이 없는지를 더욱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바오로도 같은 생각을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로마 12, 21) 여기에서 마태오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성실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2티모 2, 13)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의인이든지 죄인이든지 한결같이 성실하셨던 그분의 태도를 본받도록 초대받습니다. 이 길이 인간의 생각과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제자로 부르시는 분은 성실한 분이시니, 제자들이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1테살 5, 24 참조)
둘째, 제자들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마태 5, 43 – 47) 예수님은 이웃만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자들한테 그의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사랑은 자연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 (아가페) 이나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느끼는 애정 (에로스) 이나 친구들 사이에 체험되는 애정 (필리아) 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그런 종류의 느낌이 아니라 결정,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의 의지입니다. 그 사랑의 기원은 그리스도이며,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갈라 2, 20 참조) 악을 선으로 갚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마태 5, 44), 그들에게 평화로 인사 (5, 47; 5, 9 참조)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이 앎에 바탕을 둔 결정입니다.오직 이렇게 하기로 선택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딸과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제자들은 아버지를 닮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5, 48) 5, 21 – 48 에서 예수님이 가르친 새로운 율법 해석의 궁극 목적은
48절 마지막 구절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본문의 문맥에서 ‘완전함’ 이라는 말은 윤리적인 완전함이 아니라 ‘진실함’ 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진정한 사람’ 과 관계되지, ‘불완전함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 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들을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성숙한 사람들입니다.(필리 3, 14 – 15) 완전한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한”
(루카 6, 35) 아버지처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요구는 우리 행동 규범이 아버지의 행동방식을 닮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받은 신분 그대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닮듯이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묵상 (Meditatio)
마태 5, 21 – 48 에 담긴 가르침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에 옮기는 데, 우리의 내적인 자세와 사소한 감정들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마태오의 조언은 또한 상당히 실제적인 권고이기도 합니다. 미움, 화해의 어려움, 적대심 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마태오 공동체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근본적인 도전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많은 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더 높은 질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 어린 아이가 아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우리 마음으로 간직하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필립 2, 5 – 11 참조)
기도 (Oratio)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신다. 끝까지 따지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신다.
(시편 103, 8 –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