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5일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 9,30-37)
“If anyone wishes to be first,
he shall be the last of all and the servant of all.”
말씀의 초대
야고보서는 세상과 친해지면 하느님과 멀어진다고 신앙인들에게 경고한다. 그리고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하느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이라고 격려하며,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마음을 정결히 하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분께 감히 묻지도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누가 큰 사람인지에 대한 문제로 서로 다툰 것을 아시고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을 그리스도인이 아니지만 열심히 사는 훌륭한 한 친구에게 들려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조금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과 친해지면 하느님과 멀어진다는 역설적인 가르침은, 세상을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기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선(善)이라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아주 다르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들은 그 친구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도피적이고 염세적인 것 같다는 자신의 선입관을 확인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20세기의 중요한 정치 이론가이자 철학자인 아렌트가 인상적으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중세의 그리스도교 세계가 근본적으로 ‘세계 경멸’(contemptus mundi)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중세가 비록 수많은 정신적 문화적 업적을 이룩하였을지라도 이러한 부정적 세계관은 극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에 대비되는 ‘세계 사랑’(amor mundi)을 옹호합니다.
이렇게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는 비신자들을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그리스도교가 너무 세상의 가치를 비하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고 회의를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반론들은 사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현대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가 세계를 경멸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가장 올바른 방식의 ‘세계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 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세상에 전적으로 속해 있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때 가능합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수록 세상을 더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는 길이 보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있되 세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가운데 자유롭고 올바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 생명을 소중히 여기되 자신의 안위에만 집착하지 않고 부활 신비의 빛으로 지상의 삶을 비추어 볼 수 있는 마음가짐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바람직한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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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과의 만남을 끝내고 집에 들어오면서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 휴대전화를 꺼내든 순간, 많은 전화와 문자가 와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화는 모두 받지 않아도 되는 080, 060 등으로 시작되는 전화였고, 문자 역시 대리운전 선전에 관한 문자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불안했지만, 사실 불안해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특별한 일 그리고 급한 일이 생길 것 같았지만, 평소와 마찬가지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단지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아 생긴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처럼 휴대전화를 보편적으로 쓰지 않았을 때에는 분명 없었던 불안감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불안감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지요(저도 휴대전화 중독인가 봅니다). 하긴 요즘에는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도 상대방의 얼굴보다는 휴대전화를 더 많이 들여다보는 경우를 종종 체험하면서 아쉬움을 갖게 됩니다.
문명의 발전과 풍요로 많은 것을 누리는 것 같지만, 이와 반대로 정신적으로는 점점 더 피폐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예전에는 전화비로 한 가정에 2만원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요즘에는 한 사람의 전화비가 최소 3만 5천 원 정도 된다고 하니 경제적으로도 그 부담이 작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도 또 정신적으로도 손해를 주는 휴대전화를 손에서 떼지 못하는 현대의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게 손해를 주는 모든 것들을 극복하게 도와주시는 것은 물론 더 큰 행복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주님의 손길에서 왜 벗어나려고만 할까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내 몸에 휴대전화를 간직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라는 문제로 논쟁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세속적인 기준을 내세워 누가 큰 사람이냐는 논쟁을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을 따라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 기준이 바로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의 기준만을 쫓는 우리, 더욱 더 하느님의 기준이 필요한 우리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나니 마음을 비운 만큼 채울 수 있는 것도 이제야 알았습니다.(좋은 글)
받아들임과 받아들여짐
-임의준 신부-
사람과 사람은 만나고 서로 경험하고 익숙해져 갑니다.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안에서 많은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는 항상
받아 주는 이가 되고 누군가는 한없이 받아 주기만을 바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일방적인 것도 일방적인 관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한없이 받아들여 주고 용서해 주고 이해해 준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훌쩍 성장하게 됩니다.
어린이에 대한 여러 가지 이미지 중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점은 어쩌면
부족함과 나약함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들에게는 누군가가 언제나 필요하고,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하고 그들은 항상 이해받아야만 합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바라고 원하고 열망합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이 언제나 받기만 하고 원하기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어린이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선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한없는 사랑 속에 행복함을 느끼는 모
습. 어린이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 앞에서 어
떠한 모습인지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어린이는 바로 우리의 거울입니
다.
나는 늘 다른 이에게 주기만 하고 손해만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하느님의 사람인데 무엇이 두려운가
-현대일 신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제자들의 어수룩함에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도 그러합니다. 수난에 대한 예수님 말씀이 복음서에 나타난 것만도 몇 번인데 그 뜻을 모르다니, 게다가 모르면 물어봐야지 왜 묻는 것도 꺼려했을까 ? 제자들이 물어봤다면 우리는 고통의 의미에 대해 더 명확히 알 수 있지 않을까 ?
제가 선교하고 있는 본당은 파푸아뉴기니 마당 교구의 정글지역 중 하나입니다. 11개 공소를 수시로 방문해야 하는데 거리가 멀뿐 아니라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 밭을 뚫고 가야 해 곤욕스럽습니다. 하루는 비가 올 듯 말 듯해서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저희 본당 신자 한 분의 말씀이 힘이 되었습니다. “신부님, 신부님은 하느님의 사람인데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
상처받을까 두려워 사랑하지 못하고, 내 뜻대로 안 될까, 비난받을까 두려워, 남들은 나를 어떻게 볼까 두려워 선뜻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람인데 도대체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
모르면 물어보면 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아프면 울면 됩니다. 상처는 아물게 됩니다. 둘러보면 예수님은 늘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가족의 기도 손, 내 동료의 따뜻한 웃음, 심지어 겨우내 꽁꽁 얼었던 나무 등걸 밑에서 피어나는 잡초 속에도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께 묻고, 당신의 손을 꼭 잡으며, 당신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동상이몽
-김찬선신부-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어떤 안 좋은 일이 예감될 때
그리고 그것을 어느 정도 다 눈치 채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해서 아무도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예를 들어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병원에 갔더니
병명이나 그 정도는 얘기하지 않고 정밀 검사를 해보자고 하면
아주 안 좋은 상태임을 누구나 알면서도 아무 얘기 꺼내지 않습니다.
그런 얘기를 꺼내어 같이 나누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것을 직면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의 수난 예고를 제자들이 공론화하기 꺼려하는 걸
우리는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제자들에게는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얘기를 보면 이걸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수난예고를 들었음에도 오는 길에 논쟁을 하였습니다.
누가 더 높은지를 가지고 논쟁을 하였는데
세 번째 수난예고 다음의 사건을 보면 이 논쟁의 의미가 더 뚜렷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주님의 왕국이 서게 되면
제베데오 두 아들이 주님의 양쪽에 서게 해달라고 청하지요.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면서
주님은 거기서 당신이 돌아가시기 위해 올라가는데
제자들은 주님께서 거기서 수난하실 거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그럴 리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 한 침대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인데
동상이몽도 이런 동상이몽이 없지요.
죽을 꿈을 꾸는데 권력을 차지할 꿈을 꾸고 있으니 말입니다.
페르시아, 아랍, 터키, 그리스 네 나라에서 온 젊은이들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누가 그들에게 돈을 주었어요.
페르시아 친구가 “이 돈으로 안구르를 사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랍 친구가 “아니야, 나는 이납을 사고 싶어.”라고 했지요. 곁에 있던 터키 친구가, “우리는 이 돈으로 우줌을 사야 해.”라고 말하자 그리스 친구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시끄러워. 이걸로 이스타필을 살 거야.”
이렇게 네 친구는 서로 다투었는데, 그들이 다툰 것은 넷이 모두 사고 싶은 것이 같은 포도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회 안에서 사람들은 이제나 저제나 같은 이유로 다투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만큼 저 사람도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가 옳은 길을 추구하는 만큼 저 사람도 옳은 길을 가려고 애쓴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워하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마침내 그냥 둘 수 없는 존재로 여겨 죽이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다툼, 싸움의 원인은 내가 중심에 서려는 착각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서로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하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지금 다루어야 할 문제가 아니지요. 이 세상 안에 제자들이 보내진 것은 죽어서 갈 하늘 나라의 일을 지금부터 미리 걱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라고 제자로 뽑힌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세상에 예수님을 도와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라고 부르신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중심에 서려는 생각을 아예 버리라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서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힘없고 나약한 어린이를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누구든지 받아들인다면, 또한 어떻게든 받아들이기 위해 서로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이러한 마음들이 모인 이 세상 안에서는 미움과 다툼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대신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여 말씀하시고 실천하셨던 사랑이 이 세상 안에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랑이 우뚝 서는 세상, 그 세상이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낮아짐과 포용성
-전삼용신부-
몇 년 전 정말 황당한 뉴스를 보았습니다. 한 폐륜아 아들인데 살인미수로 잡혔습니다. 그가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돈을 위해 어머니 앞으로 보험을 들어놓고 어머니를 사고를 가장해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주일에 사고가 나서 죽으면 더 큰 보험금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친구에게 부탁하여 어머니를 차로 들이받았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머니는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밝혀져 아들과 그 친구는 구속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휠체어에 몸을 싣고 경찰서를 찾아가서 당신이 대신 감옥신세를 질 테니 아들을 풀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세상에 그 아들의 행동을 포용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그 아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 한 그의 어머니뿐이었습니다.
어머니들은 자녀가 그렇게 못된 짓을 하여도 다 당신들이 교육을 잘 못 시킨 탓이라며 당신들 탓을 합니다. 어머니의 포용력은 과연 어디까지일까요?
하느님은 부모에게 아기를 주시기 이전에 그 아기를 받아들일 포용력을 먼저 주십니다. 그것이 부성애와 모성애입니다. 부모는 아기가 잉태되자마자 아기를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그 아기를 보지 못했음에도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어떤 선물을 주시기 이전에 그것을 받을 준비를 미리 시키셨기 때문이고 이건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부모의 포용력을 가지라고 권고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좋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 모두에게 있는 모성애와 부성애는 자신의 아이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아이들, 모든 사람들, 모든 창조물에게까지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무한한 포용력으로 당신을 배반한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대신 죄의 보속을 하기 위해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생각들에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커지려는 사람은 그 안에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듭니다. 자신을 죽여야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자신을 버린 무한한 사랑을 이해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자신들이 너무 커지고 교만해져 있었기 때문에 상대를 포용할 어떠한 공간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부성애라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그렇게 포용력이 부족한 것은 바로 교만 때문임을 일깨워주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가리옷 유다가 왜 예수님을 배반하였을까요? 그는 겉으로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마음속으론 끝까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 안에 자신이 만든 메시아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것에 맞지 않으니 예수님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교만해지면 다른 사람이 아주 작은 실수만 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하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먼저 어머니의 포용력을 본받읍시다. 어머니는 자녀가 어떤 잘못을 해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포용력이 있습니다.
겸손은 추상적이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진정 하늘나라에서 큰 대접을 받고 싶거든, ‘받아들일 줄 아는 포용력’부터 기르라고 권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도 우리 자신들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도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모님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 모든 죄의 보속의 고통을 받아들일 포용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까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렇게 예수님이 잉태되게 된 것입니다. 성모님의 겸손한 마음과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청하도록 합시다.
최고의 사랑이 되기 위해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것은 진정 첫째가 되기 위한 것일까요?
중국 항우와 유방 시대에 한신은
가난한 집안에 볼품없는 사람으로 태어나 많은 조롱을 당하지만
백 만 대군을 거느리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건달들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라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그 모욕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도 안동 김씨 세도 하에
유림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는 모욕을 당하지만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려는 큰 꿈 때문에 그 모욕을 견디어냅니다.
위의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뜻일까요?
제가 잘 아는 한 형제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정직하고 성실하나 그것 때문에 세상을 힘들게 살았습니다.
두 번이나 사업이 실패하였습니다.
형편이 좋을 때는 말수도 적고 너그럽고 겸손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실패하고 난 뒤에는
같이 모이면 혼자서 많은 말을 하고 자기를 뽐내곤 하였습니다.
보잘 것 없고 가난한 사람이 허세를 부리고
힘 있고 잘 난 사람이 오히려 자신을 감추고 낮추는 법이지요.
위의 예수님 말씀은 이런 뜻일까요?
인간적으로 봐도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사람이 큰 사람이고
큰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인간적인 차원이 아닐 것입니다.
뒤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낮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낮춤은 낮춤의 사랑이고
낮춤의 사랑은 존경의 사랑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중에 가장 품위 있는 사랑이 존경이고,
하느님께 대한 최고의 사랑은 흠숭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랑에 있어서 최고,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어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하고
어린이를 하느님처럼 받들 줄 알아야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이를 그저 어린이로 보지 않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을 그저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으로 보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느님의 눈과 사랑을 가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 이인옥-
스승은 비장하게 수난의 길을 가시는데, 제자들은 서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다투고 있다.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데려다 제자들 가운데에 세우셨다. 아이는 제자들의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곧 제자들은 서로 큰 사람인 줄 착각하고 있지만, 예수님 눈에는 아직도 한참 어린아이로 보인다는 것이다.
어디 그들만 그럴까? 조그만 일에 자존심을 세우고 뾰족한 나, 상처 준 사람을 쉽사리 용서하지 못하고 불목한 관계를 풀지 못하는 나, 잘하면 알리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고, 잘못하면 이내 핑계거리를 찾아 책임을 면하려는 나, 신앙생활 몇십 년에 남을 지도하는 입장이 되어도 인간적인 미숙함은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내 안에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는 증거다. 안토니 블룸은 ‘마귀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자기 자신을 명상하는 허무’라고 했다. 미숙한 자신을 보는 것이 그만큼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이를 데려와 껴안으시는 행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다. 곧 자신의 유치한 모습이 한심스러울 때마다, 다른 사람의 모습에서 실망할 때마다, 힘들어도 우리 안에 사는 아이를 시선 한가운데로 데려오라는 것이다. 그 아이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따듯이 껴안아 주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바라는 ‘큰 사람’은 진정 그렇게 미숙한 서로를 인정하고 수긍하며 도닥여 주는 동안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박철현신부-
모든 것이 뚜렷하고 명백한 예수님에 비해 제자들은 인간적인 욕심과 번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서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서로 다툽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하면 전혀 싸울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조금만 더 이해할 수 있다면 세상에 드러나는 지위의 고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즉 ‘내가 더 큰 사람일 거야.’라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과 안일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명백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원하는 ‘사랑’을 실천하기보다 서로 자기가 옳다면서 ‘다툼’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자신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뜻을 먼저 헤아리는 것, 그것이 신앙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과 안일한 마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꼴찌가 되라고 합니다. 사실 꼴찌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세상의 일에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을 버릴 때 가능합니다. 눈에 ‘나’는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보일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사람이 자신의 친구와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친구는 아침마다 거르지 않고 한 신문 가판대에서 신문을 샀는데, 그날도 이 분은 어김없이 가판대 주인에게 신문 값을 내밀며 공손히 인사를 건넸지요.
“안녕하세요? 오늘도 정말로 좋은 아침이죠?”
그런데 신문을 파는 가판대 주인은 친구의 인사에 대답을 하기는커녕 잔뜩 찡그린 얼굴로 그를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신문을 내동댕이치듯 가판대 밖으로 밀쳐 내는 것이 아니겠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이 사람은 주인의 무례한 행동에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친구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 없이 신문을 받아 들고서 다시 친절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어요.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맙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러자 친구의 대답을 들은 가판대 주인은 더욱 더 큰 소리로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어떤 하루가 되든지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내 하루는 내가 알아서 보낼테니 걱정 마시오!”
그 모습을 보고는 이 사람이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저 사람이 자네에게 저토록 불손하게 구는데 자네는 왜 그 사람에게 친절하고 공손하게 대해 준단 말인가? 억울하지도 않나?”
그러자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어요.
“그 사람 때문에 나의 행동이 좌지우지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라네.”
나의 호의가 거부되었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정말로 기분이 나쁘지요. ‘어떻게 내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는 이 사람에게 어떤 호의도 베풀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의 내 마음의 변화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처음에는 순수하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았던 나의 선한 행동이, 그 사람의 한 가지 행동으로 인해서 부정적인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를까요? 선한 행동과 올바른 행동은 그 자체로 변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떤가요? 외적인 변화에 의해서 너무나도 쉽게 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바라봅니다. 분명히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도 없지요. 단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야말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변합니다. ‘누가 큰 사람이냐?’라는 논쟁을 통해서 자기 위치의 높고 낮음을 따지는 세속적인 모습으로 변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순수한 마음이 사라지면서 부정적인 모습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원칙을 말씀해주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나의 선한 행동과 올바른 행동들이 외적인 변화에 쉽게 바뀌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이 아닌,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들을 사라질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첫째 자리를 차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이를 사랑합시다.
빠다킹신부
모든 이의 종
-이정호신부-
필리핀에 있는 저희 수도회 공동체를 방문하였을 때 90세가 넘으신
아일랜드 신부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필리핀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일하시다가 연세가 들어 이제는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이 드십니다.
거기에 치매 증상도 있어 사람들을 잘 알아보지 못하십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휠체어에 앉아 수도원 복도를 오가는 수사님들과 신자들이
신부님께 인사하면 그 모두를 반갑게 받아주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짧은 대화라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떤 실제적인 활동도
할 수 없고 간호하는 이가 항상 옆에서 돌봐드려야 하는 처지였지만
신부님은 철저하게 자신을 내주며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치매 때문에 매번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낯선 이들(사실 매일 보는 얼굴이긴 하지만)에게
눈짓 하나 짧은 말 한마디를 통해 인자롭고 따스한 마음을
건네주고자 애쓰는 노 신부님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성사를 주고 큰 성과를 올린 이들에 비하면
그분은 무력하고 병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모든 기억을
잃어도 하느님의 사랑만은 그분의 마음에 남아 몸소 사랑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일등 선교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주님은 사랑과 희생의 크기로 우리를 윗자리에 앉혀주십니다.?
내가 환영하는 사람
-김홍일 신부-
너무 사랑하여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떠난 것을 눈치챘을 때, 그 사실을 확인하는 물음을 그 사람에게 던져야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상상하기조차 싫은 상황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하더라도 그 가능성을 직면하느니 애써 부인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두 번이나 반복되는 수난예고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묻기조차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내 신앙의 어리석고 어두운 그늘을 봅니다.
자신의 기대와 계획, 욕구와 생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집착은 귀를 막고, 묻는 일을 두렵게 만듭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복음은 그 묻기조차 두려운 질문들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라고 하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복되다고 하고.
나의 영적인 진보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의 실체도, 교회의 갱신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의 실체도 우리의 관심과 계획에 대한 집착으로 귀를 막고 묻기조차 두려워하는 불신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 깊은 부르심을 예감하고 묻기를 두려워하는 내 어두운 그늘이 문득 떠오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자신의 욕구·집착·기대·계획을 포기하는 것임을, 영적 진보와 성장은 정직한 질문과 직면을 통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초월하여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새삼 되새깁니다. 내가 일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며 만나는 사람, 환영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세속적 성공이나 이익을 얻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들인지,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돌려줄 것이 없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