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6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코 9,38-40)
For whoever is not against us is for us
말씀의 초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말하지만 사실 사람은 앞날의 일을 알 수 없다. 사람의 생명은 사라져 버리는 먼지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는 대신 주님에 대한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제1독서). 요한이 예수님께 당신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어떤 사람의 행위를 막으려고 하였다고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이르신다. 당신과 제자들을 반대하지 않는 이는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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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는 우리에게 사람이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며 인간의 생명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 같다고 경고합니다. 이 말씀을 귀담아들어 우리가 바삐 달려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출 때, 거기서부터 비로소 우리의 인생이 변화될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의 방식 곳곳을 덮고 있는 ‘허세’의 삶이 ‘헛됨’ 위에 서 있음을 깨달을 때만이 그것을 벗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이 참으로 약하고 위태로운 지반에 서 있음을 철저하게 느끼게 하는 글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의 『팡세』입니다. 파스칼에 따르면, 인간은 무(無)로 사라져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낄 때마다 어딘가에 몰두함으로써 그 의식의 두려움에서 달아나려고 합니다. 이러한 심리는 ‘유희’에서 잘 드러납니다. “비참함, 우리의 비참함을 위로해 주는 유일한 것은 유희(오락)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비참함 중에서 가장 큰 비참함이다. 오락은 우리를 즐겁게 하지만,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사람들이 진지하고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할 때에도 이러한 허무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점을 파스칼은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고, 싸우며 왕이 될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왕이 되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간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것은 씁쓸한 일이지만 우리에게 좋은 약이 됩니다. ‘최고’가 되려는 데 모든 힘을 기울이는 대신 인간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삶이 주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며, 이러한 깨달음에서 참된 삶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2006년 봄인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는 목욕탕의 체중계에 올라가서 깜짝 놀랐었습니다. 왜냐하면 체중계의 바늘이 76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이 몸무게는 제가 태어나서 가장 많이 나가는 숫자였지요. 사실 성지에서 매일 바깥일을 하다 보니 항상 적당한 몸무게를 유지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성지에서 3년째의 생활에 들어가서 이곳의 일이 편안하게 된 것인지, 75Kg을 넘어 76Kg까지 나가게 된 것이지요. 그러던 중에 정기 종합검진을 받으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생각했지요.
‘이 상태로 종합검진을 받으면 분명히 비만이나 과체중이 나올 것이다. 딱 5Kg만 살을 빼고서 종합검진을 받자.’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맞습니다. 살이 빠지지 않아서 종합검진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제 몸무게는 얼마 전에도 공개했듯이 81Kg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81Kg이 되어서도 너무나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불과 보름 전만해도 제 체중은 86Kg이었거든요. 운동을 해서 5Kg 감량을 했으니 얼마나 행복하던 지요.
2년 전에는 76Kg인데도 불구하고 절망에 빠져서 종합검진까지 받지 않았는데, 이제는 훨씬 더 많이 나가는 81Kg이라서 더 슬퍼해야 할 텐데 많이 감량을 했다고 이렇게 기뻐합니다.
세상의 숫자가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즉, 눈에 보이는 세속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상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기준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상태. 그 상태에 따라서 우리들의 행복은 보장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다면서 그런 일을 못하게 하겠다는 말을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세상의 기준으로 그리고 그 기준에 맞춘 자신의 생각으로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부심이 무척 강했을 거예요. 마귀를 쫓아내고, 죽어가는 사람도 말 한마디로 고치시며, 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도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예수님의 제자 아닌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는 그 사람이 꼴 보기 싫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신들은 아직 제대로 된 기적 하나 일으킨 적이 없었거든요.
바로 이렇게 세상의 기준과 자신의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다보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고발하는, 어떻게 보면 이기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그러한 것은 아닐까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교만에 빠져서 추한 이기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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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이름
-조명준 신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신앙인들에게 기적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의 여러 부분에 나오는,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놀라운 일이 내 앞에서
벌어지는 그런 것일까요?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한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훨훨 타오르다가도 때가 되면 한줄기 연기처럼 부질없이 사라질
불꽃 같은 존재, 흙으로 빚어져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숨에 의해서만
온전한 생명체가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아침에 눈을 떠
새로운 하루가 주어지는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닐까요?
그러나 매일 아침을 맞는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혹시나
‘어휴, 오늘 하루를 또 어떻게 사나?’ 하며 마지못해 맞고 있지는 않습니까?
매일 아침,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절망의 마귀,
무기력함의 마귀를 쫓고 활기찬 하루를 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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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한 짝
- 이상각 신부(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1코린 13,4) 시기와 질투는 인간을 병들게 한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한다. “평온한 마음은 몸의 생명이고 질투는 뼈의 염증이다.”(잠언 14,30) 시기와 질투는 인간을 미움과 폭력으로 이끌어 간다.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보지만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 4,2)
카인은 아벨을 시기했고, 그 때문에 동생을 죽였다. 요셉의 형들도 시기심에 사로잡혀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겼다. 시기심에 사로잡힌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다. “그는 그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마태 27,18) 예수님은 결코 시기하거나 나무라지 않으신다. 그분에게는 병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우선이다. 병자가 치유되어 고통에서 벗어난다면 누가 했건 그 자체로 그 일은 예수님께 기쁨이다.
나와 늘 함께하던 친구 녀석과 사이가 멀어졌다. 그런데 그 친구가 다른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보면서 질투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 시기심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 옆 침대에서 잠자고 있는 친구의 실내화 한 짝을 3층에서 창밖으로 집어던진 것이다. 기상 벨이 울리고 모든 친구가 세면을 하고 아침 기도와 미사를 드리러 가는 동안 그 친구는 없어진 실내화 한 짝을 찾느라 애를 먹었을 것이다.
몇 년 전 그 친구 신부를 만나 그때 일을 고백했다. “네 신발 한 짝 내가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미안하다.” 30여 년 전 소신학교 때의 일이지만 시기심·질투심이 얼마나 사람을 어리석게 만드는지 그 일을 생각하면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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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일도
-김찬선신부-
오래 전의 얘기인데 사상체질이라는 책을 누군가 가져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까지 저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재미삼아 저의 체질이 무엇인지 시험을 해보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웠던 것은 거기서 얘기하는 것이
너무나도 정확히 제가 좋아하는 음식,
저의 성격과 일치하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생활습관까지도 저와 맞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의하면 저는 태양인 체질인데
앉을 때 기대서 앉는 것을 좋아하는 것까지 거기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때 다시 한 번 깨달은 것이 모든 것이 참으로 天賦的이라는 것,
그래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우리의 생명이 바로 天賦的입니다.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셨고,
그래서 생명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 성가에 나의 생명을 주님께 드린다고 노래하는데
엄밀하게 얘기하면 나의 생명이 아닙니다.
나의 것이라면 내 생명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의 생명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하고 얘기합니다.
우리의 일도 天賦的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선택하고
나의 힘으로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나의 일로 그것을 할 때,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을 때
그것은 되는가 싶다가도 뜻대로 되지 않게 됩니다.
이렇듯 생명도, 일도 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에
우리는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자기가 하는 일에 허세를 부리며 자랑해서는 안 되고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맡기신 좋은 일은 성실히 해야 합니다.
하느님 뜻을 생각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기 힘으로 하는 것도 악이지만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 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야고보서는 얘기합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주님은 탈렌트를 땅에 묻어 둔 사람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나무라시며 벌주십니다.
오늘의 야고보서는 현재 제가 하고 있는 일의 태도에 대해서
진지한 반성을 하게 합니다.
평양에 북한 주민을 위한 식당과 병원을 세우면서
이 평화 봉사소 사업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면
아무리 어려워도 이루어질 것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면
아무리 내가 하려고 해도 안 될 것이라고 얘기해왔습니다.
이것이 저의 믿음이긴 하지만
어떤 때 저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고 저는 놀라게 됩니다.
어떤 때는 이 사업이 마치 제가 잘 해서 된 것처럼 뻐기는가 하면
어떤 때는 너무 힘들고 귀찮아서 정말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의 호응이 별로 없을 때,
그래도 도와달라고 아쉬운 소리 해야 할 때,
요즘처럼 국제 식량 사정이 나빠져 이 사업을 하기에
제가 역부족이라고 생각될 때,
남과 북의 관계자들, 특히 북측이 비협조적일 때,
이것 자기들 좋으라고 하는데
뭐 나 좋으라고 하는 줄 아나 하면서 때려 치고 싶습니다.
그러다 문득 북한의 배고픈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이 일을 맡기신 하느님께 대한 죄스런 마음에 다시 마음을 추스릅니다.
그리고 제가 당쇠라는 필명을 가진
주님의 종 마당쇠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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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길에 동참한다는 의미는...?
-김옥수 신부-
형제 자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이웃에 대하여 묵상하도록 합시다.
첫째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할 때 삶에 필요한 은총을 주셨습니다.
누구에게나 무언가를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무언가를 바로 잘 하게 하는 힘이 곧 은총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이 은총을 받지 못하면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성서에서 사람은 진흙으로 만들어졌음을 강조합니다.
둘째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더불어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안쓰러워 더불어 살도록 하와를 만들어 주셨다는 성서의 말씀을 상기합시다. 또 사도 바울로께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2장 7절에서 "성령께서 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으로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더 잘살도록 도와주라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시고, 만드셨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받은 은총을 잘 사용하는 일이 곧 선행입니다.
누군가가 무엇을 잘 한다면 그것이 곧 선행입니다. 선행은 그분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은총을 많이 받았다 한들 그것을 잘 사용하지 않으면 죄를 짓고 맙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받은 은총을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선행은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선행은 하느님을 창조주로, 자기 자신을 피조물로 증언하는 일입니다. 누군가 잘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힘으로 한 것이기에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도구로 뽑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십니다. 그러기에 뽑힌 이들은 남을 더 잘 도와주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뽑혔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를 도와 줄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 만큼 은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뽑히지 못한 사람을 더 잘 도와주라는 이유입니다. 더 잘 도와주는 것만 빼면, 다시 말하면 더 받은 은총만 없다면 서로가 다를 바 없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도와주기는커녕 남이 잘 하는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남이 잘 하는 것에서 하느님을 발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나 자신을 과시하기 위하여 남의 선행을 빼앗아 버린다든지 없애버리려 한다면 힘없는 도구는 없애 버릴 수 있겠지만 그 힘을 주신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린 서로의 삶을 돕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삶의 거들짝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은총을 주셨습니다.
서로가 더 잘 되도록 돕는 일에 우리가 받은 은총을 사용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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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양승국신부-
<연기>
인간이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수용하기 힘든 과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교 교리 상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로 건너가기 위한 하나의 강"이라고들 하지만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죽음입니다. 특히 죽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일 때 그것보다 더 큰 비극은 없습니다.
참으로 죽음은 베일에 싸인 신비입니다. 뚜렷했던 한 존재가 자취도 없이 침묵과 영원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죽음은 단절 중에서도 가장 큰 단절이자 고통 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입니다.
사랑했던 사람과 사별한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가슴 아픈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의 모습, 음성, 체취, 미소를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다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슬픔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에 긷든 의미를 추구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진리는 죽음은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수렴하는 신비로운 해결사란 것입니다.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의 서곡입니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삶의 연장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일종의 이별이지만 막연한 떠남이 아니라 재회를 전제로 한 떠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죽음 앞에 희망합니다. 결국 죽음이 있어야 영원한 생명도 있고 죽음이 있어야 영광스런 부활도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250년을 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삶을 마무리 짓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죽음입니다.
진정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건너가는 하나의 다리와도 같은 것이 죽음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죽음의 열쇠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보다 자주 그분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고 일상 안에서 작은 죽음을 거듭할 때 죽음은 우리에게 보다 의미 있는 삶의 한 부분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진실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삶에 철저하기 때문에 털끝만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사는 사람들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이미 최선의 삶을 살았기에 조금도 생에 대한 미련이나 애착을 갖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꽃피어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순간마다 과감하게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기꺼운 마음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죽을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자아를 획득하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