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5일 재의 수요일

2014. 3. 7. 오후 8:19:25

글자

2014 3 5일 재의 수요일 

'재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첫날이다. 교회가 이날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신자들의 머리 위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데에서 '재의 수요일'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 재의 예식에서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음으로써, '사람은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창세 3,19 참조)는 가르침을 깨닫게 해 준다.
오늘 재의 수요일에는 단식과 금육을 함께 지킨다.

 ☆☆☆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오 6,1-6.16-18)

 

 "Take care not to perform righteous deeds
in order that people may see them;

 

말씀의 초대

 요엘 예언자는 주님의 날을 예언한 뒤 백성에게 마음을 다하여 주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한다. 주님은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신 분이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하느님과 화해하라고 간곡하게 권고한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되며,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자 구원의 날이기 때문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자선과 기도, 단식의 올바른 태도를 가르쳐 주신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스스로 칭찬을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 기도할 때에도 드러내 보이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식할 때에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일 것이 아니라 숨어 계신 하늘의 아버지를 향해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올해의 사순 시기는 봄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성무일도』에서 사순 시기의 찬미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어느덧 세월 흘러 봄이 돌아와/ 사십 일 재계 시기 다가왔으니/ 교회의 신비로운 전통에 따라/ 마음을 가다듬어 재를 지키세."
봄바람에 설레는 마음으로 꽃나무에 새순이 돋아난 것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을 닮아 무엇인가 새로워지고 싶은 갈망이 일어납니다. 교회는 이러한 바람을 그저 흘려보내지 말고 실현해 볼 것을 촉구하며 재계를 지키라고 권고합니다. 이렇게 진지하게 재계를 지킬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신앙인답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의 이러한 종교적 실천은 결코 수행을 위한 수행이 아니며,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뜻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이 종교적 실천은 세상 안에서 주님의 뜻대로 정의와 자비가 꽃피기를 기다리고 또한 그것을 위하여 헌신하려는 노력에 속합니다. 그래서 단식과 자선의 참된 뜻은 주님의 날을 기다리며 세상에 선을 실천하려는 갈망 속에서 드러납니다.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걸작 '희생'은, 늙은 아버지가 들려준 한 수도승의 전설에 따라 바닷가의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어린이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땅과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모습입니다. 
세상의 큰 불의와 고난을 생각하면, 우리의 작은 실천들은 어쩌면 죽은 나무에서 꽃이 필 것을 기다리며 물을 주는 아이의 모습과도 같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이 바로 이 봄에 우리 마음에 찾아오신 주님의 성령이십니다. 새로운 세상을 바라며 그것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만이 새롭게 변화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미사를 드리지 않고도 재의 예식을 거행할 수 있다. 그럴 때에는 말씀 전례를 먼저 거행한다. 이날 미사의 입당송, 본기도, 독서들과 화답송을 사용한다. 그다음에 강론, 재의 축복,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을 차례로 하고, 보편 지향 기도로 끝맺는다.>

 

-서공석신부-

 

 

초기 신앙인들은 부활 축일을 앞두고 사흘을 단식하고 기도하며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데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세 가지를 실천하며,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한다고 믿었습니다. 4세기 초, 로마제국이 그리스도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자, 교회는 그 사흘의 실천을 40일로 늘렸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사순(四旬) 시기입니다. 그들이 40일을 택한 것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였다는 복음의 말씀이 있고, 우리도 예수님의 그 고행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담아 된 일입니다.

 

사순 시기의 역사가 이렇게 긴 반면, 재의 수요일 역사는 짧습니다. 모든 신자들에게 재를 뿌리는 오늘의 전례(典禮)는 15세기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재는 인생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오늘 전례에서 우리는 머리에 재를 뿌리면서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것은 창세기(3,19)에서 가져온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외면한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선과 악의 최종 기준으로 삼고자 하였을 때, 하느님이 인간에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이 그 안에 불어넣으신 하느님의 숨결이 사라지면, 재와 같이 허무한 인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허례허식을 끊어버리고, 하느님의 숨결, 곧 성령을 모시고 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사순 시기는 그때 한 그 약속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성령이 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우리가 실천하며 살겠다고 다짐하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주어졌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며, 모든 일을 우리를 기준으로 판단하고자 합니다. 나의 편안함과 나의 미래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을 잘 가꾸어서, 우리 자신이 중요하게 평가되게 처신한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 자신이 주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그들의 중심이 되어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성공하였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재물도 모으고, 지위도, 권력도 얻으려 노력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도, 하느님의 힘을 빌려 삶의 성공을 거두기 위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공해서 훌륭한 사람으로 대우받도록 해 주는 하느님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머리에 재를 뿌리는 것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재와 같이 헛된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실 때, 주신 당신의 숨결을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시게 하여,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겠다는 결심을 유도하는 오늘의 전례입니다.

 

창세기 2장은 하느님이 진흙을 빚어 사람의 모상을 만드시고, 그 코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셨더니, 살아 있는 인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인간이 하느님을 외면하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선(善)과 악(惡)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 사실을 창세기는 인간이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나무 열매를 먹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창세기는 하느님의 입을 빌려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면, 하느님의 숨결이 사라지고 흙에서 난 인간밖에 남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발현하셔서 제자들에게 숨결을 불어 넣으셨다(20,22)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숨결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실천하면서 그분의 숨결을 삽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고, 당신 한 사람을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의 일, 곧 주변의 생명들을 고치고 살리며 용서하는 일을 하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다가 당신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습니다.

 

사순 시기는 예수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하여,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길을 배우는 시기입니다. 그것을 위해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부터 사람들에게 권장된 것이 단식, 자선,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도 이 세 가지를 가식(假飾) 없이, 진실 되게 실천하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중심에 살아 계시게 하는 데 필요한 세 가지의 수행(修行)입니다.

 

단식은 모든 종교에 있는 수행입니다. 단식은 일상적으로 먹고 마시던 일을 잠시 중단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상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 인생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수행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우리 삶의 참다운 보람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합니다. 이 지구상에는 많은 생명이 아직도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일시적으로라도 그들의 고통에 참여하며, 그들도 우리와 같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수행이기도 합니다.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수행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계신 사실을 자각하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 우리도 그 베풂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었고, 그분의 숨결이 우리 안에 계셔서 나타나는 실천입니다. 우리가 베푸는 것은 돈이나 물질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시간, 우리의 정성, 우리의 지식과 기술도 우리가 이웃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좋은 것들입니다. 각자 자기만을 생각하고 바쁘게 사는, 삭막하고 살벌한 세상에 이웃에게 친절하게 또 따뜻하게 다가가는 것도 훌륭한 베풂의 실천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주인 되게 교감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우리 마음속에 죽어 있는, 미워하는 사람들을 모두 하느님에게 보여드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그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시도록, 그들을 하느님에게 내어 맡기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재를 머리 위에 뿌리면서, 우리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마음에 새롭게 새깁니다. 우리는 오늘 하느님에게 기도합니다. 하느님이 오셔서 우리의 중심이 되시고, 우리의 숨결, 곧 우리의 생명이 되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가 그분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배우고 실천할 것을 마음다짐 합니다. ◆

 

 

천국 적금    

- 임의준 신부-

 

많은 사람들이 저금을 하고 적금을 붇습니다. 당장은 필요치 않지만, 나중에 
필요해질지 모르기 때문이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적금을 
부을 때는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결과라서 답답하기도 하고 뭔가 손해 보는 
느낌도 들곤 합니다. 하지만, 적금이 만기되고 그것을 받을 때 우리는 마치 
나도 모르게 누군가 준비한 깜짝 선물을 받는 마음이 되기도 합니다. 
행복하게 될 미래의 그날을 위해서 지금 당장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는 오늘도 무언가를 조금씩 모으곤 합니다. 선행과 자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금은 그 선행과 자선의 결과가 드러나지 않고 심지어는 손해 보고 
바보가 되는 것 같아 보여도 천국 적금은 세상에 쌓이는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쌓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원한 행복으로 바뀌어 
쌓이고 있답니다. 하늘에 쌓는 우리의 선행과 자선은 세상에서처럼 아주 적은 
이자가 붙는 것이 아니라 10배 2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풍요롭고도 
아름다운 행복의 씨앗입니다. 이 정도면 우리는 성공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겠지요?
눈앞의 이익이나 편안함 때문에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나요?

류해욱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재의 수요일’ 로 사순시기가 시작됩니다. 은총과 축복의 시기인 사순시기 첫날 우리는 머리에 재를 받으며 우리 인간 존재가 본래 누구인가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빚어 지으시는 창세기 말씀을 상기할 때 우리는 다만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우리 삶의 중심은 바로 우리의 창조주, 하느님이어야 함을 묵상합니다.
오늘 복음의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의 이야기는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근원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보는 사람보다 마음 깊은 곳을 보시는 하느님을 경외하고 공경하는 마음가짐이 우리 삶의 최우선이어야 함을 묵상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정작 우리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아버지에게 잘 보이는 것이 사람한테 잘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십니다.

위선자라는 말을 몹시 듣기 싫어하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위선자처럼 행동할 수 있음을 경계하는 오늘 복음 말씀에 솔직하게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을 깊이 성찰하게 됩니다.

 

잿빛 아닌 사랑 빗깔

-김찬선신부-

 

“주 너의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올해도 사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을 지냈는데도 
사순절을 맞이하는 것은 매번 부담스럽고 올해도 부담스럽습니다.
이렇게 사순절을 맞이하고 보내는 나를 하느님께서 좋아하실까요?

그런데 왜 부담스러울까 생각해보니
사순시기가 단식이니 회개니 하는 잿빛 색깔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순시기 첫날이 재를 머리에 얹는 재의 수요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재계와 단식을 사순시기의 목표로 삼지 말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어떨까요?
무엇의 실천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
하기 싫은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하느님께 돌아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이겠습니다.
사랑하는 만큼 돌아가고픈 갈망이 클 겁니다.
사랑하는 만큼 돌아가는 길이 기쁘고 즐거울 겁니다.

사랑하는 님 만나기 위해서면 하던 일 그만 두는 거 어렵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님 만나기 위해서라면 못할 게 뭐겠습니까?

얼마 전 젊은이들과 뷔페를 같이 먹었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외식을 하러 가면 무엇을 먹을지 고르는 것이 괴롭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예전처럼 그리 맛있지 않아
숫제 집에서 먹는 것이 편하고 좋은 저이다보니
맛을 그렇게 즐기는 그들의 싱싱하고 푸르름이 너무 아름답고,
왕성한 식욕과 엄청 먹을 수 있는 그들의 위대胃大함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잘 먹는 것만 봐도 흐뭇해하시던
옛날 어르신들의 그 마음이 너무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젊은이들이 연애를 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그 좋아하는 것을 절제합니다.
아니, 잘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이지요.
아름답게 자신을 가꾸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합하기 위한 사랑의 단장 말입니다.

사순시기 재계와 단식도 하느님 사랑을 위한 영적 다이어트입니다.
시편과 성녀 글라라가 말씀하시듯 사랑하는 님에게 맞갖게 
자신을 덕으로 자신을 가꾸고 치장하는 것인데
그 덕행들 중의 하나가 재계와 단식입니다.

그러므로 단식, 그거 사랑입니다.
기도만 사랑이 아니고,
자선행위만 사랑이 아니고,
재계와 단식도 사랑입니다.

사순시기에 우리가 실천하는,
그래서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복음에서 들은 세 가지 실천,
기도,
자선, 
단식은 다 사랑입니다.
사랑 아니면 굳이 할 필요 없습니다.

억지로 하는 기도, 주님 원치 않으시고,
아까워하며 하는 자선, 주님 원치 않으시고,
인상 찌푸리고 하는 단식, 주님 원치 않으십니다.

 

 

어느 백인 교사가 인디언 보호구역 내 학교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사는 아이들에게 오늘은 특별히 어려운 문제를 낼 거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러자 인디언 아이들이 갑자기 책상을 가운데로 끌어당기더니 한데 모여 앉는 것이 아니겠어요? 교사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부정행위는 안 된다고 훈계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도리어 선생님이 이상하다는 듯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지금껏 어려운 문제는 함께 힘을 합쳐야 해결할 수 있다고 배웠는데요?”

이 인디언 아이들의 말이 크게 와 닿습니다. 사실 지금의 시대는 ‘나 홀로 최고’만을 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함께 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모든 것을 다하려 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기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것이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으며, 더 큰 결과물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어렵고 힘들 때 함께 힘을 합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렇게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생전에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당신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함께라면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왜 혼자서 만이 무엇을 하려하고, 혼자서 만이 모든 것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바로 욕심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 우리 주님께서 이천년 전 수난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들은 속죄와 보속의 시기라고 불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도록 더욱 더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지난해 ‘성지주일’에 사용했던 성지를 태워 만든 재를 머리에 바르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또는 “사람아, 흙에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함께 하지 못하게 만드는 내 안의 욕심과 이기심을 모두 버리고 주님의 창조 목적에 맞게, 또한 기쁜 소식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는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갈 때,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과 진정으로 화해하여 가장 은혜로운 순간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매년 맞이하는 사순시기입니다. 그러나 올해는 가장 특별한 가장 의미 있는 사순시기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말은 인간이 사용하는 약 중에서 가장 약효가 세다(루디야드 키플링). 

 

아무것도 아닌 우리     

-신대원 신부-

 

재의 수요일, 사순절의 시작입니다. 사순절은 40일 동안의 여정을 통하여 
주님의 수난하심과 죽으심을 묵상하고,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기입니다. 동시에 그분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우리도 주님과 함께 걸어가기로 결심하는 
은혜로운 때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흙으로 빚어내신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든지 흙으로 돌아갈 것을 명심해야 하지요.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면서 당신을 닮았다고까지 말씀해 주십니다. 
기왕에 주님의 모습을 닮았으니, 삶 또한 주님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푼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혹은 단식을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아버지께만 보여야 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주님께서도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을 위하여 수난하시고 묻히신 
주님을 생각하며, 열심히 그분의 뒤를 따라갈 것을 약속해 봅시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올바른 자선과 올바른 기도와 올바른 단식에 대한 가르침을 베풀고 계시는 만큼 묵상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올바르지 못한 태도를 취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하며 위선자
들이라는 사실입니다.세상의 속된 평가와 인정을 중시하고, 그에 좇아 가치 질서나 계급 질서를 구축하려는 이들이 범하는 작태입니다.우리 주위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묵상의 배경 삼아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추태를 일별하는 것도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어서 사고를 좀 더 깊게 진전시켰으면 하는 점은 인간 이해에 대한 층위입니다. 위선자들도 나름대로, 인간은 이런 거야, 하고 이해하며 자리매김하는 지평이 있습니다. 그 지평이 어떤 것인지 깊게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이들은 도대체 인간과 세상을 어떻게 알아들으며 받아들이고 있는지 살피며, 그 관점의 한계를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곤 인간 존재의 더 큰 성장을 위해 어떻게 그 한계를 돌파해 나아갈 수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의 나라 또는 하느님 나라는 끝없는 성장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한테 주어진 성장을 향한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지표가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잣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대하시며 움직이셨는지 깊이 알아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계셨던 그 인간 이해의 깊이에까지 도달해야 할 것입니다. 묵상 중에 예수님의 그 깊이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할 일입니다.
 

 

 

타서 재가 되도록

-김찬선신부-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왜 교회는 사순절을 시작하는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이라고 할까?
이왕이면 산뜻한 이름, 
예를 들어 “은총의 수요일”, 이렇게 이름붙이면 안 될까?

그제는 신문을 읽는데 여성들끼리 대담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한 여배우가 진보진영에 대해 따끔한 한 마디를 하였는데
“찡그리고 분노하는 사람 곁에는 아무도 가고 싶지 않다.”는 
너무도 지당한 말에 뜨끔하여
저도 우리 교회도 이러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고,
우리의 사순시기도 너무 어둡기만 하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저의 육신의 형제들은 늘 저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는데,
저보고 늘 하는 얘기가 사람들을 만나면 
손도 잡아주고 제발 좀 자주 웃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미국에 살 땐 거기 풍습이 만나면 포옹하며 인사하기에
저도 잘 웃고 포옹을 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딱딱하고 심각한 저로 바뀌었습니다.

저뿐이 아닙니다.
신자들도 비슷하여 처음 성당에 온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내가 오는 것을 싫어하나?”하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런데다 성당에서 노상 하는 얘기가 십자가이고
도저히 천국과 은총을 살아가는 사람들 같지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처럼 단식하며 오만상을 짓고,
우리는 십자가로 은총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삶만 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는 달리
우리의 십자가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형틀일 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가 타서 재가 되도록 사랑하는 것이면 은총이 될 것입니다.
그 재가 그저 有가 無로 돌아가는 虛無가 아니고
뜨겁게 타버린 사랑이라면 재도 은총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의 수요일에,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을 들으며
단지 인생의 허무함만을 마음에 새기지 않고
어차피 허무로 돌아갈 육신을 불태워
사랑이 되자고 마음 다지는 날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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