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일 연중 제8주일

2014. 3. 4. 오전 9:02:24

글자

2014년 3월 2일 연중 제8주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마태오. 6,24-34)

 

Do not worry about tomorrow


말씀의 초대

 이사야서의 오늘 말씀은 주님의 자비를 전해 준다. 제 젖먹이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여인들처럼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의 신자들에게 복음 선포자들을 그리스도의 시종이자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으로 여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님께서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이다(제2독서).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기에 세상살이에 필요한 것에만 심려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에 필요한 것들을 아신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먼저 찾아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근본적인 선택을 분명히 바라보게 합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 삶의 가치를 무시한 채 현세에 대한 관심을 끊고 영혼만을 돌보라는 잘못된 영성이나 이원론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종교적 가르침과 세상살이 사이의 채워질 수 없는 간격을 새삼 확인하게 하는 불가능한 이상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라는 예수님의 간곡한 초대입니다. 우리가 단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 있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깊은 염려와 사랑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삶의 변화는 올바른 삶의 우선순위를 가졌을 때 가능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얼마나 정곡을 찌르며 '현실적'인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재물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분부는 우리 모두에게, 곧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오만한 부자에게도, 실의와 분노로 가득 찬 궁핍한 이들에게도 절실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려는, 말 그대로의 '기쁜 소식'입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실천하는 삶의 변화를 위해서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며, 오늘 복음에 분명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곧, 세상살이에 대한 심려 이전에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삶의 가치인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정의를 추구하는 데 힘을 쏟는다면 지상의 것들을 온전하게 선용할 수 있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기술'이며, 세상살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 아신다 

- 김동일 신부-

 

하느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하느님께서는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내일, 우리가 고생하는 오늘을 하느님께서 덜어주시고자 얼마나 애쓰고 계신지를 오늘 복음에서 느낍니다. 얼핏 들으면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우리를 혼내시는 것 같습니다만, 예쁘고 소중한 우리를 하느님께서 얼마나 애지중지하시는지를 예수님께서 알려주십니다. 

진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나를 예뻐하시고, 챙겨주신다고요? 그런데 왜 제 삶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습니까? 이렇게 예수님께 묻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저희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쫓아서 오늘을 살았습니까? 아니면, 재물을 얻고자 하루를 살았습니까? 양쪽 다를 섬길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가진 것을 버리고,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다른 목소리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무슨 소용이야! 내가 먹고, 입고, 살 수 있는 돈이 있어야지! 내일을 위해 오늘 재물을 쌓아야 해!’ 라고 악신이 속삭입니다. 어떤 목소리를 들으셨습니까? 하느님의 목소리였습니까? 악신의 소리였습니까? 어떤 목소리를 따라 살았습니까? 

솔로몬처럼 영화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 우리가 걱정하고 고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사랑하는 이들과 작은 집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함께 웃을 수 있으면 충분합니다. 이 바람이 너무 과합니까? 대궐 같은 집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수성찬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내일을 살아내기 위해 우리는 걱정하고 고생해야만 합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면 좋겠습니다. 들풀이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예수님, 우리가 새나 들풀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욕심을 내서 당신을 미워하고, 업신여기고, 섬기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저 재물을 쌓기 위해 당신을 저버리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팍팍한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내야 할 지 몰라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희들에게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요?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라고요? 오늘 고생은 오늘로 충분하다고요? 그럼, 내일은 고생 없이 먹고, 입고, 잘 걱정 안 해도 됩니까, 예수님? 죄송합니다, 예수님. 저는 그런 믿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내일이 걱정됩니다. 우리 가족이 누울 집 한칸, 밥 한그릇, 두꺼운 잠바 하나가 걱정입니다. 당신께서 다 마련해 주실텐데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입니까?

저는 믿음이 약한 사람입니다. 허락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내일을 걱정하면서 선물로 받은 오늘을 기쁘게 살지도 못하고 끙끙대고 있습니다. 이런 제게 하느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주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야서 49,15)” 이렇게 진한 사랑 고백을 하시다니 부끄럽습니다. 맞아요,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서 저를 잊은 적은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제가 실패하여 좌절하고 울부짖을 때, 그 곁에서 함께 울고 계셨습니다. 제가 아파서 꼼짝할 수 없이 누워있어야 했을 때, 당신께서는 제 손을 잡고 옆에 계셨습니다. 제가 가족과 친구들과 아름다운 강과 산, 바다로 여행을 갔을 때, 자연 경관에 넋을 잃고 있을 때, 당신께서는 그 모든 것을 미리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저와 제가 사랑하는 이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제가 성공하고 무엇을 이루었을 때도 하느님 당신께서는 저와 함께 해 주셨습니다. 저보다 더 기뻐하셨습니다. 제가 숨쉬는 매순간 당신께서는 저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웃을 때나 눈물 지을 때나 제가 당신을 기억할 때나 혹은 잊고 살 때나 언제나 당신은 저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당신을 잊고 살 때가 많았습니다. 당신께 화내고 실망하고 미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당신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주인 신부-

 

사제서품을 받기 전에 사제생활의 좌우명이 될 성구를 정하게 됩니다. 신학생 때부터
몇 가지 성구를 가지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제 시절이 되어 두 가지 성구로
줄어들었지만, 고민에 빠졌습니다. 무엇을 선택할까?


하나의 성구는 지금 저의 좌우명인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이고

또 하나가 오늘 복음의 서두에 나오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였습니다.
후자의 성구를 포기한 이유는 저의 이름이 “한주인”이기에 장난스러워 보일 것 같아서였
습니다.


하지만 저의 마음에는 후자의 성구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성구입니다. 하느님만을 오로
지 바라보며 그분의 길만을 향해 걸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삶에 발을 딛고 살
아가는 존재이기에 순간순간 현세적인 것에 물들어 버릴 수 있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물들어 버림은 현세적 집착이 되어 버리고 신앙적 삶의 정체성을 잃
어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게 됩니다. 

나아가 정체성이 사라질수록 마음엔 공허함만이 남게 됨으로써 나도 모르게 현재에 대한 걱정
과 두려움, 불안감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하고 힘겨운 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됨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걱정과 두려움, 불안감에 휩싸여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까?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체험하고 살아가야 할 우리인데 말입니
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두 주인’이 아니라 당신만을 바라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만을 바
라 보고 그 안에 머물고자 하는 이들만이 현재의 삶 속에서 다가오는 여러 가지 힘겨움과
아픔을 넘어서 주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사랑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서공석신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시작합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복음은 자기 목숨을 보존하는 일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고도 말합니다. 하늘의 새들과 들에 핀 꽃들을 예로 듭니다. 새들은 먹는 일에 고민하지 않아도, 먹고 살며, 들에 핀 꽃들은 자기 스스로를 치장하지 않아도, 아름답게 입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먹고 마시는 일에 또 자기의 명예를 찾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가 투신(投身)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입니다.

 

인간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먹고 마시며 삽니다. 그리고 사회성을 지닌 인간이기에 그 사회가 자기에 대해 하는 사회적 자리매김도 중요합니다. 신앙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에게 있다고 알립니다. 그것은 우리 생명의 기원이 하느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타나는 가치관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중심에 계신 나라입니다. 하느님이 중심에 계시면, 우리의 실천 안에도 그분이 살아계셔야 합니다. 이 복음이 ‘그 의로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고 우리가 선택하는 실천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배려와 사랑과 용서라는 말이 의미하는 삶의 실천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시작하면서, 두 주인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는 원칙을 먼저 제시합니다. 한쪽을 떠받들면, 다른 한쪽은 업신여기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만을 소중히 생각한다고 생각하여도, 재물에 대한 우리의 욕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도 말합니다. 하느님에게 정성을 드려서 그분의 사랑을 받으면, 그분이 재물을 많이 주신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재물은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합니다. 그것을 가지면, 살기가 편할 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대우도 받습니다. 그 편리함과 그 대우에 정신을 빼앗긴 사람은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착각하고, 오로지 그것을 향해 매진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소홀히 합니다.

 

자유롭게 살라고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입니다. 동물이 식물보다 더 자유롭다고 말할 때, 동물은 원하는 것을 찾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말하면서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1, 27)고 말하였습니다. 인간이 참으로 자유로운 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도 스스로 실천할 때라고 말하겠습니다. 창세기가 알리는 하느님의 모습은 창조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베풀며, 번성하며 살라고 축복하는 분입니다. 탈출기는 하느님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33,19) 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면서 그분이 고쳐주고, 용서하며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몸소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유대교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아 생명을 잃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그분과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 그분을 제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죽게 한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결정하고, 그것을 집행한 사람은 로마 총독이었지만, 그 처형에 이르기까지 그분을 고발하며, 공작한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이 임박하였을 때도, 그들을 성토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며 죽음으로 나갔습니다. 루가복음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당신을 죽이는 이들을 용서하라고 하느님에게 기도하였다고 말합니다(23,34).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인류역사 안에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역사의 현장에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찾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인이 배워 실천해야 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증오에 증오로 맞서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질서, 곧 가엾이 여기고 용서하는 질서를 사는 신앙인입니다.

 

인류역사 안에 출현한 많은 종교들은 인간이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살라고 가르칩니다. 입적(入寂)하신 법정(法頂) 스님으로 말미암아 각광 받은 ‘무소유(無所有)’라는 주제가 있고, 우리의 선비들이 살아서 보여준 청빈낙도(淸貧樂道)라는 경지도 있습니다. 모두가 종교적 직관을 배경으로 참다운 인간의 자유가 추구하는 경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은 무소유나 청빈낙도의 경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재물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가 있다는 사실을 비극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루가복음서가 전하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16,19-31)에서 복음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비극이라 말하지 않고, “부자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도” 라자로가 배를 채우지 못한 사실을 비극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말하는 참다운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누어서 관대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고린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부유해져 매우 후한 인심을 베풀게 되고, 우리를 통하여 그 인심은 하느님에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2고린 9,11) 재물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말고,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도구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쉽게 착각합니다. 재물이나 명예를 얻기 위한 신앙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교회공동체 안에 어떤 역할을 맡은 사람은 그것이 섬김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것이 자기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착각에서 우리를 깨어나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비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이 우리 삶의 원리로 살아 계실 것을 빕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를 찾고 있는지, 혹은 내 나라를 찾고 있는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찾고 있는지, 혹은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나 않는지를 반성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도 우리가 기도 안에 잊지 말아야 할 진리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간청할 것은 어느 간질환자 소년의 아버지(마르 9,24)와 같이 그 믿음의 부족을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어제는 강화에 있는 인천 신학교에서 직수여식이 있었습니다. 성직선발예식과 착의식, 독서직, 시종직을 신학생들이 받았지요. 그런데 이 신학생들을 보면서 참 시간이 빠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본당신부일 때, 막 신학교에 들어갔던 신학생이 벌써 부제품을 앞둔 대학원 2학년이 되어 시종직을 받았습니다. 또한 성소국장에 부임해서 처음으로 신학교에 입학시켰던 학생들은 4학년이 되어 어제 독서직을 받았네요. 

이렇게 빨리 가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더욱 더 바쁘게 살아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목표가 과연 바쁘게 사는 것일까요? 사실 바쁨이라는 것은 절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소위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한가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걱정 역시 끊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 바빠서 걱정이고, 반대로 한가해지면 한가해서 불안하다고 걱정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너도나도 다 바쁜 것 같습니다. 길거리를 봐도 서둘러 걷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요. 심지어 초등학생들도 ‘바쁘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안한 마음을 벗어 버리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하루를 투자해서 산을 오릅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바쁘다는 마음을 가지고 산을 오를 수 있을까요? 온갖 종류의 걱정거리들을 저 멀리 두고 산에 올라야 기쁨의 미소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또 걱정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약간 떨어져서 바라보는 시간이 있어야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어 더 잘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언제나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커다란 용기를 불어 넣어주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그런데 이 말씀에 앞서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고 하시지요.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걱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 없어서 세상일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안고 산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찾고 또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나갈 때, 전도서에 나와 있듯이 우리가 걱정하는 모든 세상 일 모두가 얼마나 헛되고 부질없는 지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가 말씀하시듯,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절대로 잊지 않으십니다. 이에 용기를 가지고 힘차게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걱정은 모두 잊고 말이지요. 

 

 

감사하는 마음에는 생명력이 있다. 무럭무럭 자라기도 하고 때로는 결실을 맺기도 하니 말이다(퀴스 텐마허).

 


 

 

 

여유 있는 삶

 

 

 

 


자전거를 탈 때 페달을 힘차게 밟으면 밟을수록 속도가 올라갑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페달을 밟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힘이 들어서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페달을 밟지 않고 그냥 있어도 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내리막에서는 굳이 페달을 밟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저절로 앞으로 내려가니까요. 

우리의 삶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앞으로 계속 가야한다면서 페달을 쉬지 않고 밟으면 금세 지치는 것처럼, 때로는 쉬기도 하고 때로는 즐기는 시간도 필요한 것입니다. 내리막에서도 페달을 밟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일만 해야 잘 사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유 있는 삶을 많은 이들이 꿈꾸고 있으며, 먼 훗날에 내가 누릴 시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노는 것도 힘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요. 먼 훗날 꼬부랑 노인이 되어서 과연 내가 하고 싶은 취미활동을 누리면서 여유를 즐길 수 있을까요? 

여유는 어떤 특별한 시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가지고 누려야 할 시간입니다. 이러한 여유가 우리의 삶을 더욱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특히 주님과 나의 관계를 더 깊이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얻을 수 있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김대열신부-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마태오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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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십니다.
두 주인이란 하느님과 재물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뜻은 간단합니다.
결국 영원한 생명에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항상 식별하면서 선택하라는 말씀이십니다.

무엇을 먹고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떻게 먹을 것, 입을 것 걱정하지 않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모든 걱정을 털어버리고 어떻게 이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조건을 무시할 수 없는 이상,

 

각자의 삶이 다할 때까지 걱정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마태오6,34)
그리고 그분께서도 걱정하시면서 사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마태오 26,42)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걱정해야만 하는 것’을 걱정하라는 말씀이십니다.
결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일 때문에 걱정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우리가 지금 걱정하는 내용들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뒤돌아보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지를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항상 기억하고, 부딪히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라는 말씀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서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고백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야49,15)

 

 

 

 

 

 

 

 

 

 

 

 

 

 

 < 내 마음의 제대 위에서는 누구를 위해 제물이 바쳐지는가? >

 

 

         -전삼용신부-

 


 

 

   성지순례 다녀오면서 비행기에서 박중훈이 처음으로 감독한 톱스타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과 관련이 깊어 오늘도 영화 이야기로 시작해봅니다.

 

주인공 엄태웅은 톱스타 김민준의 메니저입니다. 나이는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엄태웅에게 김민준의 의미는 삶의 의미이자 구세주이고 전부인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엄태웅도 연기를 해 보고 싶은 야망이 있는데 자신에게 기회를 줄 인물은 톱스타 김민준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기회가 찾아옵니다. 김민준이 음주운전을 하다가 오토바이를 탄 사람을 가볍게 치게 됩니다. 그러나 톱스타인 까닭에 내리지 못하고 뺑소니를 하게 됩니다. 엄태웅은 스스로 나서서 자신이 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겠다고 합니다. 이에 김민준은 엄태웅에게 기회를 주어 자신이 출연중인 드라마에 엄태웅을 넣어주고 연기 연습까지 시켜주며 엄태웅을 키워줍니다. 드라마는 대박이 났고 엄태웅도 덩달아 인기가 치솟았습니다. 엄태웅은 처음으로 느껴보는 인기에 감동하고 자신을 키워준 김민준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을 계기고 엄태웅은 김민준의 인기를 넘어서게 됩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인 것입니다. 엄태웅은 더 이상 김민준의 메니저였다는 이야기를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더구나 김민준의 여자까지도 좋아해서 빼앗으려 합니다. 이에 김민준도 엄태웅에게 화를 내고 둘의 사이는 아주 안 좋게 흘러가게 됩니다. 엄태웅은 여러 사람들을 이용해 김민준의 옛 잘못을 들추어내어 그를 스타반열에서 끌어내립니다. 김민준은 모든 것을 잃고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엄태웅은 이것도 모자라 김민준이 출연하려고 했던 영화를 자신이 직접 돈을 투자하여 주인공을 맡으려합니다. 김민준보다 연기도 못하고 김민준이 키워주었고 또 김민준 없이는 하나도 할 줄 모른다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김민준 없이도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열등감이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하다보니 매우 예민해지고 이젠 이 영화를 성공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다그치게 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영화도 대박을 치게 되고 비로소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톱스타가 되게 된 엄태웅, 그러나 그의 곁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김민준을 끌어내리기 위해 안 좋은 소문을 함께 퍼뜨렸던 사람들에 의해 시달리게 됩니다. 그의 약점을 아는 이들은 그를 괴롭히지만 더 이상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술기운에 차로 받았고 그렇게 살인미수로 그의 인기 또한 허망하게 사라지게 됩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엄태웅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성공을 노리던 한 사람이 엄태웅에게 한 대사가 머리에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싸움에서 지는 사람은 약한 사람이 아니다. 잃을 게 많은 사람이 지는 거야.”

 

잃을 게 많은 사람의 마음 안에는 항상 무엇이 있겠습니까? 바로 걱정이 있습니다. ‘두려움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걱정하는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십니다.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제대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 안에도 각자의 제단이 있습니다. 제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바로 제물을 바치는 일입니다. 모든 관계는 상대에게 제물을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고 그렇게 자신을 바치는 행위가 일어나는 장소가 바로 마음이고 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우상을 섬기는지 하느님을 섬기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나의 제단 위에서 누구에게 제물이 바쳐지는가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엄태웅은 처음에 김민준을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랬더니 김민준과 사이가 좋아져서 김민준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걱정할 것도 없이 인기를 얻어갑니다. 그러나 더 이상 김민준을 위해 희생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의 여자까지도 빼앗으려 합니다. 그의 주인은 이제 인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가장 큰 우상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이제 누구에게도 제물을 주기를 원치 않고 다른 이들이 자신을 위해 제물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제물이 바쳐지지 않고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에너지를 쏟는 사람의 마음은 온통 걱정과 두려움으로 쌓여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잃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것을 잃는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얻으려고 하면 이 세상에서 걱정만을 얻고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유대인의 교훈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산골에 삼 형제가 살았는데, 그들에게는 신기한 보화가 하나씩 있었습니다. 첫째에게는 멀리 보는 망원경이 있었고, 둘째에게는 하늘을 나는 양탄자가 있었고, 셋째에게는 모든 병을 낫게 하는 사과 한 개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나라 왕의 외동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누구든지 내 딸의 병을 고치는 자를 사위로 삼고,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방을 붙였습니다.

 

그 방을 첫째가 가진 망원경으로 멀리서 보고, 둘째가 가진 양탄자를 타고 와서, 셋째가 가진 사과를 먹여 공주를 살려냈습니다. 세 사람이 다 공을 세워서 왕은 누구를 사위로 삼을지 고민하다가 망원경과 양탄자는 그대로 있지만 사과는 더 이상 없으니까 셋째가 가장 큰 희생을 했다.’고 여기고 셋째를 사위로 삼았다고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온갖 좋은 것이 온다고 믿는다면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관계를 위해서는 자신을 바치는 희생이 따라야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는 당연한 이유는 그분들이 그만큼 나를 위해 희생하시며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희생이 바쳐지는 곳이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이 곧 제대입니다. 제대가 곧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위해 당신 자신의 뜻을 십자가 위에 불살라 바쳤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영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시간, 에너지, 제물, 모든 것을 진정 하느님을 위해 바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 바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재물이나 명예, 쾌락 등을 위해 나의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습니까?

 

만약 살아가면서 걱정이나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충분한 제물을 드리지 못해서 스스로 불안해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나에게 모든 것을 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주인이십니다. 나의 제대가 그분께 드리는 제물로 불이 결코 꺼지지 않게 합시다. 그러면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저절로 내 안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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