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 월 3 일연중 제8주간 월요일

2014. 3. 4. 오전 9:03:30

글자

2014 3  3 일연중 8주간 월요일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르 10,17-27 )

 

You are lacking in one thing.
Go, sell what you have,
and give to the poor
and you will have treasure in heaven; 
then come, follow me.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첫째 서간에서 환난에 놓인 신앙인들에게 하늘에 간직된 신앙의 상속 재산에 대한 기억을 권고한다. 지금의 시련은 믿음의 정화와 단련을 위한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의 길을 물었던 부자 한 사람은, 그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슬퍼하며 떠나간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비유를 드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교회가 가난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관심을 돌리는 것은 늘 쇄신의 중요한 표지였습니다. 지금의 교황님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택하셨을 때 우리는 다른 설명 없이도 앞으로 어떤 새로운 일이 전개될 것인지를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한 잡지는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이 곧 '프로그램'"이라는 표현으로 새 교황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그 기대가 어긋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세계의 많은 이가 감동하면서 교황님의 행보를 바라보고 또 따르고 있습니다.
교황님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하게 된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교황님은 교황 선거가 끝난 뒤 가깝게 지내던 브라질의 한 추기경에게서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말라.'는 간곡한 조언을 들었을 때, 바로 '가난'을 반려자로 삼으며 통회 생활을 했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모습이 교회 구석구석에 살아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여기신 교황님의 생각은, 다름 아니라 복음의 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다짐이라 하겠습니다. 교황님의 이 다짐의 뿌리를, 연민 가득하면서도 단호한 예수님의 오늘 말씀에서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삶의 중심에 두는 가운데 재물을 홀로 소유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나누며 그들과 함께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신앙인의 길, 교회의 길에서 결코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단히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물론 가난을 선택하는 방식과 그 정도는 삶의 형태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분별력과 현명함을 마땅히 주님께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모든 것을 팔지 않는' 신중함에, 가난한 이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하지 않고 재물에 집착하지 않을뿐더러 때로는 스스로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내적 자유와 결단이 없다면, 그것은 복음의 참뜻을 흐리게 하려는 마음이나 다름없습니다.

 

재물과 하느님 나

-김혜경 -

언젠가 사촌 오빠와 부자와 가난한 사람? 대해 열을 올리며 대화를  적이 있다. 오빠 말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부자는 어떤 식으로든 부당한 짓을 많이 해서 부를 축적한 사람이고 자선에 인색한 사람인 반면에 가난한 사람은대개 착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아마 오빠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착취와 억압을 일삼던 민주화 시대 이전의 권력자?(부자)들과 당시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민중?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부자 = 나쁜 사람’, ‘가난한사람 = 선한 사람?이라는 공식을 세워놓고 있었다.
오빠의 말에 나는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는 점과 함께 통계상 한국 천주교 신자의 생활 수준이 한국 평균 중상위를차지하고 그중에는  부자들도 많은데, 그렇다면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은 대개 나쁜 사람 무리에 속하겠다며 반박했다. 

누군가 내게 굳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분하라고 하면 선한 부자와 vs 악한 부자’, ‘선하고 가난한 사람 vs 악하고 가난한 사람?으로 나눌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오빠 말대로 부당한 짓을 많이 해서 부를 축적하고 그것을 자기만 사용하거나 비리에 휩쓸려 나쁜 권력에 악용되는 어리석은 부자들이 많지만, 열심히  흘려 부자가 되고 힘들게 얻은 부를 어려운 이웃과 나누고 사회에 환원하고자 애쓰는 선한 부자가  많다고 생각한다. 1990년도 이후에급격히 늘어난 사회복지기관의 운영은 대부분 선한 독지가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지금도 많은 부분에서 선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십시일반 모아 자선의 사회적 분위기를 이어가고는 있지만 정작 큰일은  선한 부자들이 나선다는점에 대해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선한 부자를 지향해야 한다고 본다. 
한편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의지나 노력과 달리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선한 가난한 사람이 많은 반면 게으르고 무기력하며, 생활이 무질서하고, 개념 없는 경제생활로 인해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가난의 나락으로떨어지게 하는 물귀신 같은 나쁜 가난한 사람도 많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말씀하신다.인류에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도덕과 윤리 기준이 되기 이전의 고대사회에서 사랑?·?박애?·?이타심?·?나눔?·?친교?·?봉사 등의 정신을 언급한 문헌과 사례는 드물었다. 그리스도교가 인류에게  최대의 선물은 십자가를통한 바로 이런 정신의 확산이었고, ?·?왕후?·?귀족?·?사업가 출신의 많은 성인 성녀가 역사의 과정에서 그것을몸소 실천해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제 그토록 어렵다는 , 부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하느님께서 확실하면서도 탄탄하게 닦아놓으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옛날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예전의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도 촌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커다란 잠자리 안경, 도무지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 입고 있는 옷이나 구두 역시 너무나도 어색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모습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했었고, 그래서 그러한 모습을 하고서 사진을 찍었던 것이지요. 

불과 10년 전의 모습인데 이렇게 평가가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지금 괜찮다고 하는 내 모습 역시 앞으로 10년 뒤에는 “내가 왜 이렇게 옷을 입었을까? 내가 왜 이런 머리카락을 하고 있을까?”라면서 어색해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결국 아무것도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사실 세상의 것을 쫓아가는 것은 나를 나답지 못하게 만듭니다. 물론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이 세상의 것들에 의해서 내 자신이 재단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며 대중매체는 우리에게 제시하지요. 어떤 모습을 해야 할 지, 어떤 생각을 해야 할 지, 어떤 옷을 입을지, 그리고 어떤 일을 해야 할 지를 세상의 것들이 내게 제시하면서 나를 재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고유함은 점점 사라집니다. 다른 사람과 비슷한 ‘나’만 있을 뿐, 주님 앞에 고유한 ‘나’를 찾기란 더욱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쉽게 변하는 것들에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상 것이 아닌 주님을 선택하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는 부자 청년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바로 세상 것을 버리고 주님을 선택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의 흐름에 젖어가면서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그러나 그 상태에서는 주님을 제대로 따를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비유를 여러분에게 제시해 봅니다.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를 헤쳐 나가야 하는 사람들이 그 출발점에서 항해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짐들을 옮겨 싣습니다. 그 짐에는 ‘사랑, 성공, 출세, 신앙’ 등 이런 저런 이름표가 붙어있지요. 하지만 인생이라는 바다는 워낙 거칠고 험하기 때문에 그 모든 짐들을 싣고 가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짐을 하나씩 던져 버리면서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갑니다. 이제 하느님 나라에 도착했을 때 과연 어떤 짐이 남겨 있어야 하느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꾹 움켜쥐고서는 하느님 나라에 입항할 수 없습니다. 사랑, 신앙 등의 하느님 뜻에 부합한 것들을 가지고서만 그 나라에 입항할 수 있음을 기억하며, 주님을 뒤로 하고 슬퍼하며 떠나는 부자청년의 모습이 내가 되지 않기를 다시금 다짐해야겠습니다.
당신 깊숙이 존재하는 열정이 바로 당신입니다(브리하다라냐카 우파니샤드).

하느님과 재물

-오민환-

예수님이 을 떠나십니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길을 나서시는 것이겠지요. 그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을 
꿇습니다. 간절히 구원을 청합니다. 하느님의 을 가르치는 사람은 선하신

스승님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명성을 익히 알았던 것이겠지요. 
영원한 생명은 기원전 2세기부터 사람들이 깊은 관심을 가졌던 종말론적
 
희망의 본질적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라삐처럼 하느님의 계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모세의 율법을 다 지켜왔습니다
.
그것이 의로운 사람이 되는 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어떤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부유함이 결단에 장애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소유한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게 한 원인이 바로 그 부유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선과 악 또는 의로움과 불의에 대한 윤리적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과 맘몬(재물)
사이의 결단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마태

6,24 
참조). 재물에 대한 입장이 다른 모든 물음을 결정하게 만듭니다. 
나누어지지 않은 부는 불의한 재물 곧 맘몬입니다. 죄라는 것이지요
. 
죄인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겠지요.

 

혼신의 힘을 다하여

-김찬선신부-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오늘 복음의 인물은 청하는 자의 훌륭한 자세를 보여줍니다
.
우선 달려옵니다
.
청하는 자의 열성이랄까 열의가 있습니다
.
무릎을 꿇습니다
.
청하는 자의 겸손함이 있습니다
.
청하는 내용도 아주 좋습니다
.
부귀와 영화를 청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청하며

받기 위해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묻습니다.

이런 그에게 주님께서는 부모를 비롯한 이웃 사랑을 하라 하십니다
.
이웃 사랑은 영원한 생명의 조건입니다
.
주님께서는 이것을 먼저 얘기하십니다
.
영원한 생명은 성당에 가서 오래 기도만 하면 받는 줄 알았는데
 
성당에 가서 오래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먼저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해 오늘 복음의 인물은 어렸을 때부터
 
이웃 사랑을 성실히 실천하였다고 대답합니다
.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이웃 사랑을 성실히 실천한 것을 보니
 
그는 착할 뿐 아니라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였나 봅니다
.
욕심 사납거나 남을 해칠 줄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

이것으로 충분한 듯한데
 
주님께서는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부족한 것이 하나라면 거의 완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항상 그 하나가 문제입니다
.
99
를 아무리 잘 했어도 하나가 부족하면 천국은 불가합니다
.

석수장이가 돌을 깨는데 100번째 정질에 돌이 깨집니다
.
그런데 100번째 정질에 돌이 깨지지만

99
번의 정질이 없었다면 깨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100번째 정질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98
, 99번의 꾸준한 정질도 못지않게 중요하고
첫 번째의 용기 있는 시작의 정질도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99번의 정질을 했는데도 깨지지 않자 실망을 하여

100
번째 정질을 포기한다면 돌은 깨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100번째 정질이 역시 제일 중요하며

그 한 번이 없으면 아무리 99번을 두드렸어도 
깨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마지막 한 번은 끝까지 다 하는 것이요,
깨는 것의 전부나 마찬가지입니다
.

그런데 오늘 복음의 부족한 것 한 가지, 그게 장난이 아닙니다
.
그 한 가지라는 것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니 말입니다
.
전부 다 주는 이웃 사랑 없이는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이고

전부 다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고
전부 다 걸고 주님을 따르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설렁설렁, 대충대충은 안 되고
,
혼신의 힘을 다 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해야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양승국신부-

<가정과 교회의 태양이신 성모님>

아내를 ‘안해’ 즉 ‘내 안에 떠오르는 해’ 다시 말해서 ‘남편 마음 안의 태양’이라고 재미있게 해석한 것을 보고 전적으로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한 가정 안에서 ‘아내’ 혹은 ‘어머니’는 그 가정의 빛나는 태양입니다. 떠오르는 희망입니다. 영원한 주인이자 여왕입니다.

유치원생이나 초딩 어린이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초인종을 눌러도 무반응입니다. 가방 속에서 키를 꺼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아무도 없는, 그래서 어두컴컴하고 황량한 집 속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반대로 살맛나는 가정이 있습니다. 순전히 어머니 때문입니다. 아이가 초인종도 누르기 전에 어머니는 아이의 발자국 소리를 직감적으로 알아듣고 문을 열어줍니다. 활짝 웃으면서 아이를 꼭 안아줍니다. 뿐만 아닙니다. 간식으로 과자 한 봉지 툭 던져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간식을 아주 정성껏 직접 만들어 줍니다.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 있으면 자상하게 가르쳐줍니다.

남편이 힘겨웠던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할 때도 마찬가지겠지요. 멀리서 바라보는데 집에 불이 꺼져있습니다. 짜증 제대로 나겠지요.

반대로 아내가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으며 반겨줍니다. 집안 전체는 맛갈진 음식 냄새와 소리가 진동합니다. 고등어자반 굽는 냄새, 얼큰한 매운탕 끓는 소리, 압력밥솥 돌아가는 소리...

어머니, 가정의 여왕이자 주인이 분명합니다. 어머니 없는 가정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입니다. 어머니 없는 가정, 허전하고 쓸쓸할 뿐입니다.

가정 안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막중한 것처럼 하느님의 집인 교회 안에서도 어머니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어머니 역할을 할 여인을 선택하셨는데, 그분이 곧 성모님이십니다.

우리 교회를 위해 성모님을 간택하셔서 ‘우리의 도움’이 되게 하셨으며, 우리를 위한 갖은 수고를 다 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봉사의 조력의 삶을 살도록 성모님을 이끄셨습니다. 주님의 영광스런 그날이 오기까지 성모님께서 우리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도록 준비하셨습니다.

우리의 성모님께서는 존재 자체로 철저하게도 우리의 도우미이십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서’계십니다. 그냥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방관자로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중개자, 협조자, 조력자, 활성자로 서 계십니다.

어떻게 하면 부족한 우리의 입을 대신해서 하느님께 잘 말씀드려줄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실수나 과오를 잘 변호해줄까, 어떻게 하면 우리를 하느님께 잘 드릴 수 있을까, 순간순간 고민하시고 노심초사하시는 분이 우리의 성모님이십니다.

어려운 일들을 기도단지에 담는 신앙인이 됩시다.

-김기현신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두 개의 단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걱정단지요, 또 하나는 기도 단지입니다. 우리는 생존 위협을 느끼는 두려운 상황에서 두 개의 단지 가운데 하나를 택해 우리 마음을 내맡길 수 있습니다. 어떤 단지를 택할지는 철저히 자기 몫입니다.
먼저 걱정단지를 택하는 경우를 보면 이렇습니다. 나쁜 소식이나 불행한 사건을 접할 때 그것을 걱정단지에 넣고,그 단지를 불 위에 올려놓은 다음 숟가락으로 천천히 젓습니다. 오래 않아 걱정 단지에서 비관과 절망이 보글보글 끊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상 위에 올려놓은 다음 한 숟가락씩 떠먹으면서 얼굴을 찡그리고 가슴을 움켜쥐며 절망합니다
.
이번에는 기도단지를 택하는 경우를 봅시다. 나쁜 소식이나 불행한 사건을 기도 단지에 넣어 아버지 하느님께 내맡깁니다. 곡선을 가지고도 직선을 그리실 수 있는 하느님, 어긋난 인생의 자리에서도 선한 것을 창조하실 수 있는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돌보아 주시기를 청합니다. 또 구체적으로 지난날 아버지 하느님이 돌보아 주셨던 체험을 떠올리면서 이번에도 돌보아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면 단지 안에서 희망과 용기, 그리고 위로가 만들어 지고, 그것을 먹으며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내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았을까요? 그 구체적인 모습이 오늘 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시면서, 구체적으로 이런 예를 드십니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걱정단지를 움켜 쥡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반대로 예수님은 기도단지를 움켜쥐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그 결과는 예상이 됩니다. 제자들은 비관하고 절망하며 마음 고생하겠지만, 예수님은 희망하고 용기를 가졌으리라 생각합니다
. 
우리들도 일상 안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 두려운 일들, 힘든 일들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그럴 때 걱정단지를 움켜쥐고 더 깊은 절망에 빠져들기 보다는,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나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기도단지를 움켜쥘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희망하고 위로를 얻고 용기를 내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오늘 하루, 기도 단지 안에 내 모든 어려움을 담아 봅시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양승국신부-

<주님의 옷으로 갈아입은 여러분!>

가끔씩 주제넘게 서약식이나 착복식, 서원식 등의 각별한 의미를  미사 주례를 맡게 되면 부담부터 앞서게 됩니다. 이제  수도생활을 시작하려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형제자매들, 오직 열정으로 충만한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을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하지요.

그래서 기회 닿을 때마다 써먹으려고 작성한 모범답안을 하나 마련했습니다.

"수도생활을 시작하겠다는 , 수도자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신분상승의 표시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세상의 옷을 벗고 수도복으로 갈아입는다는 것은 세상을 벗고 그리스도란 예복으로 갈아입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은 뭔가 획득하겠다는, 뭔가 상승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니라 기꺼이  세상에서 손해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착복하겠다는 것은 가장 아랫자리로 내려가겠다는 다짐입니다. 서원하겠다는 것은 의지대로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온전히 하느님께 묶어두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도자들이  좋은 자리 찾기 시작하면  수도생활은 이미     생활입니다. 수도자가 떠나라는데도  떠나고 버티기 작전으로 나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다시  없습니다. 수도자가 고상하게 꾸며진 넓은 사무실에애착을 느끼고, 안온한 독방에 갇히기 시작하면 그걸로 끝장입니다.

주님의 옷으로 갈아입은 여러분!  버리십시오. 용기를 내고 떠나십시오. 고상한 , 살맛 나는 , 때깔 나는 곳이아닌  시끄럽고 악취가 풍기는 세상의 한가운데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거기에 주님께서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미래 때문에 갈등하고 있는  젊은이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버리고 나를 따라오너라."

어찌 그리 단호하게 말씀하시는지 부자청년은 완전히 찌그러진 얼굴로 힘없이 발길을 돌렸습니다. 미래에 대해 "이거다"하는 확실한  무엇도 없는 상태에서 몽땅 버리고 따라나서라 하니 부자청년은 무척 황당했던 것입니다.

지나치리 만치 단호한 주님 말씀,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라 오라" 권고말씀  이면에는 우리의 나약함을 꿰뚫고 계시는 주님의 예리함이 깃들여져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앞에 처참하리 만치 무너지는 것이 우리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지요. 10 정도 되는 고급 아파트가   하나 마련되어있고, 방금 뽑은 임시 번호판의 최고급 승용차  대가   앞에 주차되어 있고, 10 정도의 현찰이 금고에 가득한데,  누가  낯선 길을 떠나겠습니까?  따뜻하고 배부른 상태에서는 여간해서 떠나기가 쉽지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의 모든 수도자들과 사제들이 주님의 권고에 따라 다시 한번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머나먼 길을 떠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남들이  가고싶어하는  좋은 자리가 아니라 가장 가기 싫어하는 , 가장  위험이 있고, 가장  헌신이 요구되는 곳을 향해 지체 없이 길떠나는 하루이길 빕니다.

영예나 칭송은 그것을 찾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언제나  곤란하고  형편없는 곳을 향해서 미련 없이 보따리를싸는 나날이면 좋겠습니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이상각 신부-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라고 부자 청년은 이야기한다. 예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좀 더 완전한 존재가 되어 당신과 함께하는 삶으로 초대하신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과 깊은 친교로 들어가는 삶에 진정한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제껏 자신이 누려왔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어렵게 느껴졌다. 그는 슬픈 마음으로 예수님을 떠나갔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며 주님과 함께 살기를 원하지만, 그 가운데 어떤 부분은 제외시키곤 한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나 삶 전체에서 볼 때 아주 작고 사소한 것처럼 느껴지며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혼란시키며 주님께 응답하는 것을 방해하기에 충분하다.

부자 청년의 경우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잘 지켜왔음에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그에게 부족한 한 가지, 가진 것을 나누라는 예수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 아름답고 의로우며 존재의 완성에 더 적합한 것이 아니라,단순히 더 익숙하고 편안하며 더 큰 안정감을 주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부자 청년에게 재물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서 아주 작고 사소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자 청년은 그것을 제외시켜 놓고 다른 모든 계명은 잘 지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주님을 따른다는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잘못은 반드시 우리가 어떤 나쁜 행위를 하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삶과 우리 마음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주님한테서 결코 제외시켜서는 안 되며 주님이 아닌 다른 것이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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