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4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

2014. 3. 4. 오전 9:04:38

글자

2014 3 4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
마르코 10,28-31)

“Amen, I say to you,
there is no one who has given up house

or brothers or sisters
or mother or father or children or lands
for my sake and for the sake of the Gospel
who will not receive a hundred times more

now in this present age:
houses and brothers and sisters
and mothers and children and lands,
with persecutions, and eternal life in the age to come.

 

말씀의 초대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받을 은총에 있다. 그러기에 욕망에 따른 삶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에 따른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제1독서). 베드로는 주님을 따른 것에 대한 보답을 예수님께 여쭙는다. 예수님께서는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복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고 덧붙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세상살이가 점점 힘겹다고 한숨짓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역시 경제적인 어려움의 호소가 가장 많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점점 팍팍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가득 채우다시피 하는 거친 언사들에서 우리는 사람들 안에 더욱더 쌓여 가는 폭력성을 느끼지만, 그 이면에는 현실에 대한 좌절과 미래에 대한 암울함으로 심하게 상처 입은 가련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희망을 가지고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어려움을 이겨 내며 희망찬 삶을 누리려면 굳센 용기도 필요하고 주위의 따뜻한 벗들도 필요합니다. 어둡고 답답하며 불안한 시대에 신앙인들의 가장 중요한 특권이자 사명은 희망을 안고 이 희망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희망은 이 세상의 논리와 지혜로 계산되거나 예측되어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의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알려 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주님을 따르는 길의 고난과 이에 대한 보답을 말씀하십니다.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님은 로마서 8장 24절에서 그 제목을 딴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희망은 믿음을 통한 구원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을 깊이 성찰하였습니다. 회칙의 다음 말씀은 희망을 말하기 어려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참된 실존을 새삼 기억하게 합니다. "우리의 현실에 맞설 수 있는 든든한 희망을 얻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것입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현재라면, 그리고 우리가 이 목표를 확신할 수 있다면, 또한 이 목표가 힘든 여정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것이라면, 비록 고달프더라도 우리가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는 현재입니다"(1항). 
우리가 주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삶의 길의 위대함에 감동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한,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대로 올인합시다

- 김혜경-

얼마 전 친구는 아내가 자녀교육에 올인한 듯하다며 애꿎은 술만 들이키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몇 학년이냐고 물었더니 큰애는 5학년이고 작은애는 3학년이라고 했다. 한 달에 두 아이에게 드는 학비는 150만 원 정도이고, 아내의 생활은 대부분 두 아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남편으로서 아내의 올인이 아무래도 비정상적인 것 같아 염려스럽다는 취지에서 말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주변에서 자녀
?·?남편?·?친구에게 올인했다가 자녀가 성장해 부모 곁을 떠나거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친구가 등을 돌려 상처받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본다. 최근에는 어느 젊은 부부가 게임에 올인해 어린 아기를 죽게 만든 사건도 있었다. 이런 슬픈 올인 외에도 발전을 위한 올인도 있다.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일, 좋아하는 일에 올인했다가 직업으로 성공하는 예가 그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지금 하는 일에 올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도 성공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올인하는 장면을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것을 버리고
?…”, 집도 부모 형제도 자녀도 땅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다. 
내가 세상에서 가치 있고 해볼 만하다고 거기에 올인해 그 대가로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둔다해도 과연 그것이 예수님께 올인해서 얻게 될 영원한 생명
?과 비교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처음 쳐본 볼링이 생각난다. 엉뚱한 곳에 올인해 도랑으로 빠지던 공의 신세가 아니라 제대로 된 곳에 올인해 한방에 스트라이크를 날려야 하지 않을까??

 

 혹시 세 가지 소원에 관한 동화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세 가지 소원만 들어주시면 얼마나 행복할까?’를 자주 생각했던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 소원을 들어주시겠다고 이 형제님 앞에 정말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당황했지요. 세 가지 소원이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막상 어떤 소원인지를 생각하지는 않았거든요. 그 순간 주룩주룩 비가 내렸고, 내리는 이 비가 안 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평소 비를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비를 좋아하지 않는 경우를 자주 봐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첫 번째 소원을 말했습니다. 

“하느님! 저희에게 항상 비가 오지 않는 좋은 날씨만 주십시오.”

이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니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농부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의 불평불만이 쏟아집니다. 이 형제님은 두 번째 소원을 말합니다. 

“하느님! 낮에는 좋은 날씨를 주시고, 밤에만 비가 오도록 해주십시오.”

그런데 이번에는 밤에 일하는 사람들의 불평불만이 쏟아집니다. 결국 그는 마지막 세 번째 소원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 그냥 원래대로 해주세요.”

이 형제님의 세 가지 소원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해도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을 소원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느님께서 최고의 길로 나를 인도해주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을 따름으로 인해 현세에서는 박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길인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끌어주신다는 약속을 해주십니다. 

바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굳게 믿고 끝까지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독서의 말씀처럼 거룩하신 하느님을 따라 거룩한 우리가 되는 길이 됩니다.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행복합니다(에쿠니 가오리).

 

꼴찌가 첫째에게

-오민환-

어제에 이어 오늘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열두 제자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이러한 그의 역할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마르 8,29; 9,5; 11,21 참조).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는 베드로의 말은 어제 복음의 부자와는 차별되는 자의식의 당당한 
표현으로 들립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의 한숨 섞인 반응이 나온
뒤인지라 더욱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을 다 
버렸으니 무엇을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였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따르는 제자가
받을 보상에 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현세에서 백 배의 축복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상에는 마치 욥의 운명처럼 살아
있는 동안 박해와 고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보상은 현세에서 이룰 형제적 공동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자기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궁핍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썼다는 
초대교회의 형제적 공동체 생활이 그 보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사도 4,32-37
참조). 종말론적 기다림(희망)은 공동체를 위해 함께 나누는 의무를 포함합니다.

 

주님을 따름에 따르는 것

-김찬선신부-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이 말은 앞선 복음에서 주님 따르기를 거부한 사람을 보고
베드로가 하는 말입니다.
자기들은 이 사람과는 다르다는 의기양양함이 느껴지고
,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
얄팍함과 가벼움이 느껴지지만
 
나무라기에는 너무도 인간적인 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

저도 제가 한 작은 선에 대해 얼마나 으스대고 칭찬받으려 하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낍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고상한 척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정말로 싫어하는 구린내 나는 위선입니다
.
이에 비해 베드로는 너무도 단순 솔직하게 그것을 입으로 드러냅니다
.

그래서인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전혀 나무라지 않고

따름에 따르는 상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면 상이 따른다는 말씀입니다
.
그리고 이 상이 내세에서 주어지는 영원한 상급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주어지고 그것도 백배로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것이고
,
이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아까워 아무 것도 포기하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을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믿고, 어떤 사람이 믿지 못합니까
?

마르코복음에는 마태오와 루카복음에는 없는
,
“박해도 받겠지만”이라는 말이 중간에 나옵니다
.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면 박해도 따르겠지만 보상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
모든 것을 버리고 곧 바로 백배로 되돌려 받는다면

누구나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서 바로 받게 되는 것은 박해입니다
.
그리고 이 상실과 박해의 嚴冬이 너무 길고 추울 때

이 상실과 박해는 끝나지 않을 것 같고 
그 다음에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수 있습니다
.

그러므로 믿는 사람과 믿지 못하는 사람은

상실과 박해 다음의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인 것입니다.

이번 정부의 대북 강경 조치로 지금 저는

실낱같이 희망을 걸었던 모든 것들이 무망하게 되었습니다.
평양에 갈 수 없고

평양에 있는 평화 봉사소를 운영할 수 없고
간염 백신을 보내는 일도 할 수 없고
 3국을 통해서 곡물을 보내는 일도 당장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끝난 것이라고 보고 이 일을 접어야 하나
?
다른 일을 하라고 하느님께서 이런 파국을 허락하신 것인가
?
“현세에서 박해를 받겠지만
...
백배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믿고 더 기다려야 하는가
?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

그런데 지금까지의 경험을 놓고 볼 때
 
이 시련의 때가 바로 믿음의 때인 것입니다
.
지금까지 이와 같은 시련이 없지 않았습니다
.
그러므로 바로 이때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라고 하는
 
베드로 사도의 권고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
우리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때를 희망해야 합니다
.
왜냐하면 어제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적이 없어도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양승국신부-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고>

오늘도 베드로는 또 다시 크게 오버를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좀 있으면 60점이라도 받을텐데, 괜히 "나서서" 크게 야단맞을 건수를 만듭니다.

엉겁결에 튀어나온 말이었겠지만 베드로는 나중에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한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뒤이어서 나온 베드로의 말이 너무 속보이는 말이어서 생략했으리라고 추정되는데, 아마도 이런 질문이 뒤따랐겠죠.

"이제 저희에게 돌아올 몫은 어떤 것입니까? 적어도 장관 자리 하나씩은 생각해 주시겠지요?"

베드로가 그 말을 내뱉은 이후, "진정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을 따랐겠는가?" 복음서를 따라가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똑똑히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그물을 버렸고, 가족을 뒤로했고, 살던 집을 떠나왔지만 결코 모든 것을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정으로 버린다는 것은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인 결단을 요구합니다. 비록 베드로는 많은 것을 버렸지만 결점투성이의 인간 조건은 그대로 안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생업을 포기했지만 예수님을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성공해보겠다는 인간적인 야심을 그대로 지니고 따라온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베드로는 남들보다 늘 앞서야 한다는 지나친 강박관념, 그 알량한 자존심을 모두 등에 짊어지고 따라온 것입니다.

이토록 문제점이 많았던 베드로의 성소였기에 예수님께서는 극단적인 처방을 써가면서까지 베드로의 성소동기를 정화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이셨던 것입니다. 때로 칭찬도 하고 인정도 하지만 때로 과격한 언사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저 역시 "이제 모두 버렸노라"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온전히 버리지 못한 제 현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곤 합니다.

완전히 버렸다면 보다 완벽한 평화를 누릴텐데, 아직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에 아직도 이토록 부끄러운 갈등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크게 비우자고 다짐합니다. 다시 한번 모든 것을 버리자고 약속합니다.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면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최종적으로 남게 되리라 확신하면서.


어제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출판사에서 온 전화였지요. 사실 이번에 저의 여섯 번째 책이 출판되는데요, 이 책에 넣을 저의 약력을 좀 써서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암담했습니다. 여섯 번째의 책을 썼다는 것 외에는 뭐 내세울만한 특별한 약력이 전혀 없거든요.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요즘 그 흔하다는 박사 학위조차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무난하게 고등학교 졸업하고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쭉 다니다가 신부가 된 아주 평범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강의 나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당이나 회사에 강의 부탁을 받아서 가면, 진행하시는 분이 제게 약력을 묻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거쳤던 곳을 이야기해드리지요. 그러면 그분께서는 ‘뭐 특별한 약력이 없냐?’는 식으로 저를 뻔히 쳐다보십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저는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그게 다에요.”

책을 내고 강의를 할 때, 좀 특별한 약력이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의 평범한 경력을 들으면 시시하고 별 것 없는 사람으로 생각할 것 같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문득 이러한 평범한 저의 과거가 바로 지금의 나를 더욱 더 돋보이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평범한 과거의 삶으로도 지금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기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과거의 삶을 가지고 지금 화려하게 사는 것은 쉽겠지요. 그러나 평범하고 또 어려운 삶을 가지고서 지금 화려하게 사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결국 평범하고 어려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더 자랑스러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의 고통과 시련 역시도 잠시 뒤에 다가올 미래에는 자랑스럽고 감사할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한 차원에서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잘 이해됩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지금의 이 순간의 삶이 항상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화려하고 멋지게 보이는 사람이 계속 그 모습을 간직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지금 힘들게 살아가는 그 모습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과거가 되는 그 모든 것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지금이라는 이 현재에 어떻게 하면 더욱 더 충실할 것인가를 걱정해야 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평범함을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지금 어렵고 힘든 나의 삶이 하나의 벌이 아닌, 하나의 커다란 축복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화려하고 멋지게 다가올 미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꼴찌임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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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사람

-조명준 신부-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말의 성서적 의미는 ‘세상 것과 섞이지 않게 따로 구별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분인 이유는 
세상의 속된 것과 구별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우리들도 세상의 욕망에 물들지 않도록 권고하는 제1독서의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과 형제와 자매와 부모, 자녀와 토지를 
버리라는 말씀을 우리 사회의 현실에 적용해보면, 신앙 때문에 사적인 
이익을 위한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1/4이 그리스도교 신자이지만 여전히
학연, 지연, 혈연에 기대어 ‘법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결정들이 이루어지고, 
이것들이 성공의 조건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이 세 가지에 
의지한 불공정한 경쟁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꼴찌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첫째가 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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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양승국신부-

<여백 예찬>

한적한 평일 오후, 고궁 안마당을 거닐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겨우 담하나 넘어왔을 뿐인데, 분위기는 완전히 딴판입니다. 시야에 와 닿는 모든 풍경들이 소란스런 바깥세상과는 너무나 대비되기에 어리둥절해집니다. 갑자기 타임머신을 타고 머나먼 딴 세상에 와있는 착각 속에 빠집니다, 낯선 공간에 익숙해지기 위해 꽤 시간이 요구됩니다.

‘텅 빈 충만’이란 단어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시간도 천천히 흘러갑니다. 공간도 텅 비어있습니다.

고궁의 매력은 이렇게 ‘텅 비어있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골 생활에 익숙해서 그런지 도심 속을 걸어가다 보면 그 ‘빽빽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디 한 군데 여백이라곤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옵니다.

삶에는 어느 정도 여백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여백과 더불어 우리네 삶은 더욱 풍요로워 집니다. 인생에 어느 정도 결핍도 필요합니다. 결핍 속에 우리 삶은 더 빛나기 마련입니다.

깃털처럼 가벼워져야, 먼지처럼 작아져야, 구름처럼 흘러갈 수 있습니다. 비본질적 인 것들, 덜 중요한 것들, 부차적인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 차원 높은 삶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비워야, 내려서야, 더 깊은 신앙에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을 옭아매는 갖은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면 그 때부터 하느님의 은총은 가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양손 가득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놓게 되면 그 때부터 하느님의 자비는 풍성해지기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적당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버리고, 또 버리고, 완전히 버리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추종, 그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것임을 오늘 복음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결코 정적인 것이 아님을 오늘 복음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만만치 않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충분히 노력했기에 이쯤이면 됐겠지, 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또 다른 목표치를 설정해주십니다.

한 차원 높은 목표, 또 다른 새로운 각고의 몸부림이 필요한 목표를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한 곳에 그냥 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어디론가 데려가십니다. 목숨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적인 우리의 쇄신과 성장을 원하십니다.

이러한 변화무쌍한 우리네 인생이기에 가끔은 ‘텅 빈 공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고요한 여백이 필요한 것입니다.

영적인 삶,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결코 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삶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잔잔한 물가로만 인도하실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의외로 자주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나운 폭풍 속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속으로 뛰어들면 큰일 나겠구나,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별 일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 우리 삶을 제대로 한번 휘저으십니다. 그래서 완전히 우리 삶이 뒤죽박죽되는 느낌을 받겠지만, 계속 우리를 휘저으시면서 우리를 새 창조하십니다. 우리 안에 새로운 가치를 형성시키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우리의 노력이 자기 비움입니다. 자기 포기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거짓 자아를 내던지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권고대로 과감히 버리고 떠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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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사람이 된다 함은?
-김찬선신부-

작년 대통령 선거 때 많은 사람들이
세금 포탈을 했어도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이 명박 씨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저는 그때 매우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이 명박 씨가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의 배금주의적인 선택이 문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명박 대통령을 잘 못 뽑았다고 후회하며
성토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때 저는 또 말했습니다.
뽑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후회하고 성토합니까?
그리고 한 사람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 마시고
하느님이 아닌 인간에게 그렇게 큰 희망을 걸지 마시라고.

그런데 요즘은 제 입에서 그리 점잖지 않은 말이 나옵니다.
국민 여론을 무시하는 대통령의 태도에 실망하고 분노하는 표현이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저를 오늘 베드로 서간을 묵상하면서 반성하였습니다.

실망한다는 것은 희망을 걸었다는 뜻인데
저도 정치인에 불과한 한 인간에게 
어떤 식으로든 희망을 걸었던 것이지요.
이런 저에게 오늘 베드로 서간은 충고합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그러면서 전에 무지했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우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라 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 있게 봐야 할 말이 ‘무지했던 때의 욕망’입니다.
희랍어 원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영어로는
'the passions of your ignorance'입니다.
ignorance가 알지 못함을 뜻하지만 
배우지 못해 알지 못하는 illiteracy와는 다릅니다.
ignorance는 ignore가 ‘무시하다’, ‘묵살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듯이
교만함으로 하느님과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묵살하여
그 결과, 하느님과 다른 사람의 뜻을 알지 못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봐야 할 것은 'passion'이라는 단어입니다.
'passion'이란 어느 하나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몰입케 하는 
열정과 사랑을 뜻하는데
우리가 'passion of Christ'를 지니지 않고
주님과 사람들을 무시하는 
‘passions of ignorance'를 가질 때 문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녀야 할 성자 그리스도의 passion은 어떤 것입니까?
필립비서 2장이 잘 얘기하고 있듯이 그것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신적 위치를 고집하지 않고
종의 모습을 취하여 자신을 낮춰 죽기까지 순종하는 passion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자녀인 우리는 순종하신 성자처럼
종처럼 죽기까지 순종하는 passion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가 
우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한 뜻은
먼저 세상사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희망 때문에 
하느님은 제쳐놓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늘 우리를 부르신 분 곁에 머물며 
모든 관심과 희망을 그분께 두는 사람입니다.
Being with the Lord God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거룩한 사람이 된다 함은
Doing as the Lord God says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사람의 뜻은 잘 알고 하느님의 뜻은 모르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뿐 아니라
무엇이든 자기 욕망을 따라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뜻대로 하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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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과 바꾼 아이

-이상각 신부-

아내가 호스피스 병동으로 떠나던 날 아침이었습니다. 할머니 등에 업혀 있던 막내가 엄마에게 가겠다고 막 떼를 쓰며 우는 겁니다. 아마 그 애도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엄마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나 봅니다. 다른 때는 엄마를 봐도 그렇게 가겠다고 하지 않았거든요. 아내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울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저 애는 내 목숨과 바꾼 아이야.’ 신부님, 집사람은 성모님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매월 첫 토요일마다 남양 성모성지에서 미사에 참례하고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체조배를 했습니다. 집사람이 오지 못할 때는 저나 제 아이들이 대신 오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남양 성모성지를 처음 찾은 것은 셋째 딸이 병에 걸려 몹시 아플 때였습니다. 그때 성모님께 기도드리면서 딸의 병을 낫게 해주시면 매월 첫 토요일에 성모님께 찾아오겠다고 약속을 드렸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그때부터 매월 첫 토요일마다 성지에 왔습니다. 그러면서 더욱더 성모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신부님, 사실 제 아내는 한 번 낙태한 경험이 있습니다. 아기를 임신한 사실을 모르고 감기약을 먹었는데, 주위 사람들이 모두 낙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두려움에 그만 낙태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울면서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매일매일 그 아기를 위해 기도했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아내가 여섯 번째 아기를 임신하고 몸이 아파 병원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의사가 암이라며 아기를 낙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나는 성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코 낙태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병원을 나와 성모님께 이렇게 기도드렸습니다. 
‘성모님, 아기를 낳겠습니다. 다시는 낙태하지 않겠습니다. 제 생명을 바칩니다. 대신 건강한 아기를 낳게 해주십시오.’ 아내는 가능한 한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묵주기도를 드리면서 건강한 아기를 낳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건강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아내의 몸에는 암세포가 다 퍼졌고 아기가 막 첫돌이 지났을 무렵 호스피스 병동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섯 아이들과 저를 남겨두고 그토록 사랑하던 성모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신부님, 제 아내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집에 두고 온 젖먹이 막내를 제외한 다섯 명의 딸과 함께 성모님 앞에서 아내를 위해 기도드리던 그 형제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아기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그 엄마에게 주님께서 틀림없이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라 믿는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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