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7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2014. 3. 7. 오후 8: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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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7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4-15)

 

“Can the wedding guests mourn
as long as the bridegroom is with them?

The days will come 
when the bridegroom is taken away from them,
and then they will fast.”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참된 단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주님의 목소리를 백성에게 전해 준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하며, 굶주린 이들과 양식을 나누고, 헐벗은 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이러할 때 의로움이 드러날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지켜 줄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이유를 요한의 제자들이 묻자, 당신을 혼인 잔치의 신랑으로 비유하신다. 손님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교회가 권고하는 단식의 의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를 습관적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오늘 들은 독서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단식의 진정한 뜻을 생각해 본다면 이 사순 시기를 충실히 보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서는 단식을, 이웃을 위하여 투신하는 의로움의 행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적 계명으로서의 단식이 향하는 목적지를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단식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의로움에 물들어 가고 그 의로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려는 것입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하늘은 의로운 사람의 영혼"이라는 아름다운 표현을 남겼습니다. 무릇 신앙인이라면 하늘을 기다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들은 지상의 순례 여정에서 그 하늘을 자신의 마음에 감히 담을 수 있기를 바랄 것이며, 그들이 담고자 하는 하늘은 다름 아닌 의로움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그렇다면 단식은 그 의로움이 자신의 마음에 자리하도록 공간을 마련하는 수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단식은 의로움을 가리는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고 절제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며,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몫을 내어놓는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단식은 작은 발걸음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방향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은 그 길을 모른 채 헛된 노력을 하지 않는 데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자 하는 진심과 이웃을 염려하는 애덕에서 우러나온 단식은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기꺼워하고 즐길 수 있도록 우리를 조금씩 변화시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자리에서 단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의로움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하는 기쁨에 맛 들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수행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어제부터 저는 자전거를 다시 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까지 너무나 추워서 자전거 타는 것을 겨울 동안은 멈췄거든요. 그러나 이제는 새벽에 자전거를 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드디어 어제 거의 두 달 만에 자전거를 탔습니다. 

생각보다 힘들더군요. 전에는 매일 40Km 이상을 탔는데, 오랫동안 쉬어서 그런지 전처럼 40Km 이상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은 목표로 삼았던 곳에 다다르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왔지요. 그렇다면 목적지에 가지 못했다고 기분이 안 좋았을까요? 아닙니다. 비록 목적지에는 가지 못해서 약간 아쉽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자전거를 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나를 위한 운동이기 때문에 중간까지 갔다 와도 좋은 것입니다. 

얼마 전, 직장에서 한창 일해야 할 나이인 것 같은데 아직도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 청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청년에게 “공부가 재미있나 봐요.”라고 말했지요. 그랬더니만 이 청년은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신부님, 공부를 재미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괴롭기만 하지요.”

이 청년은 자기가 원하는 곳에 합격하기 위해서만 공부를 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에게 공부는 괴로운 것이고, 합격만이 자신을 행복하게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결과만을 집착하는 사람은 실제로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 해도 행복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과정 안에서도 행복을 느끼고 체험하는 사람만이 원하는 결과를 통해서도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이란 결과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주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사랑을 통해서 매 순간 간직하며 살 수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이 행복을 어디에서만 찾으려고 할까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통해서만 또한 이 세상의 기준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이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뜻과 정 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단식이란 원래 속죄와 보속의 의미인 것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이후 단식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사람들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단식을 합니다. 자신은 신앙심이 깊어서 이렇게 열심히 단식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으니 신앙심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결과만을 가지고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지요. 

우리들은 과연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요? 주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는 행복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오늘을 행복하게 한다. 사랑의 힘은 무엇보다 세니까(최명란).

 

 

행복은 당신이 꿈꾸는 그만큼만 찾아옵니다     

-임의준 신부-

 

예전에 조숙한 어린이 한 명의 고민을 들어 준 적이 있었습니다. 
“신부님, 세상 살기 힘들어요. 공부도 해야 하고 대학도 가야 하고, 결혼하고 
아기도 키워야 하고, 그러다 보면 아무것도 못하잖아요. 전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친구야, 친구가 말해 준 것들은 사실이에요.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그런 고통이나 어려움이 분명히 있고, 다들 그것들 때문에 힘들어하고 
어려워해요. 하지만 말이에요. 그런 고통이 있는데도 친구의 부모님이 
친구를 낳아서 함께 지내는 이유는 뭘까요?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 깊은 곳에 간직되는 행복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누구나 삶을 살아갑니다. 가난한 이도, 부자도, 어린이도, 어른도. 
그러나 모두 다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기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행복을 느끼고 찾는 유일한 방법은 
그 행복을 주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지 못할 때, 
그것을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나는 누구와 함께할 때 행복합니까? 
그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본 적 있나요?

 

생고기를 앞에 두고
-현대일 신부-

 

제가 있는 본당은 시골 본당이라 전기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저는 태양열집 열판과 발전기를 이용해 전기를 쓰지만, 신자들은 냉장고조차 꿈도 꾸지 못합니다. 아마도 이들한테 배어 있는 나눔의 풍습은 보관의 어려움에서 생겨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멧돼지가 잡히는 날이면 동네 축제일이지요. 오랜만에 육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한테도 싱싱한 멧돼지 고기가 몇 점 떨어집니다.

그날도 분명 멧돼지를 쫓는 개들의 울음소리도 들렸고, 왁자지껄한 청년들 환호소리도 들렸습니다. 게다가 지나가던 동네 꼬마들이 돼지가 잡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잔치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슬쩍 동네를 둘러보았습니다. 고기도 한 점 얻어먹을 겸 …. 그런데 그 귀한 멧돼지 고기를 훈제만 해놓은 채 먹지 않고 바나나 잎으로 잘 싸놓고 있었습니다. “아니, 고기를 왜 먹지 않아요 ?” 라고 묻자, “신부님, 오늘은 금요일이잖아요.” 하고 대답합니다.

세상에 ….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 훈제하면서 고기 냄새를 어떻게 참았을까 ? 잘해야 한 달에 한 번이나 먹을 수 있을까 말까 한 고기인데 …. 한국에서 금육 날이면 횟집에서 잔치를 벌였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단식의 의미 · 금육의 의미 · 사순시기에 행하는 여러 가지 희생이, 단지 말마디로 핵심을 피해 가는 요식행위나 내 몸을 위한 다이어트나 금연 정도였던 우리의 태도가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진정으로 내 신랑, 내 님을 빼앗겨 슬퍼하고 있습니까 ? 진정으로 내 생활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까 ?

 

단식이 관상이 되도록

-김찬선신부-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시비지심是非之心

오늘 이사야서는 단식한다면서 다투는 것을 나무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주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음에 대해 주님을 찾아와 시비를 겁니다.

제가 본당에 있을 때 이웃 교회의 목사님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성경에 술을 먹지 말라고 했는데 
천주교 신부들은 왜 술을 마시는지 물으러 오신 겁니다.
물으러 오셨다는데 제 느낌에는 따지러 오셨고,
시비를 걸러 오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도 성경을 인용하여 답을 드렸습니다.
시편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흥겹게 하는 술을 주셨다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내용이 나오고,
복음에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시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먹보요 술꾼으로 비난 받는 내용도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인용하여 
단식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중요하고,
인격적인 사랑의 단식을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제 의견을 얹었습니다.

점잖게 얘기를 나눴지만 목사님이 돌아가신 다음 저는 속으로
‘술 안 먹을 거면 자기나 마시지 말지
왜 남 술 먹는 거까지 시비하는 거야!’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이내 
저도 수련기 때 그랬음에 대한 반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시비지심, 이것이 사랑인지 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때는 사랑 같고, 어떤 때는 사랑 아닌 거 같고.

잘 하건, 잘못 하건 상관치 않고,
잘못 되건, 잘 되건 상관치 않는 것보다는
잘, 잘못을 시비하는 게 더 사랑이지만
사랑이 아니라 미움과 분노에서 비롯된 시비지심도 있고,
겸손이 아니라 교만에서 비롯된 시비지심도 있지요.

그러므로 정작 시비를 걸어야 할 것은 
술이나 음식이 아니라 바로 이 시비지심이고,
정작 끊어야 할 것은 술이나 음식이 아니라 욕구이며,
정작 눌러야 할 것은 식욕이 아니라 교만과 시비지심입니다. 

그리고 사랑 때문이 아니라면 
옆으로 자꾸 가려는 시선을 위로 향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단식이 관상이 되도록.

한 형제님께서 회사 직원 회식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동료 여직원이 너무 많이 취한 것입니다. 마침 술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과음한 여직원을 자기 차에 태워 집까지 바래다주었지요. 물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 사실을 아내가 알면 오해를 하지 않을까 싶어 아내에게 다른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회식 후 곧바로 온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밤,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하는데 아내가 앉아있는 조수석 밑에 하이힐 한 짝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아차 싶었지요. 이 하이힐을 보게 되면 아내가 얼마나 바가지를 긁을지 끔찍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주위를 다른 데로 돌린 뒤, 그 신발을 운전석 창밖으로 얼른 집어던졌습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신의 순발력에 감탄을 하는 순간, 극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던 아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보, 내 구두 한 짝 못 봤어요?”

창밖으로 집어던진 구두는 누구의 것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과음했던 회사 여직원 것이 아닌, 바로 아내의 구두였던 것이지요.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또한 솔직했더라면 이런 실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 앞서 생각하는 과민반응으로 인해 실수를 했던 것이지요. 

평소 신중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한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신중하지도 못하고 솔직하지 못한 모습들은 또 다른 잘못들을 일으킵니다.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는 실수, 그리고 거짓을 통해서라도 윗자리에 오르려는 욕심을 간직하게 만듭니다. 이런 모습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지요. 주님께서는 늘 기도하시면서 가장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언제나 진실한 모습이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 당연히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겠지만,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잘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의 단식은 좀 야단스러웠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물론 포도주와 물도 마셔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친 삼베옷을 입고 땅바닥에 앉아 옷을 찢고 먼지나 재를 머리에 뿌리며 통곡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은 국가적인 재앙을 당했을 때, 또는 어떤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기 위한 행동이어야만 합니다. 

즉, 이들은 보이기 위한 행동으로서 단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중하게 예수님을 알려하지 않았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심으로 인해 솔직함도 잃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의미로 단식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바로 하느님 뜻을 세우기 위한 단식만이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다시금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얼마나 신중하게 살았는지를, 그리고 내가 아닌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말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단식할 때만이 진정한 단식이 될 것입니다. 
인생은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다(조지 버나드쇼).  

 

사랑의 크기     

-권태문 신부-

 

선생님과 제자들은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는 요한의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누고 즐겨야 한다는 것과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들 모두 단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말씀을 통해, 단식의 행위는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어야만 그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손님들이 
단식을 할 때, 그 안에는 신랑을 향한 애절한 그리움과 사랑이 녹아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경험하는 여러 유혹들과 갈등을 이겨내려는 
우리의 극기와 절제 안에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극기와 절제는 성경 안에 나타난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교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사랑이 담긴 
극기와 절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우리 자신을 더욱 순결하고 겸손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 이유로 극기와 절제의 행위는 그 안에 담긴 사랑이 
척도이지, 그 행위의 강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면, 현실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어려움들은 큰 장애가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완전한 사랑이신 그분과 일치시켜 줄 것입니다. 이 점을 굳게 믿고, 
우리 마음 안에 당신을 향한 사랑이 충만하도록 그분께 간절히 
기도하기 바랍니다. 

 

 

오늘도 실패!

- 노성호 신부-

 

발목이 좋지 않아 수술을 받은 작년 6월 이후 내 몸은 점차 D라인을 그리며 변하더니 이제는 더 무거워져서 행동이 굼뜨고, 어떤 옷을 입어도 맵시가 나지 않는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다이어트. 그런데 식욕은 여전하고, 한 끼를 굶으면 그 다음에는 한 번에 세 끼 정도를 몰아서 먹는다.
아주 근사한 변명이 되겠지만, 사실 세상과 단절하고 벽을 쌓지 않는 이상 지금 내 상황에서 다이어트나 단식을 실천하기란 그리 녹록지 않다. 교우들과 친교를 나누는 자리나 친한 벗들과 함께하는 자리, 오랜만에 손을 내밀며 다가오는 정겨운 이웃의 손길을 모두 마다해야 하는데, 그것은 너무 인정 없어 보인다. 못 간다는 핑계를 대는 것도 한두 번이고, 모임에 계속 빠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 그리고 내가 그들과 앞으로 언제까지 함께하게 될지는 하느님만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 지금 자신들 앞에 이 세상 누구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분이 계신데,그분과 함께 있음에 마냥 즐겁고 복될 텐데,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나 또한 그렇다.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주시는 매일의 예수님을 만나는 날이 지속되는 한 나의 다이어트, 나의 단식은 계속 연기될 것이다. 나도 제자들처럼 지금은 신랑과 함께하고 싶다. 그러다 언젠가 때가 되면 나도 단식을 해보련다.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
이사 58,
89)  

 

 

단식, 무욕의 사랑을 위하여

-김찬선신부-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왜 단식을 하는가?

단식의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
살을 빼기 위한 단식에서부터
Hunger strike
까지 현실적인 이유로 단식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보다 좀 더 고상한 단식도 있겠습니다.
개돼지처럼 먹는 것에 환장이 들린 사람이 되지 않고
본능적인 욕구(欲求)를 초월한 사람이 되고자 단식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본능적인 욕구를 초월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인 욕구를 초월한 사람이 되어 있는
그런 자신에 만족하기 위해서 단식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지요.
단식이란 欲이 생기지 않도록 欲求를 들어주지 않는 것인데
욕구를 초월한 자신에 대한 고차원적인 만족을 위해서
식욕을 채우는 저차원의 만족을 희생하는 것일 뿐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고상한 탐욕을 채우는 만족이나 
식욕을 채우는 만족이나 자기만족인 것은 마찬가지고,
어쩌면 고상한 탐욕을 채우는 만족이 식욕을 채우는 만족보다 
하느님께서 더 역겨워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가 질책하듯 고상한 척 하지만
속은 온갖 탐욕으로 가득 차 있고
그 탐욕을 채움으로써 만족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만복감, 포만감으로 참된 만족이 대리 만족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된 만족은 아무리 고상할지라도 그런 것들로 대리 만족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만족은 어떤 욕이든, 
욕을 구하지 않을 때 참되고 
욕을 버릴 때 완전하며
사랑 때문에 욕을 구하지 않을 때 더 참되고
사랑 때문에 욕을 버릴 때 더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그럴 수만 있다면
이웃을 진정 사랑할 때
그래서 이웃을 참으로 만족케 할 때 욕은 올라오지 않고
하느님을 진정 사랑하면 욕이란 
저 속에서부터 아무런 낌새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도 완벽하게 만족시키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우리 사랑이 
욕을 너무도 완벽하게 틀어막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식이란 무욕한 사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기 위해서,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우리 집에 맞아들이기 위해서,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기 위해서 
우리는 이번 사순절에도 단식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식탁 옆에 
굶주리는 이웃을 위한 돼지 저금통,
특히 북한의 굶주리는 이들을 위한 돼지 저금통이 놓여있어야겠습니다
 

 

  단식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비움

- 김미자 수녀-

 

사순절 동안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 단식을 실천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율법에 따른 의무 단식일은 속죄의 날, 단 하루뿐이었지만(레위기 16), 바리사이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권장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완벽하게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는 하느님을 위해 할 일을 다 했다고 자부하면서 은근히 드러내려 했습니다.

단식은 하느님과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육신의 극기와 비움을 통해 마음의 가난을 얻게 됩니다. 육체의 욕구를 극기함으로써 우리 내면은 하느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유혹을 극복하게 됩니다.또한 굶주림을 느껴 봄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단식으로 절약한 것을 나눔으로써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단식과 자선과 기도는 전통적인 신앙 표현으로 하느님께만 보이기 위한 것이며, 사람들한테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 드러내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처럼 단식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을 팔요는 없습니다. 단식은 지극히 개인적인 신심행위이며,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거나 강요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만남을 잘 준비하기 위해 선행을 한 가지씩 실천해 봅시다. 부활의 기쁨은 차고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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