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0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2014. 3. 12. 오후 3:08:40

글자

2014310사순 제1주간 월요일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
마태오 25,31-46)

 

 Amen, I say to you, whatever you did
for one of these least brothers of mine,
you did for me.'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백성에게 계명을 선포하신다. 이 계명은 주님께서 거룩하시니 백성 역시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에서 시작된다. 이는 주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행위도 포함되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집약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 장면을 말씀하신다. 여기서는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가를 것이며,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 또는 영원한 벌이 주어질 것이다. 그 기준은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한 일로 결정된다.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 준 것이야말로 예수님께 해 드린 것이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구약 성경의 근본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결같이 이 바탕에 깊이와 밀도를 더하시며, 절박성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 절정을 오늘 복음 말씀에서 듣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엇인지를 뚜렷이 보게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오시어 주재하실 마지막 심판에 대한 성찰은 곧 이웃 사랑을 미루는 변명의 예외 상황과 우회로를 우리 스스로 차단하는 기회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비추는 진실의 빛에 아무런 숨김도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영적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즐겁고 이로운 것들로도 대신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중요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 기준으로 내 삶의 성패를 평가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처럼 복음 정신에 따른 영적인 모험을 감행한 사람의 일상생활은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가장 작은 이들과 사랑으로 함께하는 삶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의 선택은 수익의 대차 대조표에 따라 타산적으로 살아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고통 받는 이를 외면하지 못하는 따뜻한 마음이 이러한 삶을 선택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종착점을 생각하면서 주님께 가장 먼저 청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마종기 시인이 '기도'라는 제목으로 노래하듯, 자신의 안위와 이기심을 넘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뜨거운 눈물이겠습니다.
"하느님/ 나를 이유 없이 울게 하소서/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게 하시고/ 눈물 속에서/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죽어서는/ 그들의 눈물로 지내게 하소서."

 

 

 

 

 

 

 

 

 

 

 

얼마 전, 제가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본 후배 신부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형님, 요즘 이 상표의 패딩 점퍼 서열이 있는 것 아세요? 음, 형님 점퍼는 찌질이 계급이랍니다.”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제가 입고 있는 점퍼는 추운 겨울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도록 따뜻했으며, 그렇게 싼 가격의 점퍼도 아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과연 서열이 있더군요. 25만원 미만은 찌질이 계급으로 정해져 있으며, 25만 원 이상부터 해서 70만 원 대까지 계급이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이없는 것은 이 점퍼들이 중고등학생의 교복처럼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어렸을 때에만 해도 이렇게 비싼 점퍼는 상상도 못했었는데, 이제는 당연히 입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하니 씁쓸한 기분입니다.

그런데 과연 25만 원 이상의 점퍼를 꼭 입어야만 할까요? 사실 그렇게 고가의 점퍼들은 추운 겨울 산을 등반하기 위해 필요한 장비입니다. 평상시 이 도심에서 입기에는 가격대비 효율이 전혀 없는 옷이라는 것이지요.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동네 뒷산을 올라가는데 여러분들은 어떠한 옷차림으로 올라가시겠습니까? 특히 따뜻한 봄날에 동네 뒷산을 오르면서 두꺼운 패딩점퍼와 바지, 아이젠, 스패츠 등을 갖추십니까? 또 이것도 부족해서 50리터 이상의 대형 배낭을 짊어지고, 그 안에는 온갖 등산 장비를 넣어서 산을 오르는 사람이 여러분 옆에 있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이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을 스스로 자처하는 것 같습니다. 히말라야 등반을 하는 것도 아닌데도 비싼 점퍼를 입어야만 신분이 상승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요즘의 세태에 한숨만 나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변화인데 말이지요. 즉, 겉으로 멋진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멋진 옷을 걸쳐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이 점을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도 예외가 없지요. 그래서 자신보다 힘 있고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가장 작은 사람들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필요함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주님께서는 지금 입고 있는 옷을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마음에 담겨 있는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멋진 사랑을 실천하여 주님께 최고의 인정을 받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은 판단하지 않는다. 주기만 할 뿐이다(마더 데레사).

 

나 자신도 모르는 선행     

-임의준 신부-

 

부제품을 받고 잠시 기다림의 시간을 갖고자 1년 동안 특별한 체험을 하며
보냈습니다. 그 기간 중에 서울 중심가에 있는 제과점에서 마감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과점의 영업이 끝나면 그날 남은 빵을 모두 정리하게 되는데
저는 그 빵을 지하철역에서 노숙하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남은 빵을 나누어 드리는 일을 계속 하던 중,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자신들에게 날마다 빵을 가져다 주는 나를 알아볼까?’
그러던 어느 날, 빵이 모두 팔려 그들에게 가져다 줄 것이 없어 빈손으로
지하철역으로 들어서는데 어떤 노숙인이 저를 향해 ‘오늘은 빵 안 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올라
그분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도망쳐 왔습니다. ‘아. 내가 선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면서 이들에게 인정받기를, 그리고 이들이 나를 기억해 주기를
마음속으로부터 바라고 있었구나. 진정 보상을 바라는 선행이었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어떠한 보답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선행. 그것만이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진정한 선행임을 잊고 살았던 저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부끄럽지만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심판의 자리에서 헤아리는 것은 …

-현대일 신부-


우리 본당 어린이들에게 첫영성체는 손꼽아 기다리는 날입니다. 예쁜 옷을 입고 예수님 몸을 영할 수 있다는 기쁨 외에도, 쌀밥에 고기반찬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학교에서 하거나 마을 교리교사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면담하면서 성호경과 사도신경을 점검합니다.

어느 날 공소에 가서 아이들 기도문을 점검할 때였습니다. 눈이 초롱초롱한 그 아이는 당차게 말했습니다. “저는요, 사도신경은 잘 못해도요 주모경은 잘해요.” 아마도 최후의 심판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하느님과 마주앉아 그분의 눈을 바라보며 두근거리며 앉아 있는 제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런데 그분은 무엇을 물어보실까요 ? “사도신경 외워봐, 주일미사 몇 번 빠졌어 ? 십계명 이거 못 지켰네, 얼마나 높은 직위를 성취했지 ? 연봉은 얼마였나 ?” 등을 묻지 않으십니다. 그 모든 것은 사랑하기 위한 방법일 뿐입니다. 사도신경, 주모경을 잘 외우는 것이 중요하기보다, 하느님과 대화를 얼마나 진실되게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기도를 통해 내 생활이 얼마나 변화되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심판의 자리에서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가 행한 잘못이 아니라 행하지 않은 선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사랑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사랑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지나쳐 버리지 않았는지를 물어보실 것입니다.

 

기울지 않는 사랑

-김찬선신부-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은 거룩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이 거룩함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속간에 머물지 않고 고고하게 저 위에 있는 것,
흙탕물에는 절대로 발을 담그지 않는 꼿꼿함,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매함,
이런 것을 거룩함이라고 많은 분들이 생각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거룩함이라면
이런 거룩함은 참으로 외로운 거룩함이고
차갑고 썰렁한 거룩함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거룩함에 초대하시는 거라면 저는 하느님께서 아무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초대하셔도 응답치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거룩함이라고 하면
예수님도 거룩한 분이라고 절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흙탕을 뒹구신 분입니다.
인간의 문제에 깊이 간여하신 분이시고
자주 논쟁의 중심에 서 계신 분이셨으며,
죄와 불의에 불같이 분노하신 분이셨고
그러면서도 죄인과 어울리신 분이셨으며.
병고에 같이 아파하시고
슬픔에는 지질하게도 같이 눈물 흘리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거룩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 깊이 간여하면서도 결코 하느님과의 끈을 놓지 않으시고,
논쟁을 하면서도 자기의 승리가 아니라 진리의 승리를 염원하시고,
죄와 불의에 분노하시지만 결코 사랑을 포기치 않으시고,
죄인과 어울리면서도 죄에 물들지 않고 물들이셨고,
인간의 고통에 함께 하시면서도 고틍을 은총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더욱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모든 것을 함께 하시는 분 정도가 아닙니다.
인간, 그중에서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랍니다.
동감, 동참, 동행 정도가 아니라 일체화하시고 동일화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처럼 거룩한 것은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것이며,
인간을 그저 인간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의 작은 신으로 보는 겁니다.

사랑은 기울지 않아야 참 사랑이라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기울지 않은 사랑을 하기 위해
상대를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려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기울지 않은 사랑을 하기 위해
우리를 당신 사랑의 상대로 끌어올리십니다.

그렇게 끌어올려진 사랑을 받은 우리도 그 높여진 품위를 잃지 말고
다른 사람을 하느님의 작은 신들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아내가 왕비가 되면 나는 저절로 왕이라지요.
남편이 왕이면 나는 저절로 왕비라지요.
그러랍니다. 오늘.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