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1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2014. 3. 12. 오후 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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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311사순 제1주간 화요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마태오 6,7-15)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 말씀의 힘을 전한다. 하늘에서 내린 비와 눈이 땅을 적셔 마침내 굶주린 이들을 위한 양식을 내놓듯이, 주님의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그분께서 뜻하신 바를 이룬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을 주신다. 기도는 빈말을 번드레하게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이사야서가 들려주는 제1독서 말씀의 아름다움은 읽고 또 읽어도 가시지 않습니다. 이 구절을 읽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하늘에서 내린 비와 눈이 부드럽게 땅을 적셔 초목이 자라고 열매 맺어, 그것이 양식이 되어 사람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지는 모습이 마치 격조 높은 흑백 무성 영화를 보듯이 떠오릅니다. 이러한 아름다움과 행복이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이라고 예언자는 알려 줍니다. 그 말씀은 헛된 소리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인간의 말'로써 수많은 일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주님의 말씀을 닮지 않는다면 아름다움과 선을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과 말의 관계를 심오하게 성찰한 독일의 철학자 막스 피카르트는 이 시대 사람들의 번드레한 말의 헛헛함을 그의 책 『인간과 말』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경우, 언어는 더 이상 빛이 아니다. 언어는 단순한 조명에 불과하다. 언어는 빛 아래를 파고들어 가지만, 어디로 향해야 할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빛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소리만이 있으며, 말들은 서로 충돌하기만 한다. 소리가 빛을 대신한다. 파괴된 말들, 그 말들이 만드는 소리는 그을음처럼 빛 없이 불안하게 펄럭거린다. …… 하지만 말은 빛이 되고 싶다. 말은 빛이기 때문이다. 빛으로 존재한다는 기쁨을 원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진실한 기도는 빛이 되려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닮으려는 인간의 말입니다. 진심 어린 기도가 사람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아름다움과 선의 참된 샘임을 거듭 되새겨 봅니다.

 

 

 

제가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하러 나갈 때가 떠올려 집니다. 여행 짐을 싸는데 왜 이렇게 짐들이 많은지 모르겠더군요. 이것도 필요한 것 같고, 저것도 필요한 것 같고……. 그래서 이것저것 싸다보니 짐이 어마어마해졌습니다. 그런데 아시는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짐을 가지고 가지만, 그중에서 사용하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말입니다. 오히려 그 많은 짐들이 여행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하더군요.

여행 초보자들은 아마 다 이렇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여행 고수가 되면 짐 싸는 것부터 달라집니다. 꼭 필요한 짐들만 가방에 넣다보니 짐의 부피도 엄청나게 줄어듭니다. 그리고 짐이 크고 무겁지 않다보니 돌아다니는데도 그렇게 힘들어 하지 않습니다.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여행길에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가느냐가 중요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보다는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느끼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초보들은 많은 것을 가지고 가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 삶도 이렇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들 모두는 지구라는 곳에 잠시 여행 온 것이지요. 즉, 지구라는 곳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하느님께서 계신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느님 나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계속 여행 초보의 모습을 버리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면서 또한 주님 곁으로 갈 때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데, 계속해서 이 세상에서의 내 짐 무게와 부피를 키우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 집을 떠나 어디를 갈 때, 저희 부모님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전주의하고 재미있게 놀다 오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주님께서도 우리 모두가 아무 탈 없이 이 세상에서 잘 보내고 재미있게 지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계속해서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과연 주님의 말씀과 뜻을 제대로 따르고 있을까요? 계속해서 초보티를 벗어내지 못하면서 욕심과 이기심만을 계속해서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 지를 잘 알고 계신다고요. 그래서 아버지 하느님께 바쳐야 할 기도까지도 직접 가르쳐주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느님 아버지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짐들을 늘려 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짐들을 하늘에 차곡차곡 쌓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나의 모든 죄 역시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은 이 세상의 짐을 늘리려고 하는 지, 아니면 하느님 나라에 쌓을 짐들을 늘리고 있는지를 묵상하는 은혜로운 사순시기를 보내셨으면 합니다.
좋은 본보기야말로 고리타분한 교훈보다 설득력이 있다(새무얼 스마일즈).  

 

 

“너희는 기도할 때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양승국신부-

 

<언제 밥 한번 먹자>

‘말’ 중에 참으로 특별한 ‘말’이 있습니다. ‘빈말’입니다. 사전은 빈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속 없이 헛된 말.

  북한 속담에 “빈말은 냉수 한 그릇만도 못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만큼 빈말은 영양가 없는 말, 별 의미 없는 말, 실행이 뒤따르지 않는 실없는 말입니다. 이런 빈말을 자주 남발하다보면 언젠가 자신도 모르게 ‘실없는 사람’이 되고 말겠지요.

  세상 사람들이 자주 하는 빈말은 주로 이런 것들이더군요. 마음에 없으면서도 오고가다 만난 친구에게 상습적으로 쓰는 말 있지 않습니까? “우리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 “내 한번 연락할게!

  왜 빈말을 많이 하게 되는가,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일단 말을 많이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안에 빈말도 따라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강의나 강론을 할 때 마다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저것이 아니라 핵심 주제를 하나만 딱 선정해서 일목요연하게, 일관되게 요약하고 정리해서, 하고 싶은 말, 준비된 말만 하게 될 때 강론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쿨’하고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허튼 말, 실언, 빈말도 당연히 예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저리 주저리, 이 주제 저 주제, 이리 왔다 저리 갔다, 장황하게 늘어놓다보면, 쏟아내는 말의 분량에 비례해서 책임지지 못할 빈말도 얼마나 많아지는지 모릅니다. 듣고 있노라면 짜증 제대로 납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이스라엘에 인접했던 근동지방 다른 민족들의 빈말도 대단했던가, 봅니다. 그들의 기도 습관은 참으로 봐주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일단 그들의 기도는 시작부터 장황합니다. 이 신 저 신, 불러낼 수 있는 신이란 신은 다 불러냅니다. 강제로 여기저기서 끌려나온 신들에게 소리소리 지르면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일일이 늘어놓습니다. 마치 협박하듯이, 때로 떼를 쓰듯이 떼쟁이들은 떠들썩한 굿판 한판을 벌이는 것입니다.

  이런 별난 이방인들의 기도 습관은 자연스럽게 유다 종교인들에게도 전해졌고, 이런 그들의 모습에 질리셨던 예수님의 당부말씀은 너무나 간단해서 좋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시면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빈말의 명수인 우리들이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곧 힘이었습니다. 그분은 단 한 번도 빈말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말 한마디 한 마디는 다 명언이었고, 힘과 에너지로 충만했고, 그래서 놀라울 정도의 권위가 있어 유다 고위층마저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인간을 살리는 말씀이었고, 위로와 기쁨의 말씀이었으며, 축복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진정한 용서      

-권태문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의 허물을 용서해야 우리의 허물 또한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정, 학교, 직장, 성당 등 일상의 삶에서 수많은
상처들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기 힘들 때 느끼는 죄의식과 혼란, 갈등과 실망감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 그놈으로 인해 내 상처가 이렇게 깊은데, 어떻게 그를
용서하란 말씀입니까? 나도 언젠가는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그를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식으로라도 용서를 하란
말씀입니까?” 진정한 용서는 상처 입었던 마음의 치유와 더불어 일어납니다.
따라서 진정한 용서를 위해서는 우리가 겪고 있는 상처를 치유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소명 중의 하나가
용서임을 안다면, 죄인들과 병자들을 특히 더 사랑하시고, 구원의 길로 이끄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 체험은 상처의 치유와 함께, 우리에게 상처 준 그 사람에게까지 자비와
용서가 전달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의지와 힘으로는 진정한 용서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일상 안에서 용서가 안 된다고 힘들어하며
어둠 속에서 살지 말고,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깊고 따뜻한 사랑을
체험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문을 여는 열쇠

- 노성호 신부-

 

나는하늘의 문과 긴밀한 인연을 맺고 있다. 중학생 때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하면서 첫 대면을 했고,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 창설한 꾸리아 이름이기도 하다. 게다가 2011년 첫 성모신심미사도하늘의 문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는 미사였다. 항상 교우들께 가라고 안내해 주는 곳도, 내가 가고 싶은 곳도, 우리 모두의 최종 목적지도 바로하늘의 문임을 마음속에 깊이 담고 있다.
하늘의 문
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받았다. 그것은 바로용서. 예수님께서는 이미하늘의 문열쇠를 베드로한테 주셨고(마태 16,19 참조), 베드로를 닮아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우리한테도 주실 것임을 믿는다. 다만 그 열쇠를 받기 위해 먼저땅에서 푸는 일을 해야 한다. 지저분한 비유가 되겠지만 코에 콧물이 가득하면 어떻게 하는가? 대부분은 풀어서 없앤다. 콧물 때문에 신경이 쓰이고 답답하고 힘겨우니까 그렇다. 더러운 것으로 인식되고 자신을 힘겹게 하는 콧물은 잘 풀어 없애면서 왜 더 더럽고 본인을 힘겹게 만드는 것들은 고이 매어두고 있는가? 미움·시기·질투·중상·모략·이간질·다툼 등이하늘의 문을 향해 가는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잘 풀어야 한다. 이 땅에서 함께 사는 많은 사람과의 문제들을 잘 풀어야 한다.
‘forgive’
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새겨보자. ‘용서하다라는 말 속에누군가를 위해서 준다.’는 뜻이 담겨 있지 않은가! 곧 용서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우선된다. 그러므로저 사람이 먼저 용서하겠지!’ 하면서 기다리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나부터 먼저 용서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아직도 콧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미처 풀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나 보다 

 

은총의 사랑과 믿음의 사랑

-김찬선신부-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주고받음입니다.
Give and Take
라고나 할까요?
그렇다고 거래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익을 주고받는 것이라면 거래라 할 수 있겠지만
기도는 사랑을 주고받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다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은총이고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믿음입니다.

은총은 가장 순수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만의 사랑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이요,
우리에게 가장 좋은 때에 주시리라는 믿음이요,
그리고 꼭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우리가 할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많은 말, 마음에 드는 말을 하려고 할 필요도 없고,
오직 당신의 좋은 뜻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는 고백을 하면 됩니다.

머릿속에 맴도는 잔상

- 양미강 목사-

 

아직도 머릿속에 맴도는 잔상이 있다. 얼마 전에 찾아간 필리핀 빈민들이 살고 있는 톤도라는 현장이다. 톤도는 필리핀 최대 빈민지역으로 약 60만 명이 살아가는 고난의 현장이다. 먹을 것을 찾아 농촌을 등지고 찾아온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그곳은 쓰레기 더미에서 흘러나오는 악취로 코를 막아야 지날 수 있고, 범죄의 온상이라 보통의 필리핀 사람들은 이곳에 얼씬거리지 않는다.

예전 한국의 난지도라고나 할까
? 사람들은 스모키 마운틴이라고 한다. 온갖 잡동사니 쓰레기들 사이로 아이들이 벌거벗고 뛰논다. 신발도 신지 않고 옷도 대충 걸쳤다. 톤도 지역은 바닷가에 접해 있어 그 주변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집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나무 판자로 대충 얽어놓은 간이천막 같은 것들 수백 가구가 붙어있다. 어떤 사람들은 바닷가 위에 집을 짓고 산다. 10평도 안 되는 좁은 집안에 아이들이 대여섯이다. 엄마는 갓난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아빠는 바닷가에서 고기를 낚는다. 그 물고기가 가족의 생계수단이다. 그 물고기를 팔아야 쌀을 살 수 있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다.

하루에 1
달러도 안 되는 수입으로 살아가는 절대빈곤층, 그에 비해 우리는 왜 이리 많이 가졌는가? 88만 원 세대라고들 하지만 우리 주변은 절대빈곤층보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계층이 많다. 하루 세 끼 먹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주님의일용할 양식은 보장받을 수 있는 약속인가? 더 많은 것을 갖지 못해 안달인 우리에게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그들의 기도가 마음을 때린다. 주님!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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