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퇴에 대한 오판
그 무렵 나는 6년을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격무에 지쳐 건강이 많이 쇠약해 있었다.
언젠가부터 목과 어깨 부분이 자주 뻐근하여 남모르게 걱정하면서
이러다 혹시 또 전처럼 쓰러지는 게 아닌가..염려하던 터라 어쩌면 명퇴가 잘 된 일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몇 달 부족한 25년 회사생활을 본의 아니게 끝낸만큼 마음이 편할 수는 없다.
생각해 보면 본부장이 나의 명퇴를 마치 무엇에 쫒기듯 급히 서두른 느낌이고
아닌 밤중 홍두께식으로 쫒아 내면서 생업 문제는 걱정할 것 없지 않느냐고 한 것도 온당한 말이 아니다.
그는 무엇을 해도 훌륭히 잘 할 것이라며 만일 회사와 관련된 일을 하면 최대한 돕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정년퇴직 후에 하려고 했던 제1안은 회사와 무관한 일이었다.
그래서 고맙지만 생각해 둔 일이 있다고 말할까 하다가 하지 않았는데
그때 말했으면 본부장의 저의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회사와 무관한 일을 할 예정이라고 했으면 본부장은 틀림없이 난처한 기색을 감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지 않을 수 있고 자청하여 도와 준다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센터에 도착한 후 이상하다는 생각에 이번에 같이 명퇴 당한 서울의 두 동료직원에게 전화를 했다.
그들은 나처럼 3일이 아니었는지 아직 근무하고 있었으며
본부 사정이 어렵다 하여 어쩔 수 없이 명퇴 요구에 응했다고 하면서도
난 이제 사직 예정일자가 지나 완전히 그만 둔 상태라는 말에 놀라는 눈치였는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이 무엇이든 나의 명퇴에는 뭔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렇지만 사직서를 냈고 예정일자도 지나 이제 그러한 의문은 무의미하여 후임자가 오기만 기다렸다.
그리고 며칠 후 나의 사직인사명령이 사내 온라인 공지사항에 뜨자
내가 며칠 전에 올린 사직인사를 몰랐던 많은 지인들의 전화가 전국 각 지에서 쇄도했다.
특히 공장과 영업부 실수요와 케터링 쪽의 전화가 많았으며
그들은 물류본부에 나의 명퇴를 강력히 항의했고 재검토하겠다고 약속하여 안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지에 떴다며 본부를 마구 욕하며 비난했다.
그리고 몇몇은 내일 본부를 찾아가 항의하겠다고 했지만 이제는 끝난 일이라 그럴 필요 없다며 만류했다.
그래선지 본부에는 내가 그들에게 항의해 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그런 부탁을 한 일 없다.
나에게 호의적인 공장장은 본부장과 선 후배 사이로 친했으며 입사가 조금 빨라 부장이었다.
그 공장장과 영업부의 몇몇 간부들 심지어 모 중역까지 나서 재검토를 요청했다고 하니 오해할만도 했다.
하지만 본부장은 그들의 요청을 묵살했으며 본부 사정과 형편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죽 했으면 나 때문에 멀쩡한 두 명의 센터장까지 자르는 쇼를 했겠는가.
그런데 소문이 원래 그런 것이지만 본부장의 그러한 고집스런 사직처리는 엉뚱한 소문을 만들었다.
내가 용납할 수 없는 큰 비리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처럼 여러 부서 사람들의 재검토 요청을 묵살할 수 있겠느냐는 소문이었는데
정말 싫고 듣기 괴로운 소문이지만 변명하지는 않았다.
오랜기간 함께 일한 직원들이 잘 알고 있어 그 따위 터무니 없는 소문에 변명하며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잘못된 소문은 곧 사라지게 마련이다.
나의 명퇴가 본부장 말대로 후배를 위한 것이 아닌 이유는 또 있다.
이번의 사직인사명령 공지에 나 혼자 뿐이고 그 후에도 서울의 두 센터장 사직 공지는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그 다음 해에 정상적으로 정년퇴직했는데
그러니까 본부장이 나에게 그들의 명퇴를 말한 것은 순전히 나를 내 보내기 위한 거짓 핑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안 일이고 그때는 나만 사직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야 어쨌던 나는 퇴직금을 받으면 본부에 말하지 않고 출근을 중단하며 25년 회사생활을 끝내기로 했다.
본부장의 억지로 15일을 더 근무했어도 후임자가 오지 않고 올 기미도 없었지만
비록 명퇴를 당했어도 25년의 끝을 깨끗이 하는 것이 옳고 또 그 정도 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씁쓸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석양이 아름다운 학암포 백사장을 거닐며
내가 회사에 무슨 잘못을 했기에 쫒겨난 것인지 아무리 생각하고 또 해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본부장은 하루라도 빨리 나를 내 보내려고 명퇴 시킨 것이 확실했다.
잘못한 일이라면 재고부족 사고 뿐인데 몇 년 전의 일인데다 전혀 문제 안 되게 완전히 해결했지 않은가.
그 외에는 수송회사와 OEM사가 매월 보내준 업무지원금 문제밖에 없다.
그러나 지원금을 받는 조건으로 운수회사와 계약했거나 공장과 OEM사들 생산계획을 짜 준 것이 아니다.
그건 신만이 아는 일이고 신에게 맹세하지만 난 그들에게 지원금을 요구한 일 없다.
그 반대로 형편이 좋아 보이지 않는 모 OEM사가 먼저 활동비를 지원하겠다고 했을 때 사양한 일은 있었다.
게다가 그 지원금을 개인적으로 쓰지도 않았다.
젠장..그래도 그게 잘못이면 6년이나 센터 운영비를 한 푼도 주지 않은 본부 잘못이 더 크고 많아야 한다.
본부장도 양심은 있을 것이니 그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럼 도대체 이유가 뭔가.
나의 업무 능력이 문제라면 물류에서만 20년 넘게 근무하여 배태랑 소리를 듣는지 오래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첫날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번도 깨지 않고 잤다.
그리고 그 생각과 고민으로 2일을 더 보냈지만 이유는 한가지 밖에 없었다.
여하튼 겉으론 명퇴지만 누가 봐도 쫒겨 난 것이고 뭔가 중대한 과오가 있어 문책 당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년이 겨우 1년 반 남았는데 이처럼 서둘러 내 쫒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명퇴를 당할 큰 잘못과 실수를 한 일이 없었다.
따라서 나를 못마땅해 하는 누군가 모함하여 명퇴 당했다고 결론지은 것이다.
그러나 그 결론은 나의 오판이었고 본부장의 연장근무 요청에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판단을 잘못하여 또 기회를 놓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