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그들은 고민 끝에 자신들이 저지른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나"를 희생양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내가 희생양을 자청해야 가능하고 그렇게 할지가 문제였다.
그리고 또 내가 그 일을 여하히 수습한다는 보장이 없고 위험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면 거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내가 그 일을 자청하지 않을 수 없도록 여건을 만들고 또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도록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해야 결과가 안 좋아도 내가 그들을 탓할 수 없고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지방에서 항상 바쁘게 보내느라 서울 본부에서 그런 사업을 추진한 것을 모르고 있었으며
대구센터에 다니는 수송기사가 사람이 없어 하차가 늦는다는 이상한 말을 했을 때도 난 관심두지 않았다.
물론 일이 바빠 흘려 들은 것인데 바로 그것이 나의 일생 일대의 대실수였다.
그 당시 나는 신자가 아니었으며 하느님은 당신을 믿거나 안 믿거나 공평하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한 믿음은 신자가 된 지금도 똑 같고 믿어야 모든 일이 잘 된다고 생각하여 신자가 된 것도 아니지만
여하튼 수송기사가 대구센터에 자신만 배차하지 말고 로테이션으로 해 달라고 했을 때가 기회였다.
하차가 계속 늦으면 당연히 이유를 알아야 하고 그 때 업무대행 사업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하면 할 수록 매사에 지나칠 정도로 신중을 기하던 내가 그 때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된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 아니고 매일 하는 수송업무와 관계된 일 아닌가.
바로 그런 점이 공평하신데도 그렇지 않으신 것처럼 보이고 생각되는 하느님이 주시는 기회 아닌가 싶다.
그 수송기사는 평소 불만을 자주 말했고 그런 사람을 통해 기회를 주신 때문에 내가 흘려 들은 것이다.
그러나 말 많은 그 수송기사를 대구센터에 집중 배차한 것은 나였다.
그리고 그 경우에는 어떤 불만도 참으며 일하는 성실한 기사보다 참지 못하고 말하는 기사가 더 좋았다.
그렇지 않으면 난 대구센터에 하차가 늦는지 어떤지조차 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아무것도 모르고 미련 곰탱이처럼 일만 열심히 하고 있던 그해 7월 초 어느 날.....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그날 정오 무렵에 갑자기 본부장이 센터를 방문했다.
그리고 다짜고짜 차에 타라고 하더니 멀리 있는 시내로 가는 것이었다.
그와 알고 지낸지는 꽤 오래였으나 그가 본부장이 되어 둘이서 식사와 술을 마신 것은 그 때 처음이었다.
한참 업무 중인 대낮인데도 얼굴이 빨갛게 먹고 마시며 대취했는데....
그렇게 취한 다음에 그는 조심스레 명퇴 사직을 암시하는 말을 하더니 곧 다른 이야기로 바꾸었다.
아마도 그 말을 하러 온 모양이지만 몹씨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어쨌던 나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문제였고 천만 뜻 밖의 일이었다.
그 때가 IMF 다음 해였고 몇 개월전 소폭 조정을 끝으로 이제 더 이상 없다고 공식 선언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력을 너무 많이 줄여 매일 힘들게 업무를 처리하는 상황이라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동안 사표도 여러 번 낸 바 있고 정년퇴직도 얼마 안 남아 그다지 놀라거나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방문 목적을 안 이상 다른 한담들은 무의미했다.
"바쁜데 일부러 오신 것이... 저의 명퇴 문제군요?"
".........."
"괜찮습니다... 일부러 여기까지 오셨고... 충분히 생각하신 다음 결정 아닙니까? 편히 말씀하십시오."
"..........아직.. 자제님들이 학생이지요?"
"그렇습니다. 결혼이 늦어서...두 녀석 다 회사의 장학금이 이제 본격적으로 필요한 고교생입니다만..."
"....근데...상부에서 부분적 인원조정명령이 또 내려 왔어요....우리 부서에 3명입니다....."
"전번에...이제 조정은 없다...끝났다고 안 했습니까?"
"예.. 그런데 그게....회사가 워낙 어렵다 보니....회사 전체가 아니라 몇몇 부서만 하는 겁니다."
"....그렇더라도 물류는 1/3 수준으로 줄였는데요....그런데 또 물류를.....?"
"제가 힘이 없고 능력이 부족해서지요...죄송합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혹시...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업무처리가 마음에 안 들었다던가... 사실을 말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그런 건..... 말씀드린 그대로 입니다."
"그럼, 제 후임은 누구입니까?"
"그건....아직...그러나 누구든 하게 되겠지요."
"지금 제가 하는 일이 만만치 않아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건 잘 아실 겁니다."
"압니다. 그래서 경륜이 많은 배테랑급 센터장들 중에서 생각하고 있는데...아직 누구라고는....."
"암튼 알아서 하시겠지요.... 그런데 이게 본사 차원의 조정이 확실합니까?"
"예. 절대로...제 임의로 하는 게 아네요. 당치도 않지요. 몇 십년을 고생하신 분을 제가 어떻게.....
전 고참 직원들 모두 명예로운 정년퇴직이 되도록 해 드리고 싶은 것이 진심입니다."
"......말씀대로 회사의 조정명령이면 따를 수 밖에요. 그러나...."
"?? .... 예, 말씀 하세요. 뭔가 제가 드린 말씀이...?"
"의심은 아니고요.... 회사의 인력정책이....이건 아니지 않느냐...생각되네요.
아시는지 모르지만 본사 인사기획부장이 저와 같은 고향이고 5년 후배입니다.
이거야 원..형편을 좀 알고 줄이든 말든 해야....사직하는 마당에 후배들을 위해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 000부장이 후배시라고요?"
"예. 공적 자리에선 예우해 주지만...사석이거나 전화로 할 때는 제가 말을 놓습니다."
"..........!!!"
"그렇찮아요.... 한시간이면 가는 서울집을 일이 너무 많아 몇 달째 못가는 형편인데 또 줄이라니..."
"........!!!"
"그래서 확인하는 건데요. 이번 조정이 정말 인사기획부에서 입안한 정식 인력조정명령 맞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
"이번 건은 공식으로 기획부에서 입안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물류본부에서 제가 결정한 겁니다."
"??... 그럼, 순전히 본부장님 생각이군요? 본사 인사부와 무관한.....?"
"예, 죄송합니다....우리 물류는 말씀처럼 많이 줄였어도 그래도 아직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최 고참 몇 분에게 협조해 주십사 하고....용서하십시오."
"....그래요? 최 고참들만....거참, 오래 근무한 것이 죄군요....아니면 다른 이유도 있습니까?"
"다른 문제는 없고요. 곧 정년이시니까... 젊은 후배들을 위해....양보해 주십사 하는 거 뿐입니다."
"....그렇다면 물류에 왕고참이 저 외에 두사람 더 있지요. 그들도 같이 사직합니까?"
"그렇습니다. 그 두분은 서울에서 근무 중이라 이미 만나 말씀드렸고 양해도 얻었습니다."
".허! 두 사람이 벌써 약속을.......언제 말입니까?"
"어제 만났습니다. 그리고요....이건 센터장님께만...."
"???........"
"그 두 분에겐 위로금을 3개월로 했는데 센터장님은 자녀분들이 고교생이니까....6개월로 하겠습니다."
그래도 정년보다 1년 먼저 퇴직하는 샘이고 아이들 학자금 100% 지원을 받지 못해 손해가 적지 않다.
정년퇴직 규정이 주민등록상으로 만 55세되는 해의 생월(生月)까지라 약 1년 반 쯤 남은 상태였으며
그 때문에 퇴직 후에 할 일 몇 가지를 놓고 연구하다가 운송업 쪽으로 방향을 잡은 상황이었고
그리고 운송업을 하게 되면 적극 돕겠다는 사람이 몇명 있는 터라 명퇴를 해도 걱정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너무나 뜻밖이라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 그지 없었지만 참기로 하고 명퇴요구를 받아들였다.
그 상황에서 거부하여 버티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무엇보다 내가 하려는 운송업이 회사 도움이 꼭 필요한 일이라 본부장이 돕겠다고 할 때 하는 것이 좋다.
그는 내가 회사와 관련된 일을 하면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나의 명퇴 결심이 바뀔까 걱정한 것일까...사직일자를 3일 후로 하자고 하는데
대개 7~15일이 보통이고 또 그 정도는 되어야 인수인계를 원만하게 할 수 있어 업무에 문제가 없다.
따라서 3일은 내 후임이 이미 내정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늘 본부장이 한 말 대부분이 거짓...이라는 불쾌한 생각에 인수인계를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3일 후라면 배태랑급 후임자로 이미 결정했다는 말씀인데...그럼 내일부터 전 출근 안 해도 되겠군요?"
"아, 아닙니다. 3일동안 후임을 정해야지요...인수인계를 제대로 못해 힘들어도 알아서 끌고 가야 하고요.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고...능력이 좋으시니까...3일 후부터 푹 쉬시며 하실 일을 준비하십시오."
뭐..그래도 좋다.
목 잘려 명퇴당하는 마당이니 통상적인 업무만 하면 되고 그 정도는 직원들이 할 수 있다.
서울 가족들이 걱정되지만 갑작스런 퇴직에 놀라지 않도록 당분간은 알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숙소에서 며칠 쉬면서 향후 계획을 충분히 마무리 한 다음 천천히 알리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25년을 근무한 회사를 그만 두었다는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3일이 끝나는 날 밤 늦게 사내 온라인을 통해 사직인사를 하면서 비로서 실감했는데
그날 저녁 공장장이 송별회를 해 주어 공장직원들과 회포를 풀었고
OEM사들에게는 그동안 적극적인 업무 협조에 고마움과 잘 해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전화로 전했다.
갑작스런 명퇴에 말이 많았으며 몇몇 영업부서와 고참 영업담당들은 펄펄뛰며 본부에 항의했다고 했다.
공장장은 본부를 방문하여 본부장에게 항의했다 하고....
물론 그동안 많은 센터장들이 자리를 옮기고 사직했지만 이번 같은 항의 소동은 없었다.
나는 온라인 사직인사 디음 날 간단한 옷가지 가방을 차에 싣고 며칠 예정으로 진짜 사직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서해안 쪽으로 한창 달리고 있을 때 본부장에게서 센터로 급히 와 달라는 전화가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