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후회한 사람은 K 사장이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후에 본부장이 나의 근무처인 영등포 저온중앙물류센터를 방문했다.
일부러 온 것이 아니고 지방의 지역물류센터에 가는 도중에 잠시 영등포에 들러 나를 찾은 것이었다.
그는 커피를 맛있게 마시고 나서
"이형! 그 기안서 말입니다. 그거 사실이겠지요?"
"??... 내용에 뭔가 믿기 어려운 게 있으십니까?"
"예,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그게 사실이면 엄청난 거에요.난 믿으려 해도 도통 믿기지가 않아요."
"?? 그럼..그 기안서가 거짓이라고...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니.. 아니요..그건...절대 아닌데....전 이형을 믿어요... 근데...그래도 그게 정말 사실인지...."
"??.. 참내.. 그 말씀이 의심하시는 말씀이잖아요..."
"하하...예, 좋아요. 마음 놓고 믿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오늘 맛있는 식사 한끼 대접하고 가지요."
"아닙니다. 바쁘실텐데요...그냥 내려가십시오. 고맙게 잘 먹은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아네요. 그럴 수는 없어요. 제가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서.... 그래서 꼭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럼...죄송하지만 식사보다 멋지게 한 잔 사십시오.
우리 센터 직원들 모두에게요. 직원들 고생 많이 합니다. 그 기안서가 한잔 살 정도는 될겁니다."
"그 내용이 사실이면 충분하고 말고요. 좋죠. 그럼 오늘은 안 되겠고....담에 다시 시간 내 들릴께요."
"본부장님, 대체 그 기안서 어디의 어떤 점이 의심 되십니까?"
"음.. 다 그래요. 한 부분이 아니고...기안서대로면 말 그대로 저온물류 대혁명이라 할 수 있어요.
그걸 금액으로 환산했을 경우... 본부 서과장이 대충 계산해 보고 뭐라고 했는지 모르죠? 암튼...."
"예, 전 모릅니다. 그저... 결코 적지 않을 거라고만..."
"잘 아시겠지만... 모든 건 실제로 결과로서 입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말 자신 있으시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회사 돈 한 푼도 들지 않는 일이니까 하루 속히 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결재가 될거니까..."
요즘 같으면 작업 상황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내면 금방 확인되는데 그때는 그만큼 답답한 시절이었다.
여하튼 곧 결재가 이루어져 시행에 들어 갈 것으로 알았더니 그렇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한달이 지나 두달이 다 되어도 소식이 없어 궁금하여 본부 담당 과장에게 전화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면 안 된다면서 상부에서 압력이 있어 보류중이라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물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므로 어떻게든 결재를 받아 낼테니 조용히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는 사이 운수회사 K 사장은 여러 번 센터를 찾아왔는데
물론 그도 답답하여 눈치 보러 온 것이지만 난 아무것도 모른다며 그에 대한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반년이나 속절없이 지난 어느날
드디어 기다리던 반가운 결재 소식과 함께 매우 아쉽고 서운한 전화를 받았다.
본부장이 다른 사업본부로 발령받아 떠나면서 기안서를 결재했다는 것이다.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뜨 간부였는데 신설 물류본부장직이 한직이라 잠시 머물렀다 떠난 듯 하다.
나로선 몹씨 서운했지만 그가 더 좋은 곳으로 갔으니 축하할 일이다.
그리고 그는 한 잔 사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면서 대신 돈을 조금 보낼테니 양해하라고 했다.
기안서 작업은 그 밑의 간부들에게 철저히 지시한 덕분에 순풍에 돛 단듯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 상태에서 운수회사 사장이 또 찾아왔다.
그런데 이번엔 거만한 얼굴을 푹 숙이며 제발 봐달라고 사정하는 것이었다.
난 그에게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전 같았으면 조금은 빈정대고 야유도 했을지 모르지만 이젠 그럴 마음도 필요도 없었다.
계속 말 없이 있었더니 그는 내 책상 설합을 열어 뭔가 신문지로 싼 뭉치를 넣고 닫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숙이고 계속 사정했다.
나는 그것을 꺼내 돌려 주면서
"지금은 시위 떠난 화살입니다. 되돌릴 수도 없게 돼 있고 난 그럴 마음도 없습니다."
"센터장님이 하고자 마음 먹어 안 될 일이 뭐 있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제발 좀 봐 주십시오."
"지금은 결재라인을 다 거쳤기 때문에 취소할 수 없다는 거 사장님도 잘 알잖습니까?
그리고...이거 뭔지 모르지만 가져 가고 회사에서 계속 사업하려면 생각을 바꾸는 게 좋을 겁니다.
사장님만 돈 벌지 말고 우리 회사도 같이 살 수 있는 상생의 길을 가야 한다 그겁니다."
"......"
"이번에 내가 기안한 수송업무 개선의 토대가 된 그 정보를 사장님이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습니까?
오랜기간 사업을 하여 경험도 많은데 그렇듯 유익하고 중요한 정보를 왜 모르고 있었습니까?"
"아! 그런 냉동차량이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금 사정 때문에 좀 미루다가...."
"그래요? 그게 사실이면 사장님은 정말 크게 잘 못한 겁니다. 진작 나한테 말하고 상의했어야지요.
그랬다면 또 사장님이 당장은 어렵다 했다면 난 그 사실을 본부에 보고하고 기다려 주었을 겁니다."
"미안합니다. 내 본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암튼요. 다른 회사와 계약 직전입니다. 이젠 누구도 되 돌릴 수 없는 곳에 가 있어요. 그렇게 아세요."
".....정말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이젠 여기서 나갈 차량들 일자리를 찾도록 하세요. 바쁜데 먼길 자꾸 오지 말고요.....
좋은 말이 아니라 미안합니다."
K 사장은 풀이 팍 죽어서 돌아갔다.
그동안 저온중앙물류센터에서 일하던 대형 냉동차량 5대가 그의 회사에서는 제일 큰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건재할 것이고 회사 다른 부서에는 그의 회사 차들이 운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회사 차량들이 아웃된 것은 내가 있는 저온중앙센터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부서에서 운행하는 차량들이 모두 2.5톤 소형이라 수입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야 어떻든 내가 추진한 수송업무개선 결과는 어떠 했는가?
효과는 그 본부장 말대로 매우 컸으며 그 공로로 그 해 년말에 공로상패와 포상금을 두둑히 받았다.
회사 저온물류시스템을 완결시킨데 대한 상이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오늘까지 10년 넘어 계속 사용 중이니 더 좋은 방법은 아직까지 없다는 증거이다.
개선효과는 당연히 비용절감으로 나타난다.
정확한 수치는 본부에서만 산출가능하여 난 알 수 없지만 대략 정도는 추정할 수 있다.
효과는 유형과 무형으로 구분되는데.
유형의 경우 당시 전극의 20여개 저온물류센터에서 일하던 알바들을 약 50명 줄였으며
그런데도 상하차작업이 전보다 훨씬 빠르고 수월하여 그들의 연장근무 수당과 석식값이 절약되었다.
그리고 운수회사와 계약시 최신형 차량인데도 종전의 노후차량 보다 20% 저렴하게 계약했다.
그 정도만 해도 당시 기준으로 년간 약 8억원 정도 절약되는데 매년 그만큼 낭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형은.
1, 개량형의 최신형 차량 교체 → 수송업무 전반 원활 (영업 측에 대한 업무 서비스 대폭 향상)
2, 상하차 작업시간 대폭 단축 → 대당 2시간에서 30분으로 단축 (해동 우려문제 완전 해결)
이 외에도 사소한 유형 무형의 유익들은 수없이 많았는데
특히 내 입장에서.
공로상과 포상금 또 위의 회사 이익보다 더 값진 것이 무엇인지... 이 글을 읽은 분들은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사직서 때문에 얻은 정보 결과이며 그 여행 아니면 난 부산에 가지 않았고 갈 형편도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