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게 있는 무덤 B
회사 업무는 대부분 저녁 8시 넘어서 끝났다.
그래서 그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고 별 일 없으면 기다렸다가 차 없는 그 아줌마를 집에 태워다 주었다.
당시 그 아줌마 즉, R은 30대중반으로 나와 17살 차이.
언젠가 내가 친정 아버지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하여 한바탕 웃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남 몰래 만나는 여성이 있었다.
따라서 R에게 이상한 마음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으며
조금이라도 R이 경계하거나 오해할 수 있는 수상한 말과 행동은 일체 하지 않았다.
나이가 많다는 핑게로 말은 편하게 했지만 그것도 본인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한 것이고
R도 스스럼 없이 대하며 어려워 하지 않아 서로에게 편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나 뿐만 아니라 센터의 나이 많은 수송차량 운전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저녁식사가 늦을 때는 9시가 넘어도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두번은 그 식당에서 직원 또는 찾아온 손님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실 때가 많았다.
물론 그럴 때마다 보조직원을 시켜 집에 데려다 주었다.
그런 상태로 얼마의 기간이 흘렀을까?
어느 날 오후 저녁 무렵 바쁜 일을 끝내고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R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며 좀 일찍 끝내고 나올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동안 그런 일이 한번도 없었기에 다소 의아해 하면서 왜 저녁을 사려느냐 물었다.
저녁을 사기로 한다면 평소 신세를 많이 지고 있는 내가 사야 하는 게 아니냐 하면서...
물론 그 때문에 손님을 많이 끌어다 주었지만 그것은 고맙다는 성의였지 무슨 댓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도움을 받으면 자기도 사는 것이 당연하다며 꼭 한턱을 내게 해 달라고 떼 쓰듯이 말했다.
혹시 뭔가 상의할 일이라도 있는가 싶어 응하면서
미국 영주권이 나와 떠나게 되었다는 걸까?
그래서 그동안 잘 지낸 인사로? 하지만 그런 일은 아닌 듯했다.
그런 소식은 어제 밤 11시 신랑과 통화로 알 수 있는 일인데 아침 식사 때 아무 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담 영주권 부로커에게 사기 당해 얼키고 설켜 있는 복잡한 소송 문제에 대한 상의일까.
그게 아니면 그녀 말대로 한텩 내는 일 밖에 없다.
그동안 영주권 브로커에 대한 소송운제로 자문이랄 것은 없지만 약간의 조언을 해 주고 있었는데
내 가까운 친지 중에 R 신랑과 똑 같은 경우를 겪은 일이 있어 조금은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부근에서 명소로 알려진 레스토랑으로 갔다.
그곳은 R이 처음이라며 가자고 해서 간 것인데 난 몇 번 간 일 있었다.
"들길 사이로"
시내에서 약간 벗어나 국도변에 위치하여 대부분 연인들이 즐겨 찾는 멋진 레스토랑이다.
국도변에서 약간 들어가 주차장이 있고 짧은 '들길 사이로' 를 걸어 본 건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분위기가 그렇다면 젊거나 나이가 많거나 연인끼리가 제격인 곳인데 어울리지 않게 이 무슨....
하지만 R이 가자고 해서 온 것 아닌가..신경쓸 것 없이 오랜만에 기분전환 하기로 했다.
R은 매뉴북을 건네주며 날 보고 주문 하라고 했다.
이런 곳은 아주 옛날 신랑과 딱 한번 와 보았고 너무 오래되어 뭐를 주문해야 좋은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여유 없는 신랑 만나 그동안 알뜰살뜰 살림만 했다는 말을 들은 터이고
또 내가 계산할 생각으로 그 집에서 최상의 매뉴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 음식이 나왔을 때 R은 먹는 방법을 모르겠다며 쿡쿡 거리고 웃었다.
R은 내일이 자기 생일이라고 했고 그래서 내일은 가게를 닫고 하루 쉬면서 친지들을 만나기로 했다는데
그래...그렇다면 이해가 된다면서 오늘은 신랑 대신 생일턱을 쏠테니 마음껏 먹으라고 했다.
그리고 와인도 마시고 싶다 해서 병으로 주문했다.
R은 자기 식당에선 술을 일체 하지 않았는데 그 날은 취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지고 좋다면서 계속 마셨다.
그리고 취기가 오르는지 평소보다 말을 많이 했다.
"센터장님, 오늘 저 좀 이상하죠?"
"음, 그런 거 같아....여느 때와 다른 거 같애...기분이 매우 좋아 보이고...생일이 그렇게 좋은 건가?"
"당연히 좋은 거죠. 그런데 센터장님은 안 좋다는 식으로 말씀하신다?"
"아냐...그럴리가..옛날엔 나도 좋아 했지....그러나...지금은 별로야... 왜 그런지 모르지?"
"왜 그래요?"
"생일을 챙길 수 있냐고? 그나마 잊을 때도 많고 말야...알더라도 그래... 일 땜에 바쁘다 보면...."
"아유..넘했다...사모님 안 내려 오세요?"
"첨에 한 번 왔었어...근데 새벽에 출근해서...밤 12시 다 되어 들어갔더니...담부턴 안 온다 하더라고"
"그럼요... 그런 날은 하루 쉬셔야죠...그러시면 어떻게 해요...사모님도 정말 서운하셨겠네....."
"생일이 덜 바쁠 때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데...근데 내 생일 때는 아니거든...최고 성수기라서...."
"생신이 언젠데요?"
"음력으로 12월 초, 그땐 냉동상품이 년중 최고 피크라 눈코 뜰 새 없이 제일 바쁠 때야...."
"어머....그럼 어떻게 해요... 그래도 어떻게 하셔야죠...?"
"그래서 직원들하고 회식하며 넘어갈 때가 많지 뭐.. 그것도 바빠서 잊어 버리면 그냥 넘어가는 거고...."
"잊다니요...? 사모님이 안 오셔도 전화는 하실 거 아네요?"
"물론 하지... 하지만 들으면 뭐해. 바쁘게 일하다가 깜박 잊을 수 있잖아....뭐, 그런 거 관심 두나?"
"음....올해는 제가 꼭 챙겨 드릴께요..아주 멋지게...정확히 날자가 언제에요?"
"아냐 아냐...그럴 거 없어 고맙지만..... 내 생일에 얽힌 우스운 이야길 해 줄까?
내 생일은 양력으로 한 해에 두번 있을 때도 있어요. 우습지?"
"??? 한 해에 두 번요? 어떻게 그래요? 에이....농담? 그렇담 1년에 나이를 두 살 먹어야 하잖아요?"
"농담이 아냐... 그런데 그 담 해엔 생일이 없으니까 두 살 먹어도 억울할 건 없지..."
"생일이 없는 해도 있어요? 뭐가...그런 수도 있어요? 전 처음 듣네? 진짜 정확히 12월 며칠이세요?"
"흐흐....그건 말할 수 없지.. 신경 쓰지마. 아무튼 말이라도 고마워요."
그러다 보니 어느 듯 와인 한 병이 바닥났다.
R은 많이 취한 것 같고 나도 제법 취기가 올랐다.
그런데 취한 탓일까?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야릇한 생각이 이상하게 슬슬 고개를 쳐드는 것이었다.
붉으스름 한 조명에 빨개진 R의 얼굴이 더 없이 요염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순간 얼굴이 화끈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쩜 이러한 부끄러운 내 표정을 R이 눈치채지 않았겠는가?
이 무슨... 나 답지 않은 창피인가?
난 얼른 일어나 화장실을 갔다.
그리고 겨우 가다듬어 자리에 돌아오니 R이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센터장님, 여기서 나가면 센터장님 사무실로 가요."
"??? 사무실은 왜? 이 시간엔 아무도 없는데?"
"전 한번도 본 일 없잖아요. 그동안 보고 싶었거든요...? 오늘 보게 해 주세요..."
"그랬었나? 그런데 사무실이냐고 아무것도 없어요. PC 몇대하고 전화 그리고 책상이 전부인데 뭘..."
"그래두요...구경시켜 주실거죠?
"알았어...그게 뭐 어렵나... 그러나 오늘은 그냥 집으로 가고 아무 때고 좋으니까 시간 날 때 와요..."
"아네요. 오늘 꼭요"
"허참? 음주단속하면 어쩌라고...? 거긴 한참 가야 하는 곳이잖아. 그러지 말고 오늘은 집으로 가요"
"그럼 차 여기 두고 택시 불러 타고 가요"
"바쁜데 나중에 차 가지러 오라고? 왜 그럴까? 언제던지 오면 되는 걸 가지고... 오늘 많이 취한 거야"
"그래요. 많이 취했어요...그래서 기분 좋아요...그러니까 얼른 가요.. 빨리...?"
"내참..암튼 그만 일어나긴 하자고"
그런데 R이 일어나다 털썩 도루 주저 앉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또 비틀 거리며 일어났다.
그렇듯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바람에 등에 업다시피 하여 차에 태웠다.
그러면서 이 뜻밖의 일을 어찌 해야 좋을지 혼란스러워 하다가 결국 사무실로 갔는데......
R은 사무실을 구경한다는 말과 달리 불을 켜지 말라 하고 소파에 누워 버렸다.
???......!
난 R을 차에 태울 때도 또 방금 사무실로 업어 들어 올 때도 젊은 그녀의 체취에 흠뻑 취해 있었다.
결국 우리는 ....&*$%# ~~
그리고 사무실에서 나온 것은 오랜시간이 지나서였다.
물론 그래도 술은 깨지 않았는데 그녀도 오늘 밤은 계속 같이 있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 밤을 모탤에서 같이 보냈다.
R과의 관계는 영주권이 계속 잘 안 되어 그 후 2년 반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
물론 R을 만나면서 그동안 만나던 여자는 헤어졌다.
R은 전부터 스스럼 없이 편하게 지내던 터라 특별히 조심을 안 해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회사 동료들 중에는 소문을 내며 여자를 만나다가 곤욕을 치른 직원이 있었는데
난 절대 그래선 안 되었다.
누군가 나의 약점을 알고 그것을 이용하게 되면 업무에 치명적인 어려움이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 공장 파견근무 신고차 본부에 들렸을 때 직속 상사 과장이 충고했다.
장기간 지방근무에서 여자문제는 필요악이라며 능력껏 소리소문 없이 비밀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직장 여성은 위험하다며 피하라고 했는데
문제가 심각할 경우 회사에서 모른채 할 수 없다는 충언이었다.
또 한가지 흥미있는 충고는 처녀와 이혼녀 보다는 가능한 유부녀를 택하라는 것이다.
그런저런 자신이 없고 사직서도 쓰기 싫으면 아예 여자는 처다 보지 말라고 했다.
그동안 난 영업쪽에서 불미한 일들을 많이 보고 들었다.
그 과장 충고가 아니라도 1년이면 몇 건씩 터지는 그런 사고를 10년을 넘게 지켜 본 것이다.
미혼인 남자 영업사원은 회사 아가씨와 문제 생기면 결혼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유부남은 그럴 수 없으므로 많은 피해를 보며 망신스럽게 사직하는 일이 가끔씩 있었다.
영업 일선에서 근무하는 아가씨들이 모두 예쁘고 멋지다 보니 그런 일이 더 생기는 것 같았다.
R은 예쁘진 않지만 매우 상냥하고 붙임성있어 센터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가 좋아했다.
그리고 오랜기간 신랑 없이 혼자 지내는 터라 그녀 주위에서 누군가 감시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R은 주변 사람들 이목도 있고 불필요한 낭비를 하지 말자며 주로 영업이 끝난 후 가게에서 만났는데
가끔 R이 쉬는 날에는 좋은 곳을 찾아 드라이브를 즐기기도 했다.
그리고 내 인생의 매모장 몇 장에 그렇듯 아름답고 멋진 추억을 써 놓고 홀연히 떠나간 것이다.
생각하면.
R의 미소는 순박했어도 숨겨진 열정은 불처럼 뜨거웠으며 난 그에 속절없이 녹아 버렸다.
R은 또 내가 어린 아이라도 되는 듯이 꼼꼼히 신경쓰며 챙겨 주었다.
그래서 우스운 말이지만 난 그녀에게서 애인이고 친구 또 여동생 그리고 모성애까지 느낄 때가 많았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잃어버린 것들 그러니까 내 젊은 날의 감정과 감성을 잠시 다시 찾았다고 할까.
그것들은 지나간 것이라며 오래전부터 포기하여 잊고 지냈지 않은가.
나에게 풋풋하고 상큼한 그런 사랑은 17년전으로 되돌아간 타임머신 여행과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타임머신 여행 비용은 약간의 선물대와 식대가 전부였으니.....
나는 R을 사랑했다.
그러한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 후부터 단 하루 거르지 않고 "아침 일찍" 내가 일어날 시간만 되면 꼭꼭 숙소로 전화했다.
아내에게도 돌연사 사건을 말했지만 한번도 전화 한 일 없었는데 R은 그렇지 않았다.
PS
본문에 쓰지 않은 이야기가 이외에도 많지만
다음에 미국에서 보내 온 이 매일을 몇 편 올리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