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핑게 있는 무덤 A
이 이야기는 박과장과 화해하기 전 불편한 관계일 때 이야기다.
아줌마들이 급료 받는 어느 날
그 날도 아줌마들은 출근하기 무섭게 다른 약속하지 말고 자기들과 식사하자고 했다.
보통 때와 달리 그 날은 아줌마들과 어울리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한잔하고 싶은 생각은 있었다.
아줌마들 인건비에 대하여 박과장이 한 말이 기분 나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반품량에 비해 알바 비용이 너무 많다며 대폭 줄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은 내가 인건비 절약에 신경쓰지 않고 태만히 했다는 말인데
그게 사실인지 여부는 한달간 들어온 반품량과 인건비 지출내역을 보면 쉽게 확인 가능한 일이었다.
반품은 품목과 금액별로 년간 및 분기별 월별 주간별 일별 등으로 상세하게 관리되기 때문이다.
이제 많이 단련이 된 상태이고 괜한 시비였지만 그래도 기분이 몹씨 나빴다.
그러나 본부장과 약속을 생각하여 꾹꾹 눌러 참았다.
박과장이 문제가 많은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반품업무를 하며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게 식사와 술을 대접하려는 대리점 사장과 영업사원들이 매일 수시로 들락거렸으며.
그들이 반품할 때마다 실제로 반품되는 수량과 반품서 숫자가 일치하지 않고 항상 틀렸다.
틀린 정도 이상으로 반품서 숫자가 실제량 보다 항상 턱 없이 많았다.
따라서 그들이 작성한 반품서 수량을 그대로 인정해 주면 틀린 수량만큼 회사의 손실이 되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들의 반품서상 수량을 무시하고 실제 입고된 수량으로 모두 수정하여 서명 날인했다.
수정된 그 반품서는 전체 매출액에서 그 수량만큼 뺀 차감전표와 함께 영업부 감사자료로 5년간 보관된다.
그래서 수정 당한 그들은 즉각 박과장에게 달려갔고 박과장은 그 때마다 식식거렸으며
가끔은 나를 불러 반품은 경우에 따라 봐주어야 한다며 너무 고지식하게 하지 말라고 주의 주듯이 말했다.
난 고지식과 원칙은 다르며 내가 마음에 안 들면 반품담당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라고 했다.
하지만 난 박과장 말처럼 고지식하게 처리하지 않았으며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처리한 경우가 많았다.
다만, 변명이 이해되는 경우에 한정했고 반품자가 누구인가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유리병 제품일 때 병뚜껑만 있고 파손된 병조각이 없으면 규정상 불가하지만 처리해 주었다.
그런데 문제의 그들은 깨진 병조각조차 없고 있어도 실제 수량보다 턱없이 크게 부풀린 숫자였다.
그 때문에 박과장은 더욱 미워했지만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원칙대로 처리했다.
당시 반품은 유통기한 경과의 폐기상품보다 생산시의 불량품이 더 많아서 납품공장 반송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상품을 납품하는 공장 사장이 잘 아는 중역이라 서류와 실물이 많이 틀려도 어려움은 없었다.
따라서 내가 공장에 반송하는 일이 까다롭고 힘들기 때문에 정확하게 처리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공장 사장을 잘 알아 반품이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박과장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래서 더욱 나를 미워했고 못 마땅해 했다.
그러면서 심심하면 반품작업장에 내려와 괜한 트집 잡기 아니면 시시콜콜 잔소리로 들들 볶았다.
작업장이 노천이라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급히 천막을 덮어야 할 때도 도와 주는 직원이 아무도 없었다.
물론 나와 친하여 돕고 싶어 하는 직원이 많이 있지만 난 그들 입장을 생각하여 사양했다.
나의 안양 상온물류센터 생활은 그처럼 몸과 마음이 외롭고 고달펐다.
아줌마들 알바비 때문에 한마디 듣던 그 날 저녁 울적한 마음에 아줌마들과 술을 많이 마셨다.
그리고 2차 노래방은 내가 가자고 했다.
어차피 술이 깨야 집에 갈 수 있고 또 얻어 먹은 답례를 해야 했다.
그런데 왠일인지 노래방에서도 계속 술이 들어왔고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도 아줌마들은 끝날 줄 몰랐다.
그 중에 연이 엄마가 특히 술이 강했고 계속 주문을 했다는데....
결국 그날은 너무 취해 집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센터가 외곽지역이라 검문소가 있고 집까지 50분 거리,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정 약간 넘어 아줌마들을 보내고 근처 여관으로 갔다.
그리고 방에 들어서는데 방 전화가 울려 받았더니 좀전에 헤어진 연이 엄마가 프론트에서 한 전화였다.
한잔 더 하고 싶다며 사달라는 것을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다음에 사겠다며 달랬다.
그러나 딱 한잔이면 되고 작업이 오늘 끝났으므로 한달 후는 너무 멀다며 빨리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많이 취한 상태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근처 포장마차로 갔다.
당시 연이 엄마는 40대 초반이었고 그때서야 자세한 사정을 알았는데 기구한 운명의 불행한 여자였다.
남편은 월남전 고엽제 후유증으로 문밖 출입이 어려운 폐인.
첫 딸과 둘 째 딸이 말 못하는 농아이고 셋 째도 딸인데 다행히 정상이라 자신의 희망이라고 했다.
그래서 여러 직장을 돌며 힘들게 살고 있다는데
젊으니까 한 직장에서 오래 근무하는 것이 여러가지로 더 좋지 않은가 했더니
가는 곳마다 꼭 누군가 치근거려 오래 있지 못하고 나왔다는 것이다.
요즘과 달라서 그 무렵에는 고엽제 피해자에게 정부 보조금이 없었다.
두 딸의 특수학교 교육비가 부담이 너무 커서 시집의 도움으로 간신히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두 딸이 대학진학을 못하고 직장에 나가고 있다는데
남편이 고엽제와 술 때문에 폐인이 된데다 중독이 심하여 정신병원에서 살다시피 한다고.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는데 너무나 딱하고 안타까웠다.
시간은 두시가 가까웠다.
집이 근처라 하여 바래다 주겠다 했으나 괜찮다며 걱정말고 들어가 자라고 했다.
그날 새벽의 별빛은 더 흐린 듯 했고 달이 없어선지 더욱 외로워 보였다.
그리고 내 마음도 우울했지만 연이 엄마도 무척 힘들고 슬픈 밤인 것 같았다.
그래서 집에 안 가고 싶으면 같이 들어가자 했고 잠시 주저하는 듯 하더니 따라 들어왔다.
연이 엄마는 내가 만나고 싶을 때 전화했고 그녀가 먼저 전화한 일은 한번도 없었다.
대부분 박과장에게 스트래스 받는 날 만났는데
우리의 만남은 그녀 친구들도 모르게 극비리에 계속되었다.
물론 혹시라도 박과장이 알게 되면 내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우리의 만남은 내가 지방 공장에 내려간 후에도 몇 번 더 계속 되다가 끝났으며
처음에 지방에 갈 때까지만 만나기로 약속한 것이 조금 더 길어진 것이다.
공장에 가면 상당 기간 업무안정시키느라 정신 없어 시간이 여의치 않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내려가 보니 만나는 것은 물론 생각할 시간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아쉽지만 추억으로 간직하고 그녀에게 좋은 날과 행복을 빌면서 헤어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