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2등은 죽음
공장에 상품을 생산주문할 때마다 공장에선 항상 힘들어 죽겠다고 했다.
급히 필요한 상품을 긴급주문하면 그들은 요구한 시간에 절대 불가능하다며 거부하기 일쑤였다.
물론 그들도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급히 생산하면 야간 특근수당 주어가며 공장을 돌려야 하고 그만큼 상품 원가가 올라간다.
그런데다 직원들이 배가 부른지 야간 작업은 수당이 150% 인데도 모두 싫다며 하지 않으려고 했다.
또 상품 원료와 박스 또는 포재(包材 : 비닐봉지)가 떨어져 긴급 조달이 안 되는 경우도 허다했으며
그리고 마침 생산 기계 고장으로 작업이 불가능할 때도 있었다.
각 기계마다 일일 생산 케파가 한정되어 있는데 턱 없이 많은 물량의 갑작스런 요구도 어려운 일이고
그렇다고 언제 주문할지 모르는 각 상품과 원자재를 미리 많이 생산하여 비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공장도 철저한 원가관리와 월 생산목표관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업 측은 앞에 말한 핑계를 들어 이유없다며 공장과 물류 측 사정을 깡그리 무시했다.
그러면서 판매가 부진하거나 목표달성 못했을 때는 그 책임을 사정없이 물류로 돌렸다.
하지만 나는 공장 사정을 영업부처럼 무시할 수 없어 부득이 지역센터들 긴급 주문을 몇 번 펑크냈다.
지역센터 주문을 펑크내면 당연히 그 지역 영업에 판매 차질로 이어진다.
또 판매 차질과 함께 적시에 필요한 상품을 공급받을 수 없는 회사라는 거래처 신뢰 실추 문제도 있다.
난 그런 문제로 몇 번 펑크낸 일로 회사 영업을 총괄하는 영업본부장에게 호출 당했다.
그는 부사장 다음으로 서열 4위인 상무였는데 부득이 하여 어쩔 수 없었다는 나의 변명을 듣고 나더니
"이형!.. 동작동 국군묘지... 가 본 일 있겠지요?"
"예, 있습니다."
"난 가끔씩 갑니다. 그리고 그 분들은 국가를 지키다가 죽었지만 난 우리 회사를 꼭 지키겠다고.
그 분들은 국민 생명과 재산을 지켰지만 나는 우리 가족(회사원)을 지키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옵니다"
"...........!"
"전쟁에선 이유 없습니다. 무조건 이겨야 합니다. 전쟁에서 2등은 죽음입니다. 이형도 가족이 있지요?
변명과 핑계들이 가족을 먹여살려 줍니까?
내가 죽으면 끝입니다. 그럼 가족을 누가 먹여 살리겠어요? 전쟁에서 이겨야 하는 이유가 그겁니다."
난 사무실로 돌아 오면서 곰곰히 생각했다.
영업본부장의 말은 백번 옳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이 전쟁인데 죽고 사는 전쟁터에서 이유와 핑계들이 통할 리 없다.
그렇지만 나는 공장의 부장에게 생산을 요구하고 있고 그는 나보다 직급이 높은 상급자였다.
원래 주문 업무는 그의 밑 과장 업무인데 내가 원칙대로 밀어 붙였더니 못하겠다고 하여 물러난 것이다.
여하튼 그 부장이 나의 직속 상사는 아니라 해도 같은 회사 산하 공장의 부장 아닌가.
부장보다 내가 나이가 더 많고 입사도 더 빨라 고참이긴 하지만 그래도 부장은 대리의 상대는 아니다.
그 때문에 그에게 직급으로 눌렸고 그 결과 영업 본부장에게 호출 당하는 곤욕을 치른 것이다.
그 부장의 직속 상사인 공장장은 나와 비슷한 연배였으며 친하지는 않아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래서 공장장에게 애로를 말했으나 가제는 게편이어선지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난 괴로운 마음에 잠못 이루며 꼬박 이틀 밤을 새웠다.
그리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새벽녘에 크게 심호흡을 하며 원칙대로 나가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먼저 부서 최고 상사인 물류본부장 출근을 기다렸다.
물류본부장은 나 보다 두 살 더 많은 이사급 중역이었는데 갑자기 찾아 갔는데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나의 고충과 결심을 듣더니 껄껄 웃는 것이었다.
"이형! 겨우 그런 문제로 고민을 했단 말이요? 내가 아는 이형은 절대 그렇지 않다 알고 있는데요...."
"제 입장에서 어떻게 고민이 안 됩니까?"
"아니, 이형의 고민은 옳고 맞아요. 그동안 그 공장에서 제발 이형말고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는
요청이 여러번 있었지만 내가 번번히 묵살했다는 것은 이형 모르지요?"
"??????....."
"나한테 들었다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아요. 난 이형을 누구 보다 믿습니다. 물류는 영업을 도와야지
생산공장 도울 일 없어요. 그랬다간 우리 다 죽습니다. 지금 잘 하는 거에요. 계속 소신대로 하세요"
"그렇지만 공장도 같은 회사고 그 분은 부장이고 자꾸만 어렵게 하니까......"
"이형은 전국 영업을 챙기는 막중한 중앙책임자 아닌가요? 업무 비중으론 공장 부장보다 더 큽니다.
그런데도 직급이 낮다고 끌려가면 그땐 내가 가만히 둘 수 없어요. 맥없는 사람과는 일 같이 못해요.
이형의 그 고집이랄까 두둑한 뱃장이랄까.... 이제까지 잘 하시다가 왜 갑자기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더 이상 고민할 것 없다.
부장이라도 직속 상사가 아닌 이상 구애 받지 말고 업무를 최 우선하라는 충언 아닌가?
생각해 보면 부장쯤 되는 사람이 자기 밑에 과장이 할 업무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이기도 하다.
부장은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하는 것이 정상이다.
사무실로 돌아와 여직원에게 공장에 보낼 공문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오늘부터 공장으로 생산을 주문할 때 공장의 담당자가 누구든 원칙대로 하겠다는 통보였다.
또 물류에서 주문한 제품을 생산 못하면 그 사유를 영업부에 즉각 그리고 직접 해명하라고.
만일 해명 회피시에는 물류 임의로 영업 측에 해명하겠으며 그에 대한 책임은 공장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팩스를 보낸 다음 그 쪽에서 받았는지 전화로 확인하라고 했다.
그리고선 철저하게 실행했다.
그 결과 공장장이 영업 책임자에게 수차 욕을 먹게 되었고 그 부장은 결국 과장에게 업무를 넘겼다.
물론 나는 그 과장에게 예의는 지켰지만 업무는 별개로 인정사정 봐 주지 않았다.
당연히 업무가 대폭 개선되었으며 그 대신 그 부장과 과장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을 것은 물론이다.
그 상황에서 중앙물류센터가 그 공장으로 이전하게 되었고 나를 거부한 주 원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던 저온중앙물류 업무를 공장의 그 과장이 했다.
그렇게 한 결과 각 지역의 저온물류 센터장들과 영업 측의 불만과 항의가 그치지 않았다..
저온물류가 뭔지 모르는 그 과장이 자신의 고유업무를 보며 겸직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그동안 안양에 있는 상온 물류센터에서 '예상했던' 혹독한 고생을 하고 있었다.
본부장 지시로 공장에 갈 때까지 잠시 상온센터업무를 거들며 기다리라고 한 것이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안양의 그 상온물류센터에서 잊을 수 없는 '핑계 있는 무덤' 추억을 만들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