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걱정하는 직원들에게 당당하게 임하겠다며 걱정하지말라고 오히려 위로했다.
다만, 많이 취한 상태라 횡설수설 하면 안 되므로 그것은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많이 취했어도 정신이 말짱하여 걱정할 것 없었다.
그런데 근무중에 더구나 아침부터 왜 술을 마셨느냐.....그것도 대답할 말이 없지 않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센터사무실에 들어서니 본부장이 나를 보자 마자 대뜸
"내가 박과장에게 들은 말이 사실이요?"
".... 예, 사실입니다."
"그런 일을 하면 안 되는 것 잘 알고 있을텐데 왜 했습니까?"
"물론 잘 압니다. 알지만 직원들을 먹여야 일을 시키는데 달리 방법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그럼 박과장한테 돈을 달라고 해야지. 달라고 해 봤나요?"
"했습니다. 하지만 없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야간 작업은 매일 해야 하는데요."
"그래도....계속 달라고 해야지, 안 준다고 회사가 하지 말라는 일을 하면 되는 거요?"
"본부장님,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
"본부장님 앉아 계신 그 의자는 박과장 자립니다.
저는 그 의자.. 그 자리가
현장에서 일하는 우리보다 더 힘들고 더 어렵고 더 골치 아픈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편하지 않고 또 편해서도 안 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돈... 없겠지요. 그래도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하면 수당은 못줘도 저녁은 먹여야지요.
그런데 돈 없다는 걸로 끝입니다.
그럼 매일 같이 야간에 대형 차량이 물건을 잔뜩 실어 오는데 하차작업을 어떻게 합니까?
배고프면 집에서 먹고 와서 물건 내려요? 그럴 수는 없지요.
만일, 그 의자에 제가 있고 돈이 없다면 전 깡통차고 구걸해서라도 부하들을 먹일 겁니다.
늦게까지 일시키면서 어떻게 굶깁니까?
지금 제 밑에 직원들이 17명입니다.
사람이 많아 한 숫가락씩 밖에 못먹이더라도 어떻게 해 봐야지 난 모른다 하면 안 되지요.
그리고 그 일은 저보다 그 의자에 있는 사람이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박과장은 말만 하면 주머니 탁탁 털고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 끝입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제가 할 수밖에요.
그걸 하기 싫으면 야간 작업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럼 야간에 들어오는 대형차량 물건은 누가 내립니까?
다음 날 새벽에 나갈 물건들은 또 어떻게 하고요?
도대체 그런 상사가 어디 있습니까?
제가 한 일 물론 잘 한 일 아니지만 제가 왜 그 짓을 했는지 현장 직원들은 다 압니다.
이상입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 다 드렸습니다."
본부장은 조용히 넋을? 잃은 듯 턱을 손에 얹고 듣고 있었다.
아무 말없이 끝까지 다 듣고 나서도 한참동안 내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리고 박과장에게 야단치듯 내갈기 듯 한마디 하더니 일어나 휭하니 가 버렸다.
"야! 임마! 박과장!.. 짜식...이거 알고보니 형편 없는 놈이구먼!
넌 임마 과장자격 없어! 당장 사표 써! 네가 잘못한거야 임마! 당장 사과 드려...."
난 그 때 여의치 않으면 사직서를 던질 작정이었다.
10여년 근무해 온 직장이라 아쉬움이 크지만 본부장이 사표를 내라고 하면 어쩔 수 없다.
난 본부장을 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지만 어쨌던 비리를 고발 당한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사직여부는 본부장 판단에 맡기고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해버린 것이다.
사무실 밖에서는 나를 걱정하는 많은 직원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박과장이 야단 맞고 일이 끝났다는 말에 모두가 박수치며 큰 소리로 환호했다.
그 때 직원들의 그 환호를 들은 박과장 마음은 어땠을까?
나중에 상당기간이 흐른 후 그가 나에게 직접해 준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너무나 분해서 며칠을 잠 못자며 괴로워 하다가 결국 본부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했다.
그런데 본부장은 사표를 반려하면서 또 한번 꾸지람을 하더라고 했다.
자신도 물론 이성은 반성해야 된다고 하는데 감정이 도저히 용납 안 되더라고 했다
그래서 나만 보면 속에서 열이 바쳐 업무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는데
그런 상태에서 본부장한테 나를 잠시 몇 달만 데리고 있으라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잘 되었다' 면서 두말 않고 받겠다고 했다고.
난 지금도 다른 센터도 있었는데 하필 박과장에게 보낸 본부장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떤 마음에서 박과장에게 보낸 것일까?
내가 공장으로 가지 못하고 상온센터에서 대기해야 할 때 하필이면 왜 박과장에게 가라고 했을까?
박과장은 나에게 사과하라는 본부장 명령대로 사과를 하기는 했다.
그러나 형식적이었고 속 마음은 눈에 띄게 아니어서 얼음장 만큼이나 냉냉하고 차갑게 대했다.
그 당시 회사는 서울과 경기 일부의 5개 지역센터를 하나의 대형센터로 통합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초기라 안정이 안 돼 업무가 어수선 했고 직원들이 많은데도 우왕좌왕하며 업무능률이 형편없었다.
그 통합센터 관리자가 박과장이었고 본부장이 그를 도와주며 잠시 있으라고 한 것이다.
그랬으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그 때 내 입장과 처지가 얼마나 딱 했을 것인지 충분히 상상이 될 것이다.
본부장은 나를 박과장에게 보내면서 신신당부 하듯이 몇 번을 말했다.
"길게 잡아 1년일까? 아마 6개월 쯤일거야.. 그렇게 길지는 않을테니. 아뭇소리 말고 참고 있어요."
"하필 왜 박과장입니까? 가능하면 다른 곳으로 보내 주십시오"
"이형은 일 잘하고 다 좋은데 인간관계... 그게 항상 문제요. 안 그럼 공장에 벌써 내려 갔을거 아니요."
"....! 알겠습니다. 참고 기다리지요."
"그렇게 해요, 그리고 박과장이 이형에게 어떤 일을 맡기던 업무배치는 내가 말하기 곤란하니까...."
"염려 마십시오, 그런 문제로 심려끼쳐 드리진 않겠습니다."
박과장에게 간 이후는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마치 심술궂은 시어머니에게 당하는 며느리의 그것과 다를 것 하나도 없었다.
박과장은 나에게 최하급의 업무 즉, 이제 막 들어 온 새까만 신입사원도 기피하는 후진 일을 맡겼다.
그것은 영업에서 판매하다가 여러가지 이유로 반품되어 온 폐품을 정리하는 업무였다.
푹 썩어 냄새가 진동하는 폐품 속에서 허옇게 꿈틀대는 구더기들과 온 종일 씨름하는. 일이었다.
정리작업을 하다 보면 구더기들이 팔뚝을 기어 올라 목으로 해서 셔츠 안 쪽으로 떨어 지기도 했다.
그런 폐품을 하나하나 분류하여 상품별 규격별로 정리하여 반품서 내역과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 때가 4월이던가 5월이던가.
대리점 사장들과 영업사원들은 따가운 뙤약볕 마당에 아무렇게나 마구 쏟아 놓고 가 버리는데
그들 중에는 나를 아는 사람들도 많아 연민의 눈과 표정들이 얼마나 싫고 괴로웠는가.....
센터 규모가 워낙 초대형이라 매일 들어 오고 나가는 물량이 대단했으며 그만큼 반품량도 엄청났다.
그런데도 박과장은 직원 한사람만 붙여주면서 그 많은 일을 하라고 했다.
한마디로 '너 죽어 봐라' 였다.
너무 어이 없어 웃어버린 것은 전체 직원 40여명 중에 제일 문제직원을 나에게 붙여 준 때문이다.
그 직원은 회장과 가까운 친척이라 하여 누구도 함부로 하길 꺼렸고 본인도 내 놓고 위세를 부렸는데
그러니 일을 열심히 할 턱이 없건만 그런 녀석을 일부러 골라 붙여 준 것이다.
그것은 누가 봐도 고의적인 배치였고 애당초 나에게 반품업무를 하라고 한 것도 정상이 아니었다.
윗 쪽의 본 센터에서 40여명을 지휘하는 센터장 5명은 나에게 상품을 공급받던 지역센터장들이었다.
게다가 나보다 아래인 계장급이고 난 두 개의 중앙물류센터 중 하나인 저온중앙물류 센터장인 것이다.
지역 센터들은 직원이 많아야 8~9명인데 난 중앙센터이고 또 커서 17명을 데리고 있었으며
또한 전국 20여명 지역센터장들이 물류본부 소속이고 업무도 내 영향하에 있어 부하와 다름 없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 이 센터에 있는 저온 물류센터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 당했고
그리고 이 센터 근무자 40여명중에 최 하급의 업무에다 극심한 푸대접 속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외에도 또 있었다.
상온상품의 품목과 품목별 규격 이름이 1만개가 넘어 그것을 모두 암기하려면 절대 쉬운 일 아니다.
물론 암기 안 해도 일은 할 수 있지만 보다 쉽게 빨리 하려면 암기해야 가능하다.
그리고 센터에서 고문관으로 소문난 녀석과 단 둘이서 그 많은 일을 처리하려면 암기는 필수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박과장의 '보복'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또 반품서 작성 후 박과장 결재를 받을 때 하나라도 틀리면 빈정거림과 야유를 각오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