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 도전!
안양 상온물류센터에서 그렇게 2년쯤 지난 어느 날 본부장이 샌터에 들려 나를 찾았다.
그리고 아이들 학교 때문에 지방 공장근무가 걱정된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문제는 혼자 내려가면 되지만 공장에 간 다음에 당장 처리할 업무가 더 걱정스럽다고 했다.
여러 경로를 통해 공장의 중앙물류업무가 완전 개판이고 엉망이라고 듣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가 알기로 공장은 지금 문제가 아주 심각한 것 같습니다."
"심각? 뭐가요?"
"사실을 확인하기 전이라 확정하여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제가 판단할 때 매우 심각한 것 같습니다."
"글쎄...그게 뭐에요? 내겐 괜찮아요. 또 확실하지 않아도 되니 말해 봐요. 뭐가 그렇게 심각합니까?"
"현재 공장에 비축되어 있는 상품 모두가 유통기한이 얼마 안 남은 불량품인 것 같습니다."
"뭐요?! 그 많은 비축재고 전부가요? 그럼 정말 큰일 아닙니까? 여기 있는 이형이 그걸 어떻게 알지요?"
"제가 상온물류센터에서 일하고 있는데도 전국의 저온물류 지방센터장들이 전화로 자주 하소연합니다.
그리고 공장의 수송차량 기사들도 저를 만나면 똑 같은 이야기를 하니까 사실일 겁니다."
".........!"
"제가 전에 그 업무를 볼 때는 생산한지 7일.... 최고 10일이내의 신상품만 공급했었는데요......"
"그런데 지금은요?"
"생산한지 한 달이나 경과한 것을 새것이라 말하고 심지어 두 달 가까이 지난 것도 보낸다고 합니다."
".... 상품들 유통기한이 어떻게 되지요?"
"대부분 3개월입니다. 그래서 한 달이상 경과하면 판매가 어려워 대부분 반품됩니다."
"..... 그게 사실이면 큰일이군요, 여하튼 이형이 내려가면 해결할 수 있겠지요?"
"전 원칙대로 할 겁니다. 전에도 그렇게 했고요....그런데 이번에 그리 하면 공장과 심각한 충돌이...."
"흠! 비축재고는 인수해야 하니까...일단 재고부터 확인합시다. 재고조사가 끝나면 내가 내려 가지요.
그 때까지 공장과 절대로 충돌하지 마세요. 이형이 공장에 내려 가는 건 약속하시는 거지요?"
"예, 내려가겠습니다"
내가 내려가기로 결정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공장에선 온통 난리 법석이라는 소문이었다.
그런데 내려가기로 한 며칠 전에 갑자기 본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공장 파견을 2개월 더 늦추기로 했으니 그리 알고 좀 더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물론 그 지시에 따랐지만 파견이 지연되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공장 비축재고를 나에게 인계인수할 때 문제가 없도록 충분히 준비하겠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내 판단이 맞다면 그 일은 두 달 동안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그들이 열 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두 달로는 해결 불가능한 엄청난 물량이었다.
그 정도로 공장은 엉망 개판이었고 푹 썩어 냄새가 진동한다는 소문이었다.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2년 전 나를 완강히 거부하며 필요없으니 오지 말라고 큰소리 친 것이다.
여하튼 그들이 공장을 쓰레기장으로 만들어 놓고 자신들은 못하겠다며 내가 내려와 해결하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선 그 부장과 과장은 책임지고 사표를 내야 하고
그리고 그들을 감싸고 돌았던 공장장도 책임이 크므로 절대로 같이 일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10여년간 혼신을 다하여 만들어 놓은 저온물류 업무시스탬을 그 작자들이 망쳐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망친 결과로 지난 2년간 회사에서 입은 손실금액은 너무 크고 많아 추정조차 어렵다.
내가 대략적으로 추정한 손실은
내가 알고 있는 정보가 사실일 경우 영업부는커녕 회사가 들썩 거릴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현재 공장에 비축된 재고 상품만 문제면 그것을 금액으로 환산하는 일은 쉽다.
물류업무에서 첫 번째로 지켜야 할 중요한 철칙과 원칙이 "하루도 미루지 말고 즉시 처리하라" 이다.
그런 것을 그들은 2년이나 미루며 게을리 했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두 달을 기다리던 중 나로선 맥이 쑥 빠지는 소문이 들려 왔다.
절대 가만 두지 않겠다고 벼른 과장이 사표내고 떠났고 부장은 다른 공장으로 자리를 옮겨 갔다는 것이다.
너무도 실망스러워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다.
그리고 공장장이 관리부장 업무를 겸직하기로 했고 과장은 다른 곳에서 새로 왔다고 했다.
어쨌던 두 사람을 잡으려다 놓친 상황이어서 너무나 아쉽다는 생각과 씁쓸하고 허탈한 마음이었다.
여하튼 두 달이 지나 약속한 대로 공장에 내려갔다.
물론 센터의 박과장은 몹씨 서운하고 그동안 고생이 너무 많았다며 송별회를 거창하게 해 주었다.
공장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전과 같지 않고 묘한 느낌이었지만 인사 차 일단 공장장을 찾았다.
그리고 새로온 과장이 기숙사를 안내하며 몇 개의 방을 보여 주며 마음에 드는 방을 고르라 하는데
아담한 5층의 27평 아파트 3세대를 회사에서 전세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들 방 하나에 두 세명씩 함께 지내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특별히 독방을 준다며 생색을 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환영회식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공장장과 과장 그리고 대리들과 현장 책임자인 반장들이 모두 참석했다.
자리가 어지간히 무르익자 새로온 젊은 과장이 궁금하다는 듯 앞으로 업무방향에 대해서 물어 왔다.
나는 다음 날 업무 미팅시에 하려고 했던 것을 말해 주었다.
"저에 대해서 여러 부정적인 말들이 많은 줄 잘 압니다.
그러나 제가 공장에 온 건 공장을 돕기 위해서 온 것이지 절대 공장을 어렵게 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저를 보낸 물류본부장님 뜻이고 또 공장에서도 원하는 것일 겁니다.
하지만 공장에서 여러분들이 저를 도와 줘야 가능한 일이고 그럼 저도 힘껏 공장을 도울 것입니다.
다만 현 시대는 공장이 영업에 맞춰야 하고 영업이 공장을 맟추는 시대가 아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시대가 급격히 변하고 있고 회사정책과 방향과 영업 스타일이 바뀌고 있음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회사 정책과 방향이 바뀌었으면 직원들은 그에 따라야 하지요.
어쩌면 제가 하고자 하는 방향이 공장 입장에선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못할 일 없고 오히려 현재보다 훨씬 더 좋아 질 수 있다고 전 믿습니다."
"그럼, 현재에서 무엇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겁니까?"
"이미 바꾼 것도 많이 있겠지요? 제 생각에 제일 시급한 문제는 우선 생산 품목을 더 늘이는 일입니다"
"생산품목을요? 어떻게 말입니까?"
"현재 하루에 몇가지 품목을 생산합니까? 전 5~7가지 정도로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대체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 영업에서 요구하는 것은 하루 15~20가지 입니다. 그건 공장도 잘 알고 있을텐데요.
앞으로 그렇게 가야 합니다. 영업에서 해 달라는데로 해 줘야 합니다."
"물론 알고 있지만 그렇게는 불가능합니다. 설비 기계의 케파가 부족하여 절대로 안 되게 돼 있거든요"
"그럴 겁니다. 저는 그것을 여러분과 같이 앞으로 해결해 보고 싶다는 겁니다."
"센터장님은 지금 공장 사정을 잘 몰라 하시는 말씀인데요... 아시면 절대 그런 말 못하실 겁니다."
"예, 잘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업 쪽에는 어떤 이유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부터 유통기한이 생산한지 한 달 이상 경과한 상품은 인수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한 달요???.... 지금 그런 상품들이 엄청 많은데 그럼 그것들을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불량품 폐기는 공장에서 해야지요. 폐기 업무는 공장에서 하는 것이 더 쉽고 비용도 덜 들지 않나요?
왜 비싼 인건비와 차량 운임 들여서 여러사람 손 거치며 먼 지역센터를 왔다갔다 합니까?"
".........!!!!!"
"생각해 보세요.
제가 유통기한 한 달 지난 상품을 받으면 그 상품이 센터에서 모두 출고되기까지 약 열흘 쯤 걸립니다.
유통기한 3개월짜리가 이미 한달이 지난데다 그 상품들이 하루 이틀에 다 출고되는 게 아니니까요.
그 때문에 그 중에서 제일 늦게 출고되는 상품은 이 공장에서만 벌써 한달 열흘이 지나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품이 지역센터에 가서 똑 같은 이유로 또 열흘 정도 센터에서 날짜를 잡아 먹습니다.
즉, 상품들이 영업 매장 구경하기도 전에 공장과 물류센터에서만 거의 두 달이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유통기한 3개월짜리가 두 달이 지난 상태인데 각 대리점 창고에 가서 또 낮잠 잡니다.
그렇게 대리점을 거쳐 최종적으로 매장에 전시되면 상품의 유통기한이 겨우 한달 밖에 안 남게 되지요?"
"물론 그래선 안 되니까, 영업에서 그렇게 되기 전에 빨리빨리 팔아 없애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요즘 소비자들은 만만치 않아요. 예전 같이 대기업 브렌드만 보고 사 주지 않습니다.
브랜드 상관없이 유통기한 좋은 것만 골라 사 가는데 영업사원이 그것을 어떻게 못하게 합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공장 사정도 있는데 무조건 무시하면 안 되지요."
"현대의 시장은 매우 까다로워서 유통기한 좋은 것은 물론이고 품목도 다양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글쎄 우리도 그것을 잘 안다니까요? 알아도 공장 사정이 한계가 있고 어려우니까 문제라는 거지요"
"그럼 뭐 간단합니다. 영업전쟁에서 죽어야지요... 안 죽고 살고 싶으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던가요.
전쟁터에서 새무기를 달라는 군인들에게 고장나 못쓰는 무기를 공급하면 죽으라는 거 아닌가요?
비싼 기계와 설비 또 인건비 들여 상품을 생산하는 이유가 뭡니까?
열심히 생산해서 공장 창고에 오래 보관하고 있다가 곧 바로 쓰레기장으로 보내려고 생산합니까?
저도 여러분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고 공장 형편과 사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거 왠만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해 봅시다.
나는 20년의 회사생활 모든 것을 걸고 죽기 살기로 저온상품물류체계를 확고하게 세울 작정입니다.
그것을 못해 죽기 싫고.. 아니, 그것을 못해 죽다니요.
전 할 수 있다는 자신도 있습니다만 할 수 없어서 죽는 것은 무엇보다 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