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서 소동(2)
물류가 영업부에서 독립한 조직 개편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했다.
하루가 멀다고 변하는 시장 환경과 다양한 고객서비스 요청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라지만
내가 볼 때는 그런 표면적인 이유 보다는 내부적인 이유 때문인 듯 했다.
그 후에 영업부 판매업무에 혁신적이라 할만큼 큰 변화가 있었고 많은 고질적 병폐들이 사라진 것이다.
두번 째 사직서 소동도 그 병폐 문제로 부장과 또 충돌한 것이었다.
신규업체의 신상품이 처음 시장에 진출할 때 판매거점 확보를 위해 일정기간 대폭 할인이 용인되는데
이른바 그러한 '출혈판매'가 거점 확보 후에도 계속되어 수지균형을 위협하는 주 요인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유형이 다양하고 매우 복잡하여 여기선 나와 관련된 한가지만 이야기 하기로 한다.
물류가 영업부에서 독립하기 얼마 전에 부장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뭔지 모를 두툼한 서류 한 뭉치를 주면서 며칠 안 남은 월말까지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센터사무실에 와서 보니 그동안 대리점에 판매한 상품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반품되었다는 반품서였다.
하지만 나의 확인서명이 있는 반품서는 한장도 없었다.
영업사원이 대리점에 판매했다가 다시 반품하려면 센터에 반품을 갖고 와서 나에게 확인받아야 한다.
따라서 그 반품서는 모두 허위였다.
다시 말하면 대리점들이 월말에 입금해야 할 금액에서 부장이 <어떤 이유로> 그 금액을 빼주려는 것이다.
여직원을 시켜 반품서 총액을 합산해 보니 여러 달을 미루어 온 상태라 매우 큰 금액이었다.
영업에선 월말에 거래처 별로 마감작업을 하여 그들 거래처와 담당사원 장부를 정확히 일치시켜야 한다.
따라서 그 반품서 금액만큼 빼 주어야 영업부와 각 대리점들 장부가 일치한다는 뜻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부장은 조직이 개편될 것을 알고 미리 영업부와 대리점 장부를 맟추려고 한 것인데
자리를 옮길 때 신임 부장과 인수인계시에 문제가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모르는 반품서가 왜 그처럼 많은지 알기 위해 친하게 지내는 영업사원에게 물었다.
금액이 작다면 바쁜 판매업무에 착오라고 이해할 수 있으나 이처럼 큰 금액은 도대체 어떤 경우인가?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확실을 기하기 위해 담당에게 확인한 것이다.
역시 예상했던대로 영업활동을 핑계로 대리점 사장들에게 얻어 먹고 흥청망청 마셔버린 접대 댓가였다.
당시 영업부 영업사원들은 거래처 유형별로 그리고 지역별로 분류하여 담당구역과 업무를 맡고 있었다.
이를테면 백화점과 대형마트 등 직판형태 거래처를 전담하는 부서와
재래시장과 동네 수퍼 등에 상품을 공급하는 지역 대리점 전담부서가 있었고
학교와 병원 관공서 기업체 등 구내식당에 납품을 전담하는 실수요 거래처 전담부서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영업사원들의 애로가 무척 많았으며 나는 그들의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우선 그들의 영업활동에 비해 활동비가 너무 적고 담당과장과 부장에게 밉보이면 회사생활이 어려웠다.
부서장에게 찍히면 진급은커녕 담당구역조차 모두가 기피하는 지역으로 밀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업사원 평가가 판매실적보다 과장과 부장을 어떻게 만족시키느냐에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선지 부서장이 거래처를 순시할 때마다 그 지역 영업사원들은 전전긍긍해 하며 초비상이 걸렸으며
어떻게든 접대를 잘하려고 무리하는 것이었다.
물론 과장과 부장도 그에 대한 비용 처리인 것을 알고 영업사원들이 올리는 반품서를 결재해 주었고
물류도 그 부장 휘하에 있어 그의 지시대로 반품서를 처리해야 했다.
그동안 나는 영업은 흔히 말하듯 총성없는 전쟁이므로 가능한 그리고 최대한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경쟁사가 A상품을 만원에 팔고 있으면 그와 똑 같거나 비슷한 상품을 만원이상 받기 어렵다.
그런데 같은 상품인데도 중소기업 상품이 싸고 대기업은 비싸서 대리점들 고충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리점들은 가격 문제 타개 방안으로 일시 대량구매 조건으로 큰 폭의 인센티브(할인)를 원했다.
그리고 영업부는 판매 거점 확보가 끝난 후에도 목표달성을 위해 계속 할인해 주고 있었다.
그 결과 매월 대량의 상품들이 정상가보다 크게 낮은 할인된 금액으로 입금되고
그러한 변칙판매로 대리점 장부금액을 낮춰 주고 그 차액을 영업활동비와 개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 짓이 웃기는 것은 여러 대리점들의 대량구매로 매출목표를 달성하여 포상을 받고
그 후에 다시 반품 형태로 대리점 장부금액을 대폭 깎아 주고 그 차액을 유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리점의 그런 변칙 할인이 매월 한번이라고 해도 전국에 대리점이 많아 합하면 큰 금액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짓을 하려면 분기마다 있는 영업부 자체감사에서 지적받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그 감사를 통과하기 위하여 매월 마감 작업시마다 반품으로 장부를 수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업무 착오도 있고 그 경우는 금액이 적어 나는 담당들이 원하는대로 매월 처리해 주었다.
그런데 평소 그처럼 처리해 주었음에도 이번에 또 부장이 그 많은 금액을 정리해 주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매월 담당들 반품서를 처리해 준 것은 뭔가?
나는 그 원인과 이유를 명확하게 알기 위하여 모 대리점 사장에게 전화하여 조용히 만나자고 했다.
대리점 사장들은 자신들에게 판매물량을 공급해 주는 센터장 부탁에 매우 적극적이다.
그 대리점 사장을 만나려는 것은 부장에게 받은 그 반품서에 그 대리점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대리점들은 반품서가 다 있던데 왜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뻔한 일을 묻는 것이 이상하다는 듯
평소 부서장과 영업담당에게 향응접대를 잘 했으면 자신도 많은 금액의 반품서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다음 날 그 대리점 담당 영업사원을 불렀다.
그는 대뜸 그 대리점 사장이 지지리도 장사 못한다며 열을 내며 비난했다.
한마디로 너무 멍청하고 요령도 없으며 태생이 장사 기질도 아니어서 부장에게 왕창 찍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작부터 포기하여 그 대리점은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다.
난 비로서 그동안 많은 대리점들이 왜 회사를 떠났으며 다른 회사 간판으로 바꿔 달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날 밤 늦게까지 떠난 대리점 사장들을 한사람 한사람 떠 올리며 혼자 술을 과음하며 고민했다.
그리고 자정 무렵에 귀가하여 아내에게
난 너무 힘들어 회사생활을 계속하기 어렵고 그래서 그만두면 생활이 걱정될텐데 어떤가.....
항상 힘들어 하는 것을 잘 아는 아내는 언젠가 했던 말을 또 했다.
아무려면 지금처럼 고생하면서 열심히 일 한다면 무슨 일을 하든 지금보다 못하겠느냐고....
그리고 또 아이들이 아직 어린데 그렇게 밤 낮없이 일하다가 무슨 일 생기면 어쩌느냐고도 했다.
이틑 날 오전 출고작업을 끝내고 반품서를 부장 책상위에 갖다 놓았다.
아내가 걱정하듯 건강이 약하다 생각하진 않았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사직을 각오하고 처리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
마침 부장은 자리에 없었는데 누가 연락했는지 오후 한참 바쁠 때 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용히 만나서 이야기 하자며 모 식당으로 빨리 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사양하면서 반품서는 처리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능력이 부족하여 센터 일이 너무 힘들다 하면서 다른 부서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덜컥 화를 내며 당신 같은 맹꽁이를 어느 부서에서 받겠냐며 일이 힘들면 사표를 내라는 것이었다.
그런가....전에는 꽉 막혔다더니 이제는 맹꽁이인가.....
그럼...꽉 막히고 미물에 불과한 맹꽁이 같은 인간이 어찌 감히 훌륭한 그 부장과 일할 수 있는가?
그 즉시 사직서를 작성하여 관리과장에게 제출했더니 그는 깜짝 놀라 사직서를 갖고 부장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한참 후에 돌아 온 그의 표정은 침울했고 어두웠다.
다음 날 나는 센터로 출근하지 않고 본사로 갔다.
원래는 후임자가 선임되고 인계인수할 때까지 근무해야 하지만 맹꽁이 주제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옛날 이 센터로 나를 보내 준 중역에게 하직인사를 하려는 것이지 다른 의도로 간 것이 아니었다.
오랜기간 서로 바빠 만나지 못한 옛날 나의 바둑상대였던 중역 그 사람이다.
"아니? 이형 아니오? 많이 바쁘시다 듣고 있는데 어쩐 일이요?"
"사정상 회사를 떠나게 되어 인사드리려고...그래서 왔습니다."
"아! 뭐.. 좋은 다른 일을 하시려고 그럽니까?"
"아닙니다. 그건...쉬면서 천천히 생각해 봐야지요."
"음...? 그럼 갑자기 사표를....? 그러니까....뭔 일이 있었군요? 지금 거기에....000부장이지요?"
"그렇습니다."
"사표 언제 내셨지요? 그거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아마...아직은 000부장한테 있을 겁니다...."
"그럼 됐어요. 000부장 그 사람 참....알았어요. 이형은 딴 생각 마시고 가서 근무하시는 겁니다?"
"말씀은 고맙지만.....전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바쁘신데....신경쓰지 마십시오."
"아네요, 거긴 이형이 꼭 필요한 곳입니다. 0부장 그 사람 사람 볼 줄 모르는 이상한 사람 아닌가?"
"............."
"암튼 더 말할 거 없어요. 무조건 가서 근무하세요. 그 다음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테니까. 아셨지요?"
그는 에레배터까지 나와 버튼을 눌러 주며 센터로 바로 가라고 했지만 나는 집으로 갔다.
그리고 다음 날은 집에 있었는데 오전에 과장에게서 빨리 들어 오라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급할 것 없다 생각하여 오후에 갔더니 부장이 내 사무실에 있었고 오래동안 기다렸다면서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이형, 내가 잘못했습니다. 사과 드립니다. 노여움 푸세요. 사표는 찢었습니다."
"..........?"
"그날 월말이라 스트래스를 엄청 받아 한잔 한 김에 실언한 겁니다. 이해하십시오."
"스트래스는 저도 많습니다. 그럼 그 반품서는 어찌 할 겁니까? 전 앞으로도 그런 반품서는...."
"이번 딱 한 번 마지막으로 부탁드립시다. 지금 영업이 엄청 어려워요...정 뭣하시면 절반이라도....."
"반품 없는 반품서는 저도 무척 힘듭니다. 작은량이라면 몰라도요...."
"그러시면 절반만 부탁드리지요....앞으론 일체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약속합니다"
"알았습니다. 그렇게 약속하시는데......"
그리고 2개월쯤 지나 조직 개편이 있었고 부장과 헤어졌는데
그는 약속대로 그 이후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관리과장은 갑자기 돌변한 부장이 이상했던지 본사에 갔다고 들었다며 누굴 만났는가 궁금해 했다.
본사에서 나를 본 누군가에게 들은 모양이지만 옛날 바둑 친구를 만났다고 했더니 농담으로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