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8주간 월요일.
다산 정약용이 자신의 두 아들에게 시(詩)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시는 밥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왜 시를 쓰는가? 시를 쓰면서 자기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세계와 통하면서 삶에 대한 깊이를 깊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 시를 통해 내 뜻이 굳세어지고 막혔던 마음이 툭 터지며 시원스런 기상이 깃들게 된다. 그런데 세상 시인들이 시 짓는 것을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아무 것도 아닌 일상의 시시콜콜한 잡사를 과장하고 남의 눈을 놀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는 표현에만 힘쓴다. 기교만 부릴 줄 알지, 그 안에 담아내야 할 깊고 높은 정신에 대해서는 거들떠 보지 않는다.” 하고 나와 있습니다. 전 이 글을 읽으며 자연스레 성무일도에 나오는 찬미가와 시편이 떠올랐습니다. 시편 작가들이 언어의 기교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은 경외한 것은 평소의 삶에서 보이는 보화를 찾을 줄 아는 감각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러기에 자연스런 찬미의 노래가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며 사람들이 여전히 뭔가 특별한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바오로는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이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라면서 담담하게 써 놓고 있으며, 복음에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다른 것에 눈 돌리지 말고 ‘지금 눈을 크게 뜨고 잘 봐라.’ 하시는데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미사를 드리며 무엇이 보이십니까?
떼이야르 드 샤르뎅이 쓴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 라는 책에 보면 미사에 봉헌되는 빵과 포도주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저희의 이 노동인 이 빵이 그 자체로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부스러기일 뿐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의 고통인 이 술 역시, 다음 순간에 사라질 하찮은 것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볼품 없는 물질 덩어리 그 깊이에, 당신께서는 거룩함을 향한 어떤 억누를 수 없는 갈망을 숨겨 두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느낌으로 감지합니다.” 볼 품 없어 빵과 포도주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고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게 해주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감지해 낼 때, 그 빵과 포도주는 더 이상 가게에서 파는 그런 종류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때부터 이 미사에 쓰이는 모든 도구가 거룩하게 보입니다. 오늘 하루를 거룩하게 지내시고 싶으시다면 내가 지닌 것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 지 봐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성화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