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5주간 토요일

2013. 9. 27. 오후 10:21:37

글자

연중 25주간 토요일.즈카리야 2,5-15;루카 9,43-45 

  간혹 교리교육에 관한 문제로 불만을 제기하시는 교우분을 만나곤 합니다. 말씀인즉슨 예전에는 교리교육을 잘 해서 열심한 신자가 많았는데, 요즘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요.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입장에서 참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그동안의 제 노력이 헛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방금 세례 받은 이들을 탓할 수만도 없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어디서부터 문제가 시작됐을까? 에 대한 고민을 하던 중, 예전에 예비자 교육을 받은 신자분과 요즘 예비자 교육과의 차이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은 교리문답방식으로 교리를 배웠습니다. 묻고 답하는 방식은 분명 명확한 느낌을 갖게 해주고, 신앙의 진리를 바로 알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방식은 외국교회에서 들어온 방식이기에 당연히 외국에서도 잘 통했던 방식입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외국에서는 새로운 사유방식이 들어옵니다. 60년대부터 신자 사이에서 이런 물음이 제기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물어보는 세대가 등장한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란, 더 이상 단순히 교리에서 말하는 신앙의 진리를 반복하는 데에서는 한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자인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은, 기계적인 암기방식에서 활기를 잃은 듯한 신앙을 보았기에, 모든 신자가 견고한 종교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의미를 알게 해 주는 종교교육이 필요하다고 여기면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큰 역할을 하는데요.

 오늘 복음을 읽으며 그런 느낌이 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이제 십자가를 통해 부활이 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십자가에 대한 교리를 받았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 안에서 이런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 십자가 안 만났으면 좋겠어요 십자가에 대한 의미를 모른 채, 교리상에서 말하는 십자가에만 멈춰져 있다면, 이는 그저 피하고 싶은 도구일 뿐입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예전에는 이해시키기 위한 빠른 방법으로 교리문답을 택했지만, 이제는 의미를 잘 되새겨, 그 의미 속에서 실천으로 넘어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의미를 새기려면 예전분들보다는 속도가 늦지요. 자기가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예전부터 무조건 교회에서 시킨대로 했던 분들도, 배운 것을 다시 되새길 때, 이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 새롭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이 예전에 쓴 글을 마지막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나는 평신도들을 원한다. 자신의 종교를 알고 그 종교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를 올바로 아는 사람들을, 자신이 고수하는 것이 무엇이며, 고수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을, 자신이 말하는 사도신경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을, 그 신경을 옹호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를 많이 아는 사람들을 원한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