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2013. 10. 4. 오후 5: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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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바룩 1,15-22;루카 10,13-16

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은 많은 부분에서 자기의 뜻을 펼치지 못합니다. 한편으로 억눌려 있다고 봐야 하겠지요. 자기가 눌려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기회만 생기면 이를 펼치려고 듭니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마음껏 해 보지 못한 것을 기회가 생기면 어떻게든 펼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좋은 모습일까요? 가볍게만 바라본다면 하고 싶다는 데,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갑자기 둑이 터진 것처럼, 눌려있거나 막혀 있던 것이 터지면 자기 스스로가 주체하지 못하는, 절제하거나 이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오늘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그의 집안이 포목상을 할 정도로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꿈이 있었습니다. 당시 중세기 남자들이 쉽게 동경하는 기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꿈은 두 번의 좌절을 겪습니다. 첫째로는 1202년 그가 살던 아시시와 페루자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지면서 붙잡혀 포로생활을 경험하고요. 여기에 보석금을 넣어주신 아버지의 도움으로 풀려나지만 그래도 계속 기사의 꿈을 꿉니다. 그러다가 두 번째로 큰 중병을 앓으면서 심경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잘 아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되는데요.

복음에 나오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 사는 사람들이나 바룩 예언자가 이야기 한 주님을 거스르는 행동을 한 이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이 왜 다른 신을 섬기고 저마다의 생각에 사로잡혀 살고 있었을까요? 지금 살고 있는 자기 삶이 답답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도, 주님 뜻을 따르는 것도, 세상 사는 일도, 자기 뜻과는 당장 부합되지 않으니, 뭔가 탈출구를 이상한데서 찾았던 것입니다. 또는 이상하지 않으면, 주님 뜻이라 말하면서 그 위에 살짝 자기 뜻을 얹어놓지요. 그런데 우리가 묵상기도를 제대로 배울 때도 비슷합니다. 가르쳐 준 방식대로 하지 않으면 발전을 이룰 수 없습니다. 단계와 절차가 있습니다. 즉 규칙이 있습니다. 규칙이 있다는 것은, 규칙이 되기 위해 나름의 오류를 거쳐 온 시간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만약 자기 식대로만 한다면 이는 떼 쓰는 어린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떼쟁이는 지금만 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린 영생을 살아야 합니다. 영생을 살기 위해서는 절제와 정돈과 자기를 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중병을 앓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그 시간은, 꿈은 막혔지만 볼 것을 보게 해 주는 시간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펼치지 못한 시간으로 인해, 어떻게 좋게 변화되는 지를 봐야 하겠습니다. 새옹지마의 삶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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