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4주일.

2013. 9. 14. 오후 3:47:18

글자

연중 24주일. 탈출 32,7-14; 1티모 1,12-17; 루카 15,1-32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듣는 말이 분별력입니다. ‘분별력이 없다는 말은 너는 신부님이 될 수 없어요.’ 라는 말과 같기에 평소 기도생활을 통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본당 살림을 잘 꾸려나가려면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우리 본당에는 6000여 명이 넘는 교우수와 100여개 가까운 각종 단체가 있습니다. 분별력을 키우기 위해, 철학, 논리학,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신학, 상황윤리 등의 과목을 배웁니다. 때에 맞는 대처를 잘 하기 위해서이지요. 그런 훈련을 쌓아왔기에, 개인적으로 새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잘못해도, 무엇을 없애거나, 정리하거나, 치우거나, 절제하는 힘은, 남들보다는 잘 한다고 여겼던 터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활을 계속 하다 보니, 부족한 점도 발견되었습니다. 자신을 제어할 줄 아는 힘이 커질수록, 맡은 사안을 책임감 있게 끌고 갈수록, 낮은 목소리에 대해서는 귀 기울이기 힘들다는 사실을요. 아무래도 굵직굵직한, 스케일이 큰 것을 맡다보니, 작은 배려와 사랑에는 잘 신경 쓰지 못했던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것도, 허락될 수 있는 틀이 잘 갖추어져야 잘 할 수 있지요. 사정도 안 되는데 오지랖만 넓어도 문제니까요. 이런 제게, 사랑의 한계를 맛보게 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몇 년 전 수도원을 나오게 된 친구를 만났습니다. 안 좋은 이유로 나오게 되었기에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고, 동정심도 들고,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고, 게다가 비슷한 길을 가던 동료인지라 그냥 스쳐 지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이 친구는 저를 만나서 온갖 불만을 털어놓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지요. 마음도 불편하고, 앞으로 뭐 하면서 살까? 하는 고민도 있겠구요. 몇 번을 만나던 중, 그 친구의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약간 어린 구석이 있던 터라 그런 가보다 하고 여겼는데, 계속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대체 이 친구는 10년간 어떻게 살았기에, 그동안 어떻게 기도생활을 했기에, 남만 탓하고 있는가?’ 하는 실망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이를 참지 못하고 연락을 끊어버렸습니다. 자기의 생각만을 맞다고 박수쳐 달라는 그의 행동에, 저는 양심적으로 손을 들어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런 행동에 화가 난 그 친구도 자연스레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순간 뒷통수를 가격하는 탄식이 튀어 나왔습니다. ~ 그 친구는 지금 영적으로 힘든 상태였는데, 나는 그를 보통 사람처럼 대하려 했구나....’ 후회를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습니다. 수 없이 전화를 해도, 그는 바로 끊어버렸고, 문자나 그 어떤 연락도 닿지 않았습니다. 아는 지인을 통해 들어보니, 이미 저는 그에게 욕을 먹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면서 제가 옳다고 생각한 사랑방법을 주입하다가 오히려 깨진 꼴이 된 것입니다. 마치 유리잔을 손에 넣고서 내맘대로 이리저리 돌리다가 저의 판단력의 힘으로 너무 세게 움켜쥐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손도 다치고 잔도 박살이 났지요. 신부생활을 계속 해 나가면서, 비슷한 이유로 안타깝게 된 형제들의 소식을 계속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멈출 수 없었습니다. 계속 시도를 하였습니다. 자존심은 중요치 않았습니다. 사람 하나를 살릴 수만 있다면...’ 하면서 계속 걸었습니다. 신호음이 이어지면서 이번에도 안 받으면 어쩔 수 없다. 나중에 다시 하면 되지..’ 하면서 걸었습니다. 그러다 그 친구가 받았습니다. 1년 반 만에 문이 열린 것입니다. ‘‘환희라는 단어는 이런 때에 쓰이는구나라는 걸 깨닫고 있었습니다. 담담하게 얘기하면서 사과를 하였고, 그 친구도 많이 정리되었는지, 예전과는 다르게 편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나는 전에 그 분을 모르고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라면서 주님의 넓으신 마음을 말씀하고 있고, 구약의 하느님은 모세의 애원을 들으시어, 재앙을 거두십니다. 그리고 복음에는 양 한 마리를 잃게 되자, 동전 한 닢을 잃게 되자, 아흔 아홉 마리를 광야에 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등불을 켜고 한 닢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는 주님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의 넓은 사랑과 자비를 지켜보면서, 이젠 나의 한계를 너머서는 사랑을 해야 할 때가 왔음을 느낍니다. 내가 자존심을 구기며 이렇게까지 해야 해?” 라고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존심 한 번 구겨서, 사람 하나 얻는 것이 더 소득이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랑을 시도하면서 사람을 다시 얻는 환희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맛보셨으면 합니다. 생각보다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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