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2주일. 집회 3,17-29;히브 12,18-24;루카 14,1-14
21세기 민주주의를 사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걸맞지 않아 보이는 영화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설국열차, 더 테러, 그리스 신화의 낙원을 의미한다는 엘리시움, 숨바꼭질.. 이런 영화들의 공통점은 ‘계급주의’입니다. 사회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실상 극한의 꼬리칸에 타고 있으면서 세상을 버텨야 하는 이 세상은, 뉴스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오히려 영화가 지금의 삶을 더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여성 대통령, 흑인 대통령이 나오는 시대라지만, 실상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습니다. 식민지 정책이 인류 역사를 부강하게 해주고 착취가 정당하다고 이야기 해 왔으니까요. 예수님도 2천년 전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교회는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르러서야, 그나마 교회다운 교회로 거듭난 것만 보더라도 아직 갈 길이 먼 가 봅니다.
여기서 우린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 주고 있는가를 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 오히려 가난한 이들, 다리 저는 이들, 눈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예수님은 늘 가난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살아오셨습니다. 설교를 하실 때도 높고 번듯한 곳에서 하시지 않았습니다. 병을 고쳐주시거나 사람들을 먹일 때에도, 그들과 함께 하시는 현장 속에서 기적이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대할 때, 교회가 하는 많은 일 중에서 어느 하나인 ‘부분’으로 여기는 듯 보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일을 어느 부분적인 하나로만 인식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오늘 주보에 나온 것처럼 빈첸시오가 홍보하는 현상이 빚어집니다. 주보에 나온 대로 신앙인이라면 누구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사랑과 봉사를 실천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교우들이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빈첸시오라는 단체가 생겨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일이 더 나아가면 어떻게 될까요? 점점 교회와 사람들은 멀어져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가난’ 이라는 말만 놓고 보면 말할 수 없이 아픈 참담함과 고통, 분노, 약함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이런 것들도 보입니다. 힘 있는 자가 짓밟는 속에서 들려오는 약한 심장의 팔딱거림입니다. 계속 밟아도 뿌리 뻗어가는 잡초 같은 강한 생명력이 느껴집니다. 그 약한 생명력이 보이십니까? 여기서 그 생명력을 봐줄 때 가난한 사람들이 보이고 그들의 어려움을 내 것처럼 끌어 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리’ 란 단순히 의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 깊게 본다면, 자리란 혈연, 지연, 학연 등과 관련된 연줄입니다. 우리가 자주 이야기 하는 ‘내가 아는 지인’, ‘누구누구의 라인’.. 이런 것은 다시 말해 폐쇄성을 뜻합니다. 누구와 친분이 있다는 말은, 뒤집어 보면 누구를 배제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렇듯 누군가를 배제할 때, 거기서 무슨 사랑이 나오겠습니까? 여기서 우린 이 말씀을 다시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아는 사람에게만 잘 해주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준 만큼 받고 싶은 것 이상의 것이 있을까요?
사랑하는 수유동 본당 교우 여러분
오늘 화답송 후렴은 이랬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가련한 이를 위하여 은혜로운 집을 마련하셨나이다.” 그럼 우린 가련한 이들을 위해 무엇을 마련하였습니까? 갚지도 못할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베풀었습니까? 자신을 낮추면서 무엇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비슷한 사람끼리 사랑을 베풀며 보답을 바라기보다, 하늘의 보화를 쌓을 수 있는 어려운 이들을 대하는 손길을 내밀 때, 나는 예전보다 하느님과 더 닮아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