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9주일 어린이 미사
신부 : 봉달이 ~ 오랜만이에요. 요새 어떻게 지내요?
봉달 : 신부님 ~ 요새 너무 푹푹 쪄서 멍하게 지내요. 아무 생각도 안 나고요.
먹어도 맛있는 것도 잘 모르겠고, 왜 사는 지도 모르겠어요.
신부 : 이거 참 큰일이네요. 뭐 시원할 만한 거, 좋은 것 없을까?
봉달 : 아~~~ 왜 갑자기 남을 막 욕하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요?
음~그러면 안되는데... 그거 하면 재미있을 것 같고... 그러면 신날 것도 같고..
그런데 그거 하면 안되는데.. 음....
신부 : 지금 봉달이는 뭔가 화끈한 것을 바라는 모양인데요.
이거 하나 물어볼께요? 봉달이는 남 골탕 먹일 때가 재미있어요?
봉달 : 예~ 그러면 걔가 막 쫓아오고요, 나는 계속 놀리고.. 그러면서 네를 놀아요.
신부 : 그러면 그 아이의 마음은 잘 못 보겠네?
봉달 : 뭘 못 봐요?
신부 : 봉달이의 놀림을 받고 있는 그 아이의 마음.
봉달 : 에이~~ 그런 것도 신경써야 하나요? 나만 재미있으면 그만이죠.. 헤헤..
신부 : 오늘 복음에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메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 이 올 것이다.” 이게 무슨 말씀이냐 하면요. 봉달이가 누구를 놀리고 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떨까?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봉달 : 없을껄요?
신부 :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을 잘 모르겠으니 착한 마음을 가져야겠다는 생각도
안 들었겠네요?
봉달 : 그 때는...(목소리가 죽으면서)...그렇지요. 남 놀리는 데 열이 올라 있으니까요.
신부 : 오늘 복음 말씀이 그런 거에요. 평상시 나에게 오실 예수님을 잘 준비하는
사람은 남을 아프게 하지 않지요. 예수님의 생각과 반대이니까요. 그러면
예수님의 생각과 같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평상시에 ‘준비’를 잘해야
겠지요.
봉달 : 무슨 준비요?
신부 : 지금 드는 생각이 좋은 생각인가? 나쁜 생각인가? 알기 위한 준비지요.
이럴 때 우리는 ‘잘 기다리는 사람’ 이 되어야 해요.
봉달 : 잘 기다리는 사람이요? 그게 뭐에요?
신부 : 자 보세요.. 생각은 지금도 엄청나게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가요.
지금 몸은 미사에 와 있지만, 실제로 머릿속에는 집에 가서 뭐해야지. 뭐 먹어 야지, 오락은 몇 판 해야지? 내일은 뭐하고 놀지? 하는 생각이 지나가잖아요?
봉달 : 어떻게 알았어요? 신부님?
신부 : 그런 생각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요. 하지만 문제는 그 많은 생각중에서
좋은 것을 잘 고르기 위해서는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는 거에요.
방안에 가만히 있으면 먼지가 떠다니는 게 보이지요?
봉달 : 예 맞아요.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신기해요...
신부 : 이처럼 처음에는 좋아 보였던 것도 실제로는 아닐 때도 많으니까. 잘 기다리 면서 이게 좋은 것인가? 아닌가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해요.
봉달 : 아~ 그러니까 준비하는 자세는 잘 기다리는 것이고, 그렇게 기다리면서 예수 님이 바라시는 마음이 어떤 것인가? 아는 것이군요. 다음에 뵈요. 안녕
연중 19주일 미사
요즘 같이 불확실한 세상이 없습니다. 무엇 하나 편안하게 믿을 수 없는 것은 자연현상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계속 폭염의 신기록을 갈아치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린 확실한 것을 찾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과학입니다. 예전 1982년 미국의 아칸소주에서 진화학을 학교에서 강의해서는 안된다면서 근본주의 개신교도들이 소송을 걸었습니다. 이에 아칸소주 법원의 윌리엄 오번턴 판사는 이 문제에 관해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 각계의 전문가에게 자연과학의 본질에 대해 폭넓은 자문을 구했습니다. 자연과학이라면 자연현상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문이지요. , 물리학, 화학, 생물학, 천문학 등이 해당됩니다. 이에 신중한 과정을 거쳐 판결문을 작성했는데요. 그는 자연과학의 특성을 5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자연과학은 자연법칙을 따라야 한다. 즉 인간이 만든 법규나 종교적인 강령이 아닌, 자연에 존재하는 자연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둘째. 모든 것을 자연법칙에 따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실제 세계에서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하느님이 창조했다는 주장은 검증이 불가능합니다. 하느님을 모셔와 다시 실험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자연과학의 연구결과는 언제나 잠정적일 수 밖에 없다.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고 더 탁월한 실험방법이 나오면 언제나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기존의 학설이나 믿음을 반증을 통하여 뒤집을 수 있어야 자연과학인 것입니다. 이를 정리하자면 자연법칙에 따라 실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어야 하고요. 실험 결과에 따라 반박할 수 있어야 자연과학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잘 아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 뒤집어지게 된 계기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었습니다. 이렇듯 과학은 계속 새로운 증거를 찾아내고 있고,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며 과학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불경스런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들은 과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마치 과학은 영원불멸한 것처럼 잘못 알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의견이 뒤집어진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라 합니다. 그들에게 이런 논쟁은 자연스런 현상이고 새로운 발견을 하였다고 기뻐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이제 우리의 생활로 돌아오겠습니다. 영원불멸한 것 같은 과학마저도 언제나 뒤집어질 수 있다는 말씀을 들으시면서 우린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저는 다른 이들의 말보다 성경 속의 인물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2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도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들을 바치라 했을 때,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그 때만큼 하느님이 원망스러울 때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아는 참 주님이란, 죽은 사람마저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기에 그는 아들을 바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으실 것이다.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것이 궁금하기 시작했습니다. ‘참된 믿음’ 이란 무얼까? 진짜로 잘 믿는 것이란 무엇일까? 에 대해 너무나 알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흔들리는 세상에서는 그것을 찾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을 아예 등지고 살 수는 또 없습니다. 여기서 복음에 이런 문구가 다른 글자보다 떠올라 보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그럼 깨어있는 종이란 무엇일까요? 여러분 기도를 하면 뭐가 좋습니까? 내 기도를 그 분이 들어주시니까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상대방의 마음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잘 하는 사람은 내 기분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내 욕심에 감기지 않습니다. 휘둘리지 않기에 지금 상황에서 남이 나에게 원하는 것, 그리고 해야 할 바가 보입니다. 하지만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상대의 마음이 보이지 않기에 미래도 어두워 보이지요. 복음 곳곳에 보면 주님이 따로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일까요? 더 잘 보려고 하신 것이지요. 평소에 ‘깨어있고 준비하는 종’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상시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지요. 그럴 때 흐름이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내가 어디가 막혀있는 지, 내가 속한 곳에 무엇이 문제인지, 그래서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설정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깨어있지 못하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교회에서 무슨 제의가 오면, 그만 나는 겁을 집어먹지요. 피하기 급급합니다. 교회는 나에게 이런 시련만 주는 곳이라는 오해를 하게 됩니다. 실상 비쳐진 교회의 제의는 진짜로는 주님의 부르심이 그 뒷배경이었데도 말이지요. 그러나 평상시 잘 훈련이 되어 있다면, 갑작스러운 것 제의마저도, 실은 어떠한 전조(前兆)가 이미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수유동 본당 교유 여러분~ 실상 깨어 있을 때, 나머지는 환히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