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8주간 수요일.민수기 13,1-35;마태 15,21-28
아무래도 제 삶이 뭔가를 교우들에게 알려주는 삶이다 보니까 이런 경우를 참 많이 보는데요. 신부로 살면서 제일 안타까운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기도를 이런 방식으로 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주님을 잘 맛볼 수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면 이것을 듣고 난 분께서 언뜻 보이게 힘들다고, 예전에 해 본 방식이 아니라고, 꾸준히 하기 어렵다고, 관두는 분들을 볼 때입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어쩌면 너무 머리가 좋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당장에 해 보기에 어려움이 있어 보이니까 해 보지도 않는 경우입니다.
오늘 말씀이 그런 경우입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된 땅, 가나안에 당도합니다. 하지만 이미 그 땅에는 누가 살고 있었지요. 40일 만에 정찰하고 난 다음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곳 과일입니다. 그러나 그 땅에 사는 백성은 힘세고 성읍들은 거창한 성채로 되어 있습니다.” 굿뉴스와 배드뉴스가 한꺼번에 나옵니다. 그러자 갑자기 불안감에 사로잡힌 백성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 백성들에게로 쳐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온 공동체가 소리높여 아우성을 칩니다.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합니다.” 하지만 해보지도 않았잖습니까? 복음에 나온 여자는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여인이 아니라는 이유로요. 하지만 그 여자는 개 취급을 당하면서도 주님이 해 주실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습니다. 실상 구약에 나온 백성들은 약속을 들은 상태입니다. 마치 예언자 시므온이 주님을 만나리라는 약속을 얻었기에, 성전에서 기다리며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 기뻐했지요.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을 정벌하러 가면, 나머지는 그분이 길을 열어주실 터인데 그만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는 예고를 받습니다.
믿음의 길을 걷기 위해 다들 세례를 받았지만, 누구는 성인이 되고 누구는 세상에 살았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되는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하느님을 믿는다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더 믿는 통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이런 얘기를 했지요. “늦게서야 임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는 명석한 머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머리 탓에 너무나 멀리 방황해야 했습니다. 우린 어떻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