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5주간 토요일. 탈출 12,37-42;마태 12,14-21
가끔 기도하는 사람 중에 이런 행위를 시도하는 경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기도방법을 풍성하게 한답시고, 불교에서 하는 선(禪) 수행방식을 도입하여 경치 좋은 강이나 숲, 심지어 불당에 앉아서 우리의 기도와 접목을 시도하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 그들이나 기도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인격적인 하느님인 반면, 그들이 만나고자 하는 우주의 근본원리의 깨달음은, 비인격적인 진리입니다. 그럼 인격적인 신과 비인격적인 진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해탈에 이르렀다는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지은 오도송(悟道頌)을 보면, 보편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있을지언정, 누군가를 그리워했던 사무침도, 그런 그를 만나 존재와 사랑을 나눈 일치의 흔적인, 기쁨과 희열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과 내가 만나는 우정과 사랑의 대화입니다. 그래서 그럴싸하게 여러 방법을 접목하여도, 기도의 핵심인 그 분이 없다면 잘못된 기도가 되며, 기도를 시작할 때 보통 하는 호흡조절 등도, 내가 그분을 잘 만나기 위해 나를 모으는 준비운동일 뿐이지, 아무리 준비운동을 잘 한다고 한들 본래 만나려는 ‘당신’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기도라 할 수 있을까요?
앞서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오늘의 말씀이, 믿음의 우리 조상들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었는 지, 짚고 넘어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셨다.” 우리가 즐겨 쓰는 ‘밤을 새운다’ 라는 사람이 쓰는 표현을 쓰신다거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에서 나의 영을 준다는 말씀처럼, 선물을 주는 표현 속에서 당신이 여타의 다른 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전보다 검증된 다양한 기도프로그램들이 소개되고 보급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소개되는 기도가 마치 테크닉이나 유행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인 당신이 자신을 낮추시는 표현을 써 가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사실 속에서, ‘평소 나는 그분을 어떤 자세로 보고 살았는가’ 살펴봐야겠습니다. 단순히 ‘기도는 대화다’ 라고 말하기 앞서, 대화가 되기 위해 그 분을 얼마나 가까운 분으로 여겼었나 봐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