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0주일미사.
사람의 인생을, 보통 ‘순례자’ ‘여행자’ 라는 비유를 듭니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사람의 인생이란 것이, 가만히 고여있는 삶이 아니라는 얘기겠지요. 그럼 여행을 하고 순례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많은 분들이 바란다는 ‘행복’을 찾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가만히 있는데서는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윌리엄 쉐드가 말합니다. ‘항구에 머무는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의 욕구 가운데 하나가 안전에 대한 욕구일 것입니다. 편안하고, 평안스럽고, 별 문제없고.. 그러면 모든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이걸로 돈 버는 사람도 나타났습니다. 각종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보험회사이지요. 물론 안전은 평안함을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독일어의 ‘todsicher(토티셔)’ 라는 단어를 보면, 그 뜻이 ‘죽도록 확실하다’ 라는 뜻입니다. 좀 더 이야기 해보면, ‘지나친 안전은 죽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생명을 질식 시킨다’ 는 의미입니다.
자~ 보십시오. 너무나 완벽한 시스템을 만나거나, 모든 것에 결점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보면서 우린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속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재수없다’. 왜 그럴까요? 모든 것이 너무 완벽하면, 그 무엇도 새로운 것이 흐르거나 성장하거나 발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위험이 차단되면, 당장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실은 새로울 것도 없지요. 진짜 안전을 원하신다면 그냥 집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괜히 밖에 나갔다가 사고라도 터지면 어쩌려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집이 안전한 것도 아닙니다. 집에 있는 화장실 타일 바닥에 미끄러질 수도 있고요. 갑자기 심장발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즉 완벽하게 안전한 곳이란, 결국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예를 보여줍니다. 마치 막장 드라마처럼 집안이 아수라장이 될 것이라는 예고를 하십니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과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과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는 광경이 바로 예수님으로 인해 비롯된다면, 여러분이 가진 이 신앙을 포기하시겠습니까? 만약 그러한 분이 계시다면, 그 분은 ‘만나고 싶은 평화’ 만을 바라는 분일 것입니다. 만나고 싶은 평화란 이미 한계를 지어놓고 그 안에서만 맴도는 평화이겠지요. 하지만 어쩌지요? 부드러운 젖을 먹던 아이는 결국 자기 치아를 이용해 밥을 씹어 먹어야만 하고, 바닥을 기던 아이는 몇 번을 넘어지더라도 끝내 일어서서 걷고 뛰어야만 합니다. 씹기 싫다고, 일어서기 어렵다고 포기해 버린다면, 그 아이의 미래는 참으로 암담하겠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앙의 여정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 여정 상태란 신앙의 다음 코스의 이동입니다. 마치 여름 캠프의 포스트 게임처럼 계속 새로운 코스를 통과하며 그 곳에서 받은 퍼즐조각을 얻어내는, 이동의 연속입니다. 나중에 그 퍼즐조각을 맞춰보시면 그 그림이 어떤 모습일지는, 여러분도 예상하시는 ‘하늘나라’ 이겠지요.
2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삶을 실천하며 나아갈 때, 나는 코스를 이동하면서 만나게 될 많은 체험을 통하여 성장해 나갑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은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길을 계속 걸어갈 때, 나는 달라집니다. 물론 그 코스는 메마른 사막도 있고, 건너기 힘든 바다도 있고, 약속해야 할 선서문도 있습니다. 만약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하고, 만나고 싶지 않다고 떼를 쓴다면, 그야말로 자신과 남들에 의해 비롯된 ‘욕심’ 이라는 진흙탕 싸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싸움은, 드라마에서나 만날 법한 ‘막장 드라마’를 현실로 만나겠지요. 물론 누구도 그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묵묵히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러다가 위험이 닥치면 어떻하냐?’ 고 물어보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 있는데 갑자기 풍랑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불어오는 파도와 물살에 겁을 집어 먹습니다. 하지만 그 배에는 이미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지요. 당신을 불러 그 분을 깨워야지요. 그러면 그 분이 일어나 풍랑에게 명령하시고 나의 내면과 주변은 조용해질 것입니다. 위험을 나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데 문제가 생깁니다. 그분을 부르면서 당신과 함께 나아갈 때, 진정한 평화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