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21주일 미사. 이사야 66,18-21; 히브리서 12,5-7.11-13; 루카 13,22-30.
제가 신학생 때, 신학생이 좋아하는 성경 구절과 교수 신부님들이 좋아하는 성경 구절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고, 아무도 생각한 적이 없기에, 나름 흥미진진하게 여기며 성경을 찾았습니다. 아무래도 신학생들은 어려운 시험에서 별 탈 없이 신부님이 빨리 되기를 바라기에, 마태오 복음 9장 38절에 있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라는 구절에서 무사히 신부님이 되길 바랄 것이고요. 교수 신부님들은 아무나 신부님이 되면 안되고, 정말 미래의 교회를 위한 좋은 신부님들이 나와야 하기에, 마태오 복음 22장 14절에 나오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라는 구절이 아닐까 싶어 혼자 웃음 짓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추수할 일꾼, 부르심을 받은 사람’ 이라는 문장 속에서 영성 생활이란, 마냥 단순한 낭만적인 그 무엇이 아님을 봅니다. 즉 자기검증과 훈련을 통한 세심한 내적 균형 속에서 인격의 재창조가 이뤄져야 하기 때문인데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2독서에서는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은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라고 나옵니다. 신학교나 수도원, 수녀원은 여러 훈련의 과정을 통해 교회에서 인정하는 서품과 종신서원을 부여합니다. 게다가 평신도가 모인 재속회조차도 그렇게 검증과정을 거립니다. 그러면 별 제약이 사는 교우들에겐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요? 사실 훈련이란 말에 적잖이 부담가질 수 있습니다. ‘그저 맘 편하게 교회 다니려 했는데 뭐가 이렇게 복잡한가?’ 라고요. 하지만 무엇이든 제대로 얻으려면 과정의 단계가 필요하고요. 지금보다 높은 것을 추구할 때, 가치 있는 것을 얻는데요. 세상의 것도 그러한데, 당연히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 가르치는 자리를 바란다면, 그보다 더한 것도 요구하는데요. 현실의 세계는 자신의 노력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신앙인에게는 먼저 나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내려는 유혹이 어떤 것인지 살피는 식별력과 은총이 필요합니다. 첫째로 개인적인 욕심을 깨끗이 없애고, 자기 생활을 개선해고자, 날카로운 양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당연히 개인적인 습관을 살펴야겠지요. 예를 들어, 괜히 시간을 죽이면서 tv, 술, 게임, 핸드폰에 매달려 있다거나, 당장 필요가 없는데도 좋아 보이면 갖고 싶고, 남의 의견보다 자신의 의견만 보는 자세부터 떨궈내야 하는데요. 여기서 이런 것들이 나쁘다는 것은 알지만, 이것과 싸워 이기려고 하지는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히려 ‘난 원래 이래..’ 하면서 적당하게서 타협하며 지내기 일쑤인데요. 하지만 내가 왜 이것에 잡혀 사는지, 같은 죄를 반복하는 원인은 무엇인지 알아야 다음 단계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런 병적인 욕망의 내부에는, 실상 우상숭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어떻게든 얻어내고자 하지요. 이런 병적인 욕망은, 올바른 가치관이 무언지 헷갈리게 만들며 인간의 본질을 파괴시킵니다. 그러기에 단지 끊으려고만 하지 말고 ‘내가 왜 이것을 반복하고 있는가?’ 를 끝까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봐야, 내가 같은 죄를 반복해 짓는다는, 중독 증세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것을 보았다면 두 번째 단계로, 이러한 것들에 사로잡힌 상황을 나 스스로 벗어날 수 없음을 시인하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바오로는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아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원해 줄 것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구해주실 수 있습니다.” 내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현실을 인정해야 하는데요. 여기서 누군가 “우린 중독자가 아니에요.”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런 부정이 오히려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는 뜻을 말해줍니다. 실상 우리는 내 문제를 남에게 꺼내기 힘들어 합니다. 술, 마약, 게임 중독자들은 병원에서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으며 치유를 받지만, 내 얘기를 꺼내기 싫어하는 우린 어디서 어떻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런 우리에게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매일 점심 먹기 전과 밤에 자리에 들기 전, 두 번씩, ‘내가 잘 살았었나?’ 양심성찰을 통해 살펴보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 자신의 고유한 삶 안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때, ‘모든 날은 가치가 있었다’ 라고 인정할 수 있고, 조금씩 이겨나간 나 자신에 대해 기쁨을 느낄 수 있는데요.
오늘 복음 마지막은 이렇게 이야기 됩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의 불행스런 현실에 좌절하기보다는 그것을 인정하고 주님을 부를 때, 그 구렁에서 건져내 주시는 주님의 은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잠시 묵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