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7주간 목요일. 사도 22,30-23,11;요한 17,20-26
‘사제로 산다는 게 뭘까? 를 잠시 본 적이 있습니다. 범위가 워낙 넓은지라 오늘 말씀인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라는 측면에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본당에도 교적 수 6천여 명 가량의 신자가 있고, 단체들도 많고 종류도 참으로 다양합니다. 당연히 원하시는 요구사항도 많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해드리고 싶지만, 아직은 하지 못하는, 형편이 안 돼서, 또 아직 마음들이 열리지 않아서, 때가 안 맞아서 할 수 없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런 사항에 대하여 섭섭하거나 불만들이 나오지요.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마치 이런 마음입니다. 자녀가 크면 써야 할 꺼리들도 늘어납니다. 당연히 용돈을 올려주고 싶습니다. 자식이 기뻐하는 모습을 왜 안 보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주머니 상황은 여의치 못합니다. 그러기에 해주고 싶어도 해 줄 수 없는, 그런 광경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우분들은 당장 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섭섭하시겠지요. 게다가 내일은 체육대회입니다. 한 본당이 행사를 해도 일이 큰 데, 지구 13개 본당이 모였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과열된 경기로 인한 해프닝도 발생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각 본당의 주임신부님들과 교구를 맡고 있는 주교님, 교회의 수장인 교황님, 게다가 이것을 다 지켜보고 계신 주님의 노고가 느껴집니다. 워낙 다양하게 나오는 목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는 문제가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다가오는 유혹들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시끄러운 일을 빨리 매듭짓고 싶은 유혹, 분란 없이 조용하게 모든 것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유혹’ 입니다. 오늘 바오로의 한 마디로 최고의회는 뒤집어집니다. “나는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두가이와 바리사이가 대립하고 일대 소란이 일어납니다. 상황은 “바오로가 찢겨 죽지 않을까 염려하여” 하는 표현까지 쓴 것을 보면, 대단히 심각하게 돌아간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란과 소란함이 있었기에, 로마로 가서 증언하는 토대가 마련됩니다. 마찬가지로 사제로서 양을 인도하는 목자의 삶을 살다보면, 조용하게 모든 일이 끝나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빚어지는 상처 속에서 참다운 것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상처란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얼마 전 공지영 씨가 그동안 자기 문학 인생을 결산하는 차원에서 나온,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 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상처는 지금 집착하고 있는 것이 무언지를 보여줍니다. 서로가 가진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거기서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그런 일치를 우리가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 의 의미를 헤아릴 때, 서로 다른 다양함에서 일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