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요한 15,1-8
예전에 강남에서 큰 악기상을 하고 있다는 형제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머리카락도 하야실 정도로 연세가 드신 분이었는데, 제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저도 이제 나이가 들고 해서 보니,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이런저런 규정을 꼭 지키고, 의무 조항에 맞게 살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고요. 이른바 삶이 기도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것이 그분의 요지였습니다. 그럴 듯 해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이 분이 열심하지 않는 분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악기상을 하신다길래 그와 연관된 질문을 던졌습니다. ‘음악 좋아하시죠?’ ‘예~ 그럼요.’ ‘음악이 참 자유롭지 않습니까?’ ‘예 자유롭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 자유롭게 보이는 한 곡의 음악도 자세히 살펴보면 장음계와 단음계라는 24개의 조편성 가운데 하나로 속해있고요. 거기 맞는 스케일과 코드의 진행이라는 틀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안다면, 결국 음악이라는 것도 완전히 자유롭기만 한 것은 아니지요.’
오늘 주님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구절 뒤를 보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되길 바란다면, 계명이라는 틀 속에 있는 사랑 속에서 참 자유의 사랑을 만끽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계명을 지킨다고 해서 내 삶이 옭아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그런 계명 아래의 사랑입니다. 마치 다 장조의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아타나시오 주교학자 기념일입니다. 당시 4세기 경의 교회는 ‘아리우스주의’ 라고 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성령도 부정하고 결국 예수님은 인간일 뿐, 성부만이 진정한 하느님이라는 이단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아타나시오는 그들의 위험한 사상에 대해 신앙과 성경을 필두로 하여 이성과 철학을 길잡이로 잡고 정통 가르침을 수호해 갔던 인물이었습니다.
요즘도 그럴 듯해 보이는 것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혼란하게 만듭니다. 많은 책과 정보가 나를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잘 세워진 나를 흔들어대기도 합니다. 당신이 주신 ‘계명’ 이라는 사랑의 틀을 주의 깊게 잘 살필 때 거기서 어떤 생명이 꽃 피는 지 봐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