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미사 강론
찬미 예수님.
살면서 자기가 세운 규칙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사태가 발생했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해 가십니까?
천주교 사제로 살면서 제가 나름대로 세운 규칙이 있습니다. 첫째, 예전에 사목했던 본당은 방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재 그 곳에 계신 신부님께 폐를 끼칠 수 있으니까요. 둘째. 예전 신자분이 저에게 찾아와도 잘 만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맡고 있는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몇 가지가 있습니다만, 인정에 매달리기보다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아직은 젊은 저에게 필요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혼인할 신랑 정보영 라파엘과 신부 이호정 양은 저의 이런 정신을 과감히 무너뜨리고 삼고초려의 자세로 3번이나 저를 찾아와 이 자리에 서게끔 만들었습니다. 별로 대단치도 않는 저를 말입니다. 제가 과연 무언데 3번이나 오신 분을 돌려보낼 수 있단 말입니까?
요 근래 누군가를 이렇게 애타게 찾아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천주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바로 사랑의 종교입니다. 누군가를 끝없이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랑이 자신에게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저의 한계를 본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 알았던 그 친구와 연락이 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자기가 필요할 때만 연락했고, 필요할 때만 찾아왔습니다. 마치 그 형상은 저는 나무이고 자기는 참새처럼 그렇게 필요할 때만 다가왔습니다. 무릇 사랑이란,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과정이 되어야 할텐데, 그 친구는 예전의 맺은 정(情)을 가지고 필요에 의해, 쓸모에 의해 저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제가 박시연 말이라면 꺼뻑 죽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 송중기도 아닌데, 어떻게 항상 그럴 수 있겠습니까? 슬슬 짜증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날을 잡아 단호하게 이런 친구관계는 좀 문제가 있지 않느냐? 하면서 얘기를 꺼냈습니다. 물론 그 친구의 현실이 어렵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런 교우관계의 연속이 저로서는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아주 몰랐던 사이였다면 ‘필요’ 에 의한 만남이 이해될 수도 있었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관계’ 인데 ‘쓸모성’ 만을 가지고 다가온다는 것은 이미 파국이 예상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얼마 후,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 사랑의 한계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논리적으로는 제 말이 맞을지 모르지만, 그건 사랑이 아닌, 계산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픔까지 안아주었어야 했다는 것을, 그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말할 수 없었던 사정까지 헤아렸어야 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이용 당하기 싫어, 도마뱀이 꼬리 자르고 도망가듯, 그렇게 갔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제 멘토 신부님은 보속으로 여러분도 잘 아시는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바치라 하였습니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소서.”... 사랑을 가르친다는 제가, 내 사랑의 한계를 맛본, 씁쓸하면서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자기가 사랑했던 모든 제자가 다 배반하고 떠났을 떄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아마 그분도 그런 한계에 맞닿아 있는 시간이지 않았을까요?
사랑하는 신랑 정보영 라파엘과 신부 이호정.. 그리고 오신 하객 여러분!
부부사이란 다른 공간에 있던 이들이, 한 공간에서 지내는 사이입니다. 당연히 보이고 싶지 않았던 면을 보일 것이고, 내 범위를 침범할 것이며, 내가 세웠던 규칙들도 무너지고, 또 무너뜨릴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지요. 그럴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 행복할 것 같은 지금의 이 시간이 지나면 자기 한계를 목격할 것입니다. 더 사랑하고 더 이해하는 내가 될 것입니까 아니면 어릴 때 짝꿍처럼 책상 금 그어놓고 “여기까지 넘지말라” 고 할 것입니까? 한계를 디딤돌로 사랑이 커 나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
